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8화 (238/604)

아티팩트를 들여다 보며 짭신 엘더는 뭘 하고 있나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토끼 굴에 숨는 토끼처럼 후다닥 하우스 안으로 숨어 버리는 그녀의 뒷모습만 겨우 볼 수 있었다. 무슨 일 생기면 날 피해 숨어 버리는 것이 너희 꽃들의 종특이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엘더에게 그랬듯이 그녀도 달래려던 찰나에 데이지2가 날 찾아왔다.

덕분에 테라리움 어딘가에 있을 모두를 만나는 의외의 상황이 마련될 것 같았다. 이리스 파티는 벌을 가지고 있으나 시들링이나 로웰라 그리고 필라에게는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는데.

내가 있는 곳을 단숨에 찾아온 데이지2가 난처하단 얼굴로 말을 전했다.

“제이 님, 깨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많이 힘드실 텐데 갑자기 일이 생겼습니다. 행정 관리원으로서 봐 주셔야 할 일이에요.”

“무슨 일이길래?”

얼마나 급한 일이면 데이지2가 저렇게 사색이 되어서 날 찾아올까?

마음 같아선 내가 누워 있던 곳으로 돌아가 드라이어드들과 오랫동안 휴식을 즐기며 회포를 풀고 싶었는데.

은둔자의 정원에서 너무 고생했단 말이야.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제이 님이 테라리움에 계셔서 다행이에요.”

데이지2가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며 말했다. 내가 꼭 필요한 일?

“38번째 테라리움에서 정식으로 사람들이 방문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제이 님께서 아직 누워 계시는 줄 알고 전속 길드원분들께서 대신 맞이하러 가셨어요.”

“38번째에서? 대체 왜?”

“저도 정확한 행정 사정은 잘 모르지만 추측을 해 보자면 번호 연계법 때문인 것 같습니다. 38번째에서 굳이 28번째에 찾아올 만한 일은 그것뿐이라….”

“번호 연계법?”

“네, 제이 님께서 28번째 테라리움의 임시 행정 관리원직을 정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18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하신 것을 예로 들 수 있어요. 테라리움 번호의 끝자리가 같으며 10의 자리가 더 낮은 쪽이 중앙 행정 관리부를 대신해서 권한을 행사하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임시 딱지 떼러 1번째가 아니라 왜 18번째로 가야 하는지 조금 이상하긴 했지.

파필리온도 16번째 테라리움의 가지 품질 검사를 6번째 테라리움에서 온 사람들에게 받았다고 했고.

이게 8번째끼리 연관되는 법인 거구나.

“잠깐, 테라리움에서 정식으로 방문한 거면 꽤 중요한 사람들이잖아. 그럼 그 사람들을 어디로 안내해야 하는 거야? 원칙대로라면 과수원인데, 과수원은 알다시피 상태가 안 좋지 않아?”

“음, 깨어나시면 가장 먼저 과수원을 한번 들러 보실 줄 알았는데 아직이신가 보네요.”

그게… 엘더가 외곽 쪽으로 튀어서….

행정 관리원이 행정의 중추나 다름없는 과수원을 신경 쓰지 않은 모양새라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테라리움을 대표하는 건물인 만큼 과수원의 복구는 새로 이주해 오신 분들이 거주지보다 더 먼저, 더 신경 써서 하셨어요. 전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짓지는 못했지만 큰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복구됐어요.”

“은둔자의 정원에서 온 사람들이?”

“아, 그런 이름이 붙은 곳에서 왔다고 했던 것 같기도…. 제이 님께선 과수원을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분들이 자신들은 과거를 되새기는 업을 지닌 사람들이니 과수원에 어떤 과거가 얽혀 있다 하더라도 침묵하겠다고 하셨어요. 또 제이 님께서 마을 단위의 사람들을 단체로 이주시킨 것은 처음이라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멋대로 판단해서 죄송합니다.”

“아냐, 잘했어. 내 판단을 기다렸으면 오늘에서야 겨우 복구 들어갔을 텐데, 뭐. 잘 생각했어. 과수원을 맡기기에 적합한 사람들이긴 해.”

“혼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이네요. 복구에 참여한 사람들은 장담했던 대로 과수원이 타 버린 연유에 대해 전혀 묻지 않으셨어요.”

