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님, 죄송한데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시면 안 돼요? 쟤가 저렇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진짜 오랜만이라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거든요. 딱 30초만 더 내버려 두면 안 돼요?”
제퍼가 이리스를 놀리는 투로 낄낄거렸다. 아마 이 이야기를 이리스가 들었으면 제퍼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30초 뒤에 터질 것 같은데. 책상 엎지 않을까요? 바닥에 고정되어 있더라도 이리스라면 열받아서 바닥까지 뜯어낼 것 같거든요. 아, 저기 헤르마가 내 옆에 있었다면 내기라도 했을 텐데.”
제퍼가 가리키는 곳에 헤르마와 노토스가 이리스와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그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 상황을 즐기는 제퍼와 달리 이리스의 눈치를 살피며 꽤 힘겨워하고 있었다.
“얼마나 체계가 없는 테라리움이면 행정 관리원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대리자가 나온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마스터께선 급한 용무로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미리 일정을 잡으셨다면 상황이 달랐겠지요.”
이리스의 미소 짓는 얼굴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퍼는 그 모습이 마치 재밌는 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마스터, 이리스가 얼마나 버틸지 저랑 내기하실래요?”
“됐네요.”
그런 내기를 해서 뭐 해. 누가 봐도 몇 분 안 갈 것 같은데.
“말은 바로 하시죠. 일정을 지키지 않은 건 그쪽이지 않습니까? 정기 품질 검사일이 한참이 지나도 방문하지 않으니 덕분에 이쪽이 얼마나 곤욕이었는지 아십니까? 그쪽에서야 행정 관리원이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38번째 테라리움은 현재 1년 넘게 가지의 품질 검사를 받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세계수 가지에 이상이 생긴 것 아니냐는 외부의 불명예를 받고 있다고요!”
행정 관리원이 해야 되는 공식 일정에 그런 것이 포함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내가 너무 벼락치기로 직책을 따내는 바람에 인수인계도 못 받고. 성급하게 16번째 테라리움을 뜨지 말고 파필리온에게 제대로 강의라도 받았어야 했나? 아, 이건 내 잘못이 맞는 것 같은데.
“이거 참, 행정 관리원이 교체되었다고 하더니 테라리움 하나 간수하지 못할 정도로 자금난에 허덕이는 것 아닙니까? 과수원에 직원 하나 고용할 다이아도 없을 정도면 말 다 했지요. 38번째보다 훨씬 앞 번대에 있길래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 와 봤더니만 우리 테라리움보다 못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번호를 38번째 테라리움에게 공동 관리로 넘기시지요. 번호의 위명이 아까운 수준입니다.”
하지만 저 말을 듣고 나니 미안한 마음이 싹 가셨다. 아주 내 테라리움을 물로 보네?
“야, 이리스 참아야 하는디. 넌 지금 제이 님 대신 앉아 있는 건디…. 여기서 네 성격대로 엎으면 테라리움 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디 잘 생각해.”
헤르마가 이리스가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를 꾹 누르며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이리스는 무너지는 표정을 숨기려 아예 고개를 내려 버렸다. 하지만 그 모습이 상대에겐 굴욕을 느낀 모습이라고 해석된 듯했다. 기고만장해진 사람들이 더욱 입을 놀렸다.
“저희가 비록 그쪽보다 번호가 뒤라고 하더라도 자금적인 측면에선 20번대 테라리움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을 거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기한을 길게 잡고 낮은 이자로 다이아를 빌려 드리지요. 담보는 28번째 테라리움으로 하시면 됩니다.”
“이거 원, 문제를 따지러 왔다가 적선하고 가게 생겼군요.”
난 나름대로 우리 테라리움이 많이 복구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얕잡힌 거지?
내가 거쳐 간 행정 관리원들과 그들의 접객실을 떠올려 보았다. 파필리온은 뒷배를 보아 주는 인페르노라는 자금줄을 작정하고 이용해 모든 부분을 고급화했었다. 수행원도 여럿 데리고 다녔지.
