소설리스트

241화 (241/604)

툭 건들기만 해도 금방 울 것 같은 모습이 바곳을 떠오르게 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더욱 약해질 수밖에.

오래 말린 장작 같은 고동색 머리는 결이 좋았다. 말끔하고 하얀 피부에 옷도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재질이었다. 수렴청정을 당한 이들을 떠올리면 그려지는 이미지가 그렇듯 모진 수난을 당했다기엔, 각별히 모셔지고 잘 관리를 받은 부잣집 외동아들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 같이 차분히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어린 행정 관리원이 내게 너무 겁먹은 모습이라 말투를 최대한 유하게 신경 썼다.

“38번째 테라리움에서 행정 관리원과 의논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이다니. 일단 말씀은 알겠습니다. 무례도 어차피 제 쪽에서 가지 품질 검사 기한을 놓친 것이니 제 쪽이 더 죄송스럽죠.”

“아뇨! 저희도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고… 저기….”

“좀 앉으시겠어요? 다과는 방금 치워서 다시 차리기엔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으니… 음, 점심을 아직 드시지 않으셨다면 차라리 식당으로 자릴 옮길까요?”

“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 그럼.”

어린 행정 관리원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텁 소리가 나게 의자에 앉았다. 내가 꺼낸 식사를 같이 하잔 제안을 극구 거절하는 것 같은 몸놀림이었다. 뭐, 이해는 한다. 불편한 사람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라면 체하고도 남지.

더듬거리는 그의 말, 좌우를 휘젓는 불안정한 시선 처리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잔뜩 움츠린 어깨 등이 그를 겁먹은 소동물처럼 보이게 했다. 내 옆에 선 시들링의 위압감에 짓눌려 그쪽은 감히 쳐다도 못 보는 꼴이 더욱 그리 느끼게 만들었다.

시들링이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해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지는 잘 안다.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시들링을 대했던 로웰라가 조금 특이 케이스였다.

로웰라와 이 어린 행정 관리원, 비슷한 또래로 보여도 극명히 다른 성격 차이라니.

사춘기의 아이들이 보이는 치기 어린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라곤 조금도 볼 수 없는 어린 행정관은 자신의 이름을 ‘미미르’라고 소개했다. 귀여운 어감의 이름이었다. 어쩐지 동글동글한 생김새에 꽤 어울리는 이름 같기도 하고.

“저는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입니다. 28번째에 비해 보잘것없지만….”

“으음….”

자신의 테라리움을 남 앞에서 스스럼없이 깎아내리는 행정 관리원이라…. 자신의 직책에 애정과 자신감이 없는 걸까? 아니면 단지 내가 자신보다 앞 번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기 때문에 낮추는 걸까?

“제가 아직 어려서 여러 사람을 자문으로 두고 행정 조언을 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너무 의지하다 보니 제 결정은 자문인들의 의견과 거의 동일해졌고… 어느새 자문인들의 직책이 행정 관리원과 동급이 되었어요. 자문인들끼리 파벌이 생겨 그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여럿 생기고…. 오늘 방문한 이들은 위원회 중 하나의 사람들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남 앞에서 대놓고 하는 건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치부를 까발리는 거나 다름없지만… 그게… 28번째 테라리움과 나쁜 관계가 되고 싶다는 게 절대 아니라는 걸 알려 드리려면 어쩔 수 없이….”

겨우 진정했다 싶었는데 다시 울상이 된다. 어쨌든 말뜻은 충분히 알았다. 내가 나이에 비해 동안인 사람을 착각한 거면 어쩌나 싶었는데 진짜 어린 행정 관리원이었다. 어린 데다 경험도 적은 행정 관리원이라 어른들이 입맛대로 휘두르고 있구나.

“어리다면 얼마나 어린 거예요?”

“열여덟 살이에요.”

거기다 정말 로웰라랑 동갑이었네.

“와, 어린데 벌써 행정 관리원이라니 대단하네요. 혹시 대를 이어서 받았다거나?”

전혀 드루이드로 보이지 않는 일반인이 30번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자리에 앉으려면 일단 다이아로 테라리움을 구매하는 것은 무리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저 가문이 다이아가 좀 많아서….”

부잣집 외동아들 같은 생김새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어? 가문에 돈이 많아서 테라리움 하나를 사 줄 정도면 어느 정도인 걸까?

“설마 외동아들인가요?”

“아뇨, 위로 누나가 넷입니다.”

와, 누나가 넷! 설마 이 세계도 아들 낳기 위해 내리 딸 낳는 옛날 풍습이 있는 건 아니겠지? 가문은 무조건 남자가 이어야 해서 그런 가부장적인 풍습 말이다. 아니, 맞나? 굳이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애에게 테라리움을 떡하니 사다 줄 정도면….

“혹시… 위의 누나들도 전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가요?”

어쩌다 보니 호구 조사가 되었는데, 의외로 미미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테라리움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편했는지 울상도 풀고 술술 잘 답해 주었다.

“아뇨, 행정 관리원 직책을 맡으시기엔 다들 바쁘시고 하는 일도 많으셔서요. 제가 행정 관리원이 된 건… 아들을 그저 좋은 넵튜누스 가문과 결혼시키려면 사람 구실은 해야 하고 적당한 명예가 필요해서….”

너무 속사정까지 술술 풀어내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넵튜누스?”

“네.”

넵튜누스는 처음 듣는 단어라 물었던 것이지만 미미르는 내가 잘못 들어서 되묻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짧게 대답 후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는 건 이 세계에서 꽤나 상식적인 단어라는 건데. 초면인 사람 앞에서 무식을 드러낼 순 없으니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자문인들이 멋대로 행동해도 가문에선 아무 말이 없나요?”