새로 터전을 제공하겠다고 했고 그 터전이 큰 피해를 받았다고만 말했을 뿐인데, 막상 도착하니 죄다 타 버린 거대한 과수원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기당했다고 생각했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묵묵히 테라리움을 발전시켜 주었으니 참 고마웠다.

“어? 마스터! 일어나셨어요?”

데이지2가 테라리움 입구로 안내했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건 어쩐 일인지 제퍼뿐이었다.

“오랫동안 일어나시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멀쩡해 보이니 정말 다행이네요. 섬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곳이었다면 저희도 동행할 걸 그랬어요.”

“아니에요. 호송 의뢰도 자꾸 지체되고 있었고. 보시다시피 잘 해결하고 왔어요. 아, 호송을 맡겼던 의뢰인의 가족분들이 모두 테라리움에 잘 정착한 건 봤어요. 감사해요.”

“에이, 이것도 다 다이아 받고 하는 일인데요. 저희가 또 맡은 의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완수하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이곳에 왔다는 건….”

제퍼가 데이지2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38번째 테라리움에서 사람이 온 걸 들으셨군요. 일단 이리스가 부길드 마스터 직권을 가지고 있으니 제이 님의 대리 격으로 행동했어요. 저는 그런 무거운 자리는 싫어서 피했는데, 마스터가 오셔 버렸으니 더는 도망 못 가겠네요. 이리스는 과수원으로 가는 중일 테니 함께 가실까요?”

“네, 그런데 이 데이지가 말하길 분위기가 안 좋았다던데요?”

제퍼와 함께 과수원을 향해 걸었다.

“묘하게 불만이 가득 차 있는 눈치던데요? 누가 보면 제이 님이 다이아라도 빚진 줄 알겠어요.”

“그럴 일은 없죠.”

“네…. 없겠죠?”

내가 누굴 빌려주면 빌려줬지. 제퍼는 자신이 헛소리가 심했다며 제 입을 때렸다.

“하여튼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 인간들이었습니다. 첫 만남부터 인상을 그렇게 주다니. 정식으로 보낸 사람이면 이건 공식적인 자리잖아요? 마치 우리 테라리움이 얕보이는 듯한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그렇게 느낄 정도라면…. 벌써부터 머리 아프네요.”

깨어나자마자 힐링은커녕 복잡한 일을 다뤄야 하다니.

“그런데… 저 진짜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열심히 참았거든요? 물어봐도 되나요?”

“넹?”

“그 아이는… 웬 아이인가요?”

제퍼가 심각한 얼굴로 실새삼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갑자기 애를 안고 나타나시니까…. 후계자 같은 건가요? 혹시 먼 훗날 길드 마스터의 뒤를 잇게 되는 그런 아이인가요? 그럼 지금부터 잘 보여야 되니까 제게만 살짝 언질을 주시면….”

“얘 드라이어드예요. 아, 여행을 많이 한 제퍼도 이렇게 어린 드라이어드는 처음 보셨구나.”

“정말 드라이어드라고요?”

“흥, 내가 어려 보여도….”

실새삼이 콧방귀를 뀌며 제퍼를 거만하게 바라보았다.

“다물어라. 너에 대한 설명은 앞으로 나만 한다.”

실새삼에게 얽혀 있는 위험한 과거가 너무 많았다. 차라리 길드원들을 모아 놓고 내가 정식으로 소개하는 것이 낫지, 이 거만한 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 드라이어드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거였나요? 묘목이라고 부르기에도 한참 어리네요. 와… 진짜 귀엽다.”

제퍼가 실새삼의 볼에 손을 대려다 황급히 뗐다. 안겨 있던 실새삼이 물어뜯을 기세로 아르렁거렸기 때문이다. 지가 개도 아니고. 성질이 개중에 제일 사납다는 치와와 저리 가라다.

“와… 어린 드라이어드는 겉으론 티가 안 나네요? 꽃도 안 보이고.”

실새삼이 성인일 적에도 꽃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아마 다른 꽃들처럼 화려하고 눈에 띄는 꽃은 아닐 터였다.

“일단 38번째에서 보낸 사람들 일을 해결하고 소개해 줄게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이 님께서 비록 쓰러진 채로 오시긴 했지만 엄청 대단한 일을 벌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듣기론 31번째 테라리움 부근의 생태계를 죄다 바꿔 놓으셨다고….”