18번째 테라리움의 키르켄도 집무실은 무척 소박했지만 접객실은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꾸며 놓았다. 나비를 받으러 갔던 26번째 테라리움의 집무실과 접객실도 강한 인상을 받진 못했지만 꽤 아늑하게 잘 꾸며 뒀던 것 같다.
그들이 왜 보이는 부분에 그렇게 힘을 줬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건 테라리움 간의 기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테라리움들은 앞 번호에 대해 경외감을 갖지만 그 이면엔 열등감이 있었다.
다이아를 부어 세계수의 가지를 유지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테라리움의 정상들이다. 부(富)는 건재한 세계수의 가지를 상징하는 방법이었다.
직접 과수원의 가지의 방에 방문하지 않더라도 테라리움이 돌아가는 꼴만 보고 대외적으로 판단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가지의 축복을 유지시키고도 다이아가 이만큼 남는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는 거지.
다이아를 세금으로 제공할 수 있는 수많은 거주민들,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높고 거대한 건물들, 다양한 복지 시설들과 화려한 여가 시설들 그리고 테라리움의 중추가 되는 과수원까지. 모든 부분이 번호가 앞인 테라리움일수록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었다.
26번째 테라리움이 최상급 장신구를 걸고 한 경품 이벤트, 18번째 테라리움의 단풍 축제, 16번째 테라리움의 초호화 백화점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쇼핑 스토어…. 이것들이 단순히 마련된 장치들이 아니었단 말이지.
그런데 내 테라리움은 따지고 보면 마을 레벨이 이제 복구가 끝나 2레벨쯤 된 수준이니, 이것 때문에 제대로 얕보인 것이다.
38번째 테라리움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벤트는 내가 마을 레벨을 미리 높여 놨으면 좋게 굴러갔을 텐데.
아, 기간 제한 있는 이벤트인 줄 알았으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찾으러 가기 전에 좀 더 신경 썼을 건데!
이놈의 세계수 가지는 다이아를 정도 이상으로 많이 먹여 놔서 어떠한 테라리움들보다 레벨이 높을 텐데, 그러면 뭐 해? 가지가 나서서 건물을 세우기를 해, 나가서 사람을 데려오기라도 해! 집구석에서 밥만 축내고 말이야.
네 녀석에게 들어간 다이아 액수로 따지면 은둔자의 정원에 있던 공중 정원을 통째로 뜯어다가 테라리움 안에 옮겨 놓을 수도 있었겠다!
한시바삐 테라리움을 대표하는 축제를 열든, 랜드마크를 만들든, 뭐라도 해서 대외적으로도 28번째 테라리움의 위치를 확고히 해야겠어. 과수원에 보석도 잔뜩 두르고.
“전 행정 관리원인 스케어크로우가 통치하던 28번째 테라리움의 위명은 이미 잊힌 지 오래일 테니 내가 잘했어야 했는데…. 하…. 파필리온 자식 잠깐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내려오라고 할까?”
“어어! 이리스! 그거 진짜 엎으면 안 돼!”
내 옆에 있던 제퍼가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깐 사이 이리스가 참지 못했는지 밥상 엎기라도 할 기세로 테이블을 붙들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그녀에게 제퍼는 물론 뒤에 시립한 헤르마와 노토스까지 붙어 뜯어말리고 있었다.
“이것 놔! 감히 우리 길드의 테라리움을 욕보이는데 가만두라고?”
“이런 자리는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면 안 된다는 걸 알잖아? 제발 참아라.”
이 꼴을 엘더는 물론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안 봐서 다행이다. 이제부턴 인간 사회의 일이라 제퍼를 만나기 전 엘더를 메스키트가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는데 잘한 판단이었다.
얘도 제 드루이드가 무시당하는 꼴은 절대 못 보지. 이리스가 폭발하기 전 드라이어드들이 무력 행사를 하지 않았을까?
실새삼만큼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핑계로 곧 죽어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안고 있었지만, 그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애늙은이 같은 표정하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당장 자리를 비우기 힘들었네요.”
이리스가 정말 큰 난리를 피우기 전에 이젠 내가 나서야 했다.