듣기론 대단한 집안이 어린 행정 관리원의 뒷배로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자문인들이란 사람들이 날뛸 수 있는 걸까? 테라리움을 구매할 정도면 대기업 재벌 정도 될 텐데.

“저희 가문은… 특성상 테라리움과 관련된 어떠한 일에도 관여할 수 없어서요….”

“그건 좀 이상하네요. 아들은 행정 관리원인데 어째서?”

“이건 말씀드리기 곤란해서….”

“그렇다면 말씀하시지 않아도 돼요! 뭐 다들 사정이 있겠죠.”

다시 울상이 되는 바람에 황급히 말을 돌려야만 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집안이다.

한참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꾸물거리던 미미르가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정말 염치없지만… 이미 염치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혹시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아, 네. 편히 말씀하세요.”

좋은 가문과 결혼시키기 위해 어린 막내 아들에게 테라리움을 안기는 집안. 정작 아들은 이권을 노리고 파벌을 나눈 어른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나 있고.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문은 손은 놓고 있고.

참 파란만장한 속사정에 딱한 마음이 들어 오늘 찾아온 38번째 테라리움의 자문인들이 보여 줬던 태도는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28번째 테라리움에 조금 머물다 가도 괜찮을까요? 그게… 오늘 찾아온 분들보다 늦게 테라리움을 나설 수 있도록…. 제가 자문인들보다 일찍 돌아가면 아무래도 이미지가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행정 관리원보다 자문인들과 더 오래, 깊은 이야기가 진행되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다면 전 정말로 여기서 이미지가 더 떨어져서….”

그렇지 않아도 그는 테라리움의 최고 권위인 행정 관리원 직책을 달고도 찬밥 신세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행정 관리원을 먼저 돌려보내고 자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길 택했다고 38번째 사람들이 오해한다면, 미미르가 우려하던 점이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설 곳이 더욱 좁아지겠지. 자문인들은 더욱 독단적으로 행동할 것이고.

“그게 뭐 그리 어려운 부탁이라고 그렇게 망설이세요? 얼마든지 묵고 가세요. 저도 다른 테라리움 놀러 가면 진득하니 붙어 있다 오는데요, 뭐.”

하지만 미미르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자문인들이 멋대로 28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한 것을 알게 되자 마자 급하게 몸만 마차에 올라서 오느라 여비를 챙겨 오지 않았다고 한다.

즉, 숙식을 해결할 다이아를 하나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건데. 내게 다이아를 빌려 달라거나 혹은 무상으로 숙식을 부탁해야 되는 점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월렛이 있는 것이 보였기에 의문이 생겼다. 내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챈 미미르가 재빠르게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미미르의 월렛에 있는 다이아는 전부 테라리움 공금이라, 아무리 행정 관리원이라 할지라도 자문 위원회의 보고 및 다수결의 승낙이 없으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미미르의 사비는 전부 가문에서 주는 용돈을 따로 모아 사용하는 것이고 테라리움에서 발생하는 수입이 월렛에 쌓이면 전부 공금으로 묶인다고 했다.

“공금과 구분을 위해 사비로 쓰는 다이아는 전부 현물화해서 보관하거든요.”

그러나 내 입장에선 의문만 더 생길 뿐이었다.

“대체 왜?”

“네?”

“아니,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되지? 아니, 그걸 왜 공금으로 묶지?”

“하지만 다른 테라리움들에서도 다 그렇게 한다고….”

절로 목 뒤가 당겨 와 손으로 짚었다. 그 바람에 자세가 뒤틀리자 멍하니 내 허벅지에 앉아 있던 실새삼이 오뚝이처럼 머리부터 기울어졌다.

떨어질 뻔한 실새삼을 기민하게 잡아챈 것은 시들링이었다. 그는 아주 이때만을 노렸다는 것처럼,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발톱처럼 실새삼의 등짝을 잡아다 대롱대롱 들었다.

그 과격한 행동에 미미르가 화들짝 놀랐다. 그는 실새삼이 드라이어드인 줄 전혀 모르니, 덩치 큰 놈이 어린아이를 거칠게 다룬다고 오해할 법한 상황이었다.

시들링은 거기다 더해 아예 농구공처럼 실새삼을 멀리 던져 버릴 것처럼 팔을 들었다.

“잠깐! 내 드루이드! 남의 드루이드가 네 드라이어드를 짐짝처럼 던지려고 한다!”

“시들링, 아직 걘 애잖아.”

“너도 알다시피 이건 애가 아니다.”

“아니, 어쨌든 모습은 애잖아. 네가 쌓은 감정의 골은 알겠는데 일단 남이 보기에 그 행동이 그렇게 좋게 보이진 않거든?”

“어서 날 구해라! 드라이어드뿐만 아니라 드루이드도 날 죽이려 들다니. 사방이 내 적이군.”

“그러게 착하게 살았어야지. 이리 온.”

실새삼은 약한 척을 한 것은 전부 가식이었다는 듯, 내 손짓에 시들링의 손을 사나운 치와와처럼 물어뜯더니 훌쩍 뛰어넘어왔다. 지 혼자 잘 빠져나올 거면서.

드라이어드에게 설마 이로 물어뜯기는 공격을 당할 줄은 몰랐는지, 시들링은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손등을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어쨌든 물리 딜이긴 하지….

“그….”

미미르가 그새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육아를… 참 과격하게 하시네요….”

인간의 아이가 아닌 드라이어드라고, 원래는 다 큰 놈이라고 오해를 풀어 주는데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세상에 나온 적 없는 서너 살 사이즈의 드라이어드는 일반인들이 보기엔 파장이 참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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