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예상치도 못한 광경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양해를 구한 황금 호박 상회의 사람들이 차곡차곡 다과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트레이를 끌고 온 시들링은 트레이 손잡이만 붙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트레이의 내용물을 내려놓는 일은 하지 않았다.
뭐지? 그냥 간판으로 세워 두는 것도 아니고.
재빠르게 테이블 세팅을 하면서도 힐끔힐끔 시들링을 살피는 얼굴들엔 흐뭇함이 가득했다. 덕분에 내 추측이 힘을 얻었다. 진짜로 아이언비스트를 간판으로 세워 놨다고? 나 없는 한 달간 안면이라도 텄니?
순식간에 텅 비었던 테이블 위에 과자가 종류별로 층을 쌓고 찻잔엔 옅은 김이 오르는 따뜻한 차가 채워졌다. 또한 테이블 한쪽엔 줄마다 종류가 다른 티백들이 담긴 커다란 상자가 놓였다.
“제이 님께서 손님께 늘 대접하시는 대로 준비했습니다. 황금 호박 상회가 38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 공급하는 모든 티백을 두었으니 손님들께선 원하시는 대로 차를 즐기시면 됩니다.”
본 적 있는 매니저 직급의 사람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센스가 대단하다.
“늘 감사해요.”
“아닙니다. 일정을 미리 알았더라면 더 신경 썼을 텐데 손님들께 미흡한 모습을 보여 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군요.”
심부름 나간 제퍼가 그 짧은 사이에 신나게 다 불었는지 38번째 테라리움의 사람들을 보는 그의 시선이 곱지 않다. 우리 사이가 남이라 해도 분점 낸 테라리움은 자신들과 한통속이라는 거겠지.
매니저의 지시에 상회의 사람들 중 하나가 내 잔은 특별히 따로 준비해 차를 따르더니 주전자와 함께 시들링에게 넘겼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시들링이 비로소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색하긴 하지만 찻잔을 내려놓고, 마치 시중이라도 드는 것처럼 이리스의 반대 자리에 시들링이 섰다. 상회의 사람들이 모두 나가도 시들링은 찻주전자를 든 채로 남았다.
그러던 와중에 상회의 매니저가 나가기 전,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아이언비스트님께선 용무가 끝나시면 상회에 들러서 나머지 일정을 소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리 약속된 일처럼 이야기하지만 시들링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매니저는 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는 것처럼 제 할 말만 하고 걸어 나갔다. 방금 말은 굳이 왜 덧붙인 거지?
문득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38번째 테라리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 일부러 시들링의 위명을 확인시켜 주려고 그랬구나.
시들링처럼 걸어 다니는 랜드마크로 적합한 사람이 또 없지. 겨우 마을 레벨이 2레벨 수준인 테라리움이지만 그 안에 유명인이 기거하고 있는 건 그거대로 마을의 수준을 높이는 일이었다.
시들링은 비록 악명이 지나치게 높았지만, 그 엄청난 인물이 이런 곳에서 내 차 시중이나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또 달리 느껴지겠지.
이리스는 어쩐지 시들링을 보며 분하다는 얼굴을 했다.
“저… 정말 저자… 아니 저분이 그 유명한 아이언비스트가 맞습니까?”
시종일관 좋지 않은 태도를 보이던 자들이 급격히 공손해졌다. 그들의 태도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아주 잘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네, 뭐… 제 길드원을 보통 그렇게들 부르시더라고요. 보다시피 그렇게 위험하지만은 않은 사람인데.”
“아… 전속 길드원이셨습니까?”
그들은 앉는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좀 약 오르기도 하네. 나도 시들링처럼 투기장에서 뭐 하나 따 와야 하나.
“세계수 가지의 품질 검진 관련 일정은 최대한 빠르게 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만 주신다면….”
“제이 님.”
그들을 향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이리스가 슬쩍 끼어들었다.
“앞으로의 일정이 가득 차 있어서 확인해 주셔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응? 이건 무슨 속셈이지?
“음, 많이 밀려 있나요?”