“앗, 제이 님! 몸은 괜…. 아, 빨리 해결하고 오셨네요.”
이리스는 날 보고 놀란 얼굴을 하다 자신이 어떤 추태를 벌이고 있는지 깨닫곤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장정 셋이 허망한 얼굴로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만나서 반가워요. 제가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제이예요.”
“큼큼,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께선 참으로 검소하시군요.”
상대는 날 기분 나쁘게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어디서 많이 본 눈이다. 경매를 하러 18번째 테라리움에 갔을 때, 회의실에 앉아 있던 대다수가 날 보던 시선이 이랬지, 아마?
하필 내 행색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간편한 튜닉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누가 봐도 자다 깨서 마실 나온 옷차림으로 보일 것 같은데?
“제 테라리움에선 편하게 있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검소하단 말은 처음 들어 봐서 아주 생소하기도 하네요.”
이 세계로 온 이후로 정말 처음 듣는 말이지. 내가 검소하다니? 우리 엘더가 들으면 울고 갈 소린데.
“어찌나 생소한지 처음 뵙는 분들인데도 아주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것 같네요.”
이리스는 황급히 자기가 서 있던 자리를 내게 양보했다. 그러곤 그녀가 좀 전까지 난동을 피울 뻔했다곤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올곧고 바른 자세로 내 옆에 시립했다.
“음, 제퍼, 황금 호박에 대접이 필요한 손님이 왔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아, 넵!”
제퍼가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나갔다.
모든 것이 다 있는 만물상인 황금 호박 상회가 마침 우리 테라리움에 분점을 준비 중이었다. 말을 전하면 테라리움 사정을 아는 그들이 적당히 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다.
아직 정식 보좌관도 없고 과수원에 직원이 없으니 당연히 접대용 다과도 내놓지 못한 채 테이블이 텅 비어 있었다. 차 한 잔 내오지 않아서 야박하다고 생각했으려나? 일단 이런 점도 얕보였겠군.
키르켄이나 파필리온이 집무실에 질 좋은 차와 다과를 잔뜩 구비해 놓던 것이 떠올랐다.
아주 살펴봐야 할 것 천지였다.
“28번째 테라리움을 공동 관리하시겠다고요?”
“흠흠, 들으셨군요. 이건 순전히 테라리움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렸을 뿐입니다.”
“음…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우리 테라리움의 몸값은 비싼데?”
“저희 38번째 테라리움도 자금력 하나만큼은….”
“아, 다른 분들은 모르시겠구나. 제가 이 테라리움을 그냥 인수인계 받은 것이 아니거든요. 샀어요. 18번째 테라리움에서 경매로. 그때 경매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어디 보자. 일단 기억나는 게 32번째 테라리움이 있었고 주얼리 콘도 있었고 황금 호박 상회도 있었고 그레이트 빈 연합도 있었죠.”
꽤 유명한 이름들이지? 난 몰랐는데 32번째 테라리움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셋은 완전 대기업이더라고. 이런 대기업들을 상대로 내가 테라리움을 경매로 따냈는데.
“아, 물론 참고로 경매는 시작도 전에 금액 보고 다들 포기했어요.”
“…포기했다고요?”
“뭐, 지금 테라리움이 보시기에 많이 부족해 보일 순 있는데. 이게 제 입맛대로 다시 꾸미려고 뜯어고치다 보니 예상했던 그림이 되려면 아직 좀 멀었거든요. 제가 테라리움에 너무 신경 쓰느라 품질 검수가 늦어진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전 행정 관리원에게 그런 부분들을 제대로 인수인계를 받지 못해서 1년 넘게 딜레이가 된 건 몰랐어요.”
그들이 무어라 반론하려던 찰나 다과 세트를 한 아름 챙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대부분은 황금 호박 상회 쪽에서 보낸 사람들이었으나 그 선두에 선 시들링의 얼굴을 보고 사레가 들릴 뻔했다.
쟤가 조신하게 트레이를 끌고 오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차마 상상도 못 했는데…. 대체 왜 거기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