“31번째 테라리움 및 해안 테라리움 연합에서 한 달 내내 제이 님의 일정이 비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한 달이나 눕는 바람에 그곳의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지. 구조에 동원된 어선들에게 지급해야 할 사례금은 물론 은둔자의 정원 사람들과 드라이어드들을 이주하는 비용들은 어떻게 해결했으려나? 데이지2에게 행정을 위한 다량의 다이아를 미리 맡겨 놨으니 알아서 처리했으려나? 아니 처리했다면 굳이 날 기다리는 이유가 없으려나.
“아, 그쪽 일정이 좀 밀렸군요….”
“그것뿐만 아니라 16번째 테라리움에 둔 보좌관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고 싶다고 지랄… 아니 방문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방금 이리스, 욕하지 않았어? 못 들은 척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리스가 파필리온에게 악감정이 클 만하지.
“18번째 테라리움과 사업차 동맹을 맺은 것 때문인데, 그 근방 테라리움들과 연합을 발족하는 것을 의제로 판 크게 벌이고 싶다고… 아니 사업을 좀 크게 벌이고 싶다고 합니다. 보좌관은 테라리움을 뜰 수 없으니 제이 님께서 바쁘시다면 일정이 되실 때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께서 대리로 직접 방문하시겠다고 했어요.”
파필리온에게 농장 사업을 떠넘기긴 했는데 돈 냄새를 맡았나 보네.
“그게 그렇게 되고 있군요….”
“그 외에 연금 학회에서도 28번째 테라리움에 연금탑 신설을 요청하면서 일정 잡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아, 그건 좀 많이 생각해 봐야 해요.”
28번째 테라리움엔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득실거렸다. 다른 이들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연금 학회는 조금 위험했다. 언젠간 28번째 테라리움에도 연금탑을 하나 세우고 싶었지만 안 되겠지. 가뜩이나 1번째 테라리움에서 모든 연구를 감시하는 이단 감찰단을 설립할 거라고 했는데.
이리스는 그 후로도 온갖 일정을 내게 들이댔다. 38번째 테라리움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들에게 들으란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건 마치 내가 얼마나 대외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고 바쁜 사람인지 티를 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38번째 테라리움 사람들의 태도도 웃겼다. 그들은 자신들과 마주하는 자리에서 이리스가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전혀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들리지 않는 추임새를 중간중간 흘리고 자신들과 관련 없는 이야기임에도 죄다 귀담아들으며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이제 시들링이 아닌 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니 내게 그들이 이전에 보여 주었던 태도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머진 나중에 들을게요. 손님들이 계신데 너무 기다리게 했네요.”
“아, 아닙니다. 바쁘신 분인데 미리 말씀도 드리지 않고 찾아온 저희가 잘못했지요, 하하.”
재빠르게 말을 꺼낸 이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으며 난처하게 웃어 보였다.
이리스가 콧방귀를 끼곤 그들과 시들링을 흘겨보았다. 분하다고 지었던 표정이 시들링에게 밀린 내 모습 때문이었나?
“아니에요. 가지의 품질 검사를 제때 하지 못한 제 잘못이 크니 이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상은 철저히 해 드리겠습니다. 한… 만 다이아면 되나요?”
“…네?”
“아, 너무 적나요? 그럼 2만? 3만? 아니면 10만? 100만? 지금 당장 드릴 수도 있어요. 흘러간 시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으니 다이아로나마 충분히 보상해 드려야죠. 이 정도 다이아를 움직이는 건 우리 테라리움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아니면 건물 몇 채 세워 드릴까요?”
“100만 다이아를 지금 당장이요…?”
들어올 때처럼 당당한 태도로 얼마든지 불러 보라지. 38번째 테라리움의 자금력이 얼마나 되는진 모르겠지만 28번째 테라리움을 공동 관리하겠다고 내 대리로 나선 이리스 앞에서 배짱부린 무례함은 똑같이 갚아 줘야지.
“그것도 아니면 고액의 다이아가 필요하실 때 38번째 테라리움을 담보로 무이자로 빌려 드리는 혜택을 드릴까요? 우리 테라리움은 한 푼의 이자가 아쉬운 곳이 아니니 이자 따윈 필요 없어요. 제가 말하는 고액의 수준은 천만 단위부터 시작해요. 아니 말이 나온 김에 제가 38번째 테라리움을 인수하는 건 어떨까요? 미뤄진 품질 검사로 오명을 얻으셨다면 제가 깡그리 인수해서 아예 탈바꿈해 놓겠습니다.”
“아하하… 이거 행정 관리원님께서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피해 보상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38번째 테라리움은 28번째 테라리움과 번호 연계법으로 함께 가는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앞 번호 테라리움일수록 대외 업무로 바쁘실 텐데 저희가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품질 검사는 일정이 비시는 대로 언제든지 오셔도 괜찮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날 끌고 38번째 테라리움에 내려갈 것처럼 굴더니.
겨우 이 정도로 찍어 눌러 줬다고 20번대인 이곳에 저 자세를 보이는 수준이면, 그 위로 간다면 얼마나 더 한다는 거야? 18번째 테라리움엔 감히 찾아가지도 못했으려나? 꼭 급이 매겨진 귀족 사회를 보는 기분이다.
“아이고, 이럴 때가 아니지. 바쁘신데 시간을 빼앗아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흰 그저 20번대 테라리움에 인사를 드리려고 왔다 생각해 주십시오. 실례가 많았습니다.”
뭐야, 벌써 물러나는 거야? 말로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직접 보여 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다이아를 어떻게 뿌려 볼지 결정도 하기 전이다. 정말 이게 다야?
“벌써 가시게요? 오신 김에 28번째 테라리움의 명물이라도 보고 가세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들을 이리스가 붙잡았다.
“명물이요?”
“네, 30번대 테라리움이라면 좀처럼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 방문하기 힘드실 텐데,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명물을 여기서도 볼 수 있거든요.”
다이아 분수 이야기구나. 이리스는 그들을 곱게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수액 분수 일곱 개를 모두 도시면 도장도 찍어 드리니 체험해 보실래요? 오늘부터 시범 운영 해 보려고요.”
“수액 분수가… 일곱 개나 있다고요?”
그들은 차마 거절도 못 하고 이리스에게 끌려갔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이 진실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자리에 남아 이리스가 일러 준 일정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테이블을 정리하러 온 황금 호박 상회의 사람들이 상황을 알려 주었다.
이리스는 잠깐 사이에 제퍼, 헤르마, 노토스와 함께 완전 무장을 한 채 등장했고, 38번째 테라리움의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한 채 테라리움을 돌고 있다고 했다.
이리스 파티는 고레벨 드루이드 파티였다. 현재 임무가 없으니 테라리움에 묵으며 평복 차림으로 간소하게 다녔는데 그들이 완전 무장을 하면 위압감이 남달랐다. 38번째 테라리움의 사람들은 드루이드가 아닌 일반인들이었으니 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터였다.
이리스는 자신과 테라리움이 무시당한 것을 제대로 화풀이할 모양인 듯했다.
허세엔 허세로 대하긴 했지만 영 찝찝했다. 더 다르게 대하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되짚는데 데이지2가 난처하단 얼굴을 하고 날 찾아왔다.
“제이 님, 뭔가 이상한데요…. 그게….”
“왜? 또 무슨 일 생겼어? 이리스가 결국 못 참고 38번째의 사람들을 팼어?”
“네? 아뇨. 그런게 아니라…. 38번째 테라리움과 관련된 건 맞는데…. 거기서 행정 관리원이 직접 찾아왔는데요?”
아니, 거기서 사람을 보내 놓고 행정 관리원이 직접 행차한 건 또 무슨 일이야?
“일단 모셔와 줘.”
못 참고 직접 항의하러 오기라도 했을 줄 알았던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등장부터 날 놀라게 했다.
일단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어렸다. 로웰라 또래의 어린 남자아이가 바들바들 떠는 꼴을 하곤 내 앞에 나타났다.
그러곤 대뜸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고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이건 제가 지시한 일이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사람들이… 아니, 부디 무례를 너그러이 봐주시고… 그게….”
무슨 상황이지? 38번째 테라리움에서 사람들이 온 게 행정 관리원의 소관과 무관하다는 건가?
생각보다 너무 어린 행정 관리원. 약자라 생각되는 이에겐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그 사람들.
뭐 수렴청정이라도 당하는 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