“그건 모르는 이야긴데…. 그것도 이후에 같이 들어야겠네욥….”

생태계를 바꿔 놨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엘더와 한 그래프트가 영향을 끼친 거야?

그러고 보니… 처음 엘더와 그래프트를 펼쳤을 때, 그 지역을 완전히 성역으로 바꿔 놓은 느낌이 들었었지.

무려 <무한 다이아>의 모든 다이아가 소모된 그래프트였다. 대체 어떻게 바뀌어있을까? 조금 두려운 기분도 든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과수원이었다. 데이지2의 말대로 흉가 같았던 건물이 말쑥하게 변해 있었다. 전의 처참한 모습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멀쩡한 건물을 보니 감격에 차 눈물이 다 나올 정도였다.

복구에 정말 힘내 주었구나. 과수원의 건물 상징 격과 다름없는 거대한 유리 돔은 복구가 어렵다고 판단되었는지 완전히 철거해 버렸다. 그렇기에 단순 큰 건물로만 보였지만 다른 건물들보다 외관에 꽤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보였다.

너무나 멀쩡한 모습의 과수원을 구경하느라 발을 멈췄더니 데이지2가 이걸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말을 꺼냈다.

“주얼리 콘 공방의 장인들이 외관 변경을 허락해 주신다면 보석들을 사용해서 외관을 장식해 주시겠다던데요? 이 상태서 유리 돔을 다시 세우는 것보다 다른 테라리움들에선 시도해 본 적 없는 장식을 해 보자고 하셨어요. 보석들이라고 해 봤자 액세서리로는 가치가 없는 하급 보석들을 사용하실 거라고는 했는데. 제이 님이 주얼리콘의 모든 보석들을 전부 매입하겠다고 말씀하신 적 있나요? 당연히 건물 장식으로 사용하시는 줄 알고 계시던데.”

“그거 멋지다. 건물을 죄다 보석으로 두른다고?”

겉보기에 쓸데없이 엄청 화려해서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인 건물이라. 이거 완전 소설 속 황제들이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잖아? 그대로 실현하면 28번째 테라리움의 아방궁이 되겠군.

뭐 황금으로 만들어진 기둥이라든가 수정으로 만들어진 옥좌라든가…. 그 지경까지 가면 보통은 나라에 폭정을 일삼는 폭군이 미쳐 날뛰는 수준이긴 한데. 난 다이아에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고.

생각해 보니까 사람이 단일로 부리는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사치는 은둔자의 정원으로 증명됐잖아? 섬을 거대한 정원으로 만든데다 공중 정원 벽면을 죄다 황금 벽화로 둘러 놨으니. 물론 세상을 손에 넣었던 드루이드가 한 일이지만 걔도 하는데 테라리움의 과수원 하나 정돈 괜찮잖아?

“당장 하자고 하자. 오늘부터 착수하라고 해. 아주 번쩍번쩍 테라리움을 과시할 정도로.”

“네! 역시 다이아몬드가 제일이겠죠? 아니면 붉은 보석인 루비라든가.”

데이지2가 신나서 몸을 들썩거렸다. 하도 안절부절못하길래 지금부터는 나 혼자 가도 괜찮으니 주얼리 콘에 연락하러 가도 된다고 하자마자 뛰어가 버렸다.

“그냥 해 본 말이 아니라 진짜 과수원 전체를 보석으로 꾸밀 생각이세요?”

“길드 룸이 보석으로 반짝거리는 걸 상상해 보세요.”

“완벽하네요. 부와 명예를 다 가진 길드라고 생각할 겁니다. 전 찬성입니다.”

과수원 내부도 멀쩡한 외관만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비록 아직 직원을 고용하지 않아서 넓은 건물에 사람 하나 돌아다니고 있지 않아서 쓸쓸한 느낌이 들긴 했다.

“하, 이거 직원도 빨리 고용해야겠는데. 38번째 테라리움의 사람들이 이걸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지….”

얕보이긴 싫은데.

“걱정 마세요. 이리스라면 일부러 좀 빙 둘러서 가더라도 테라리움의 명물이나 다름없는 분수대 한둘쯤은 보여 주고 갔을 거예요.”

제퍼가 위로했지만 막상 사정은 다른 것 같았다.

길드 룸이 되어 버린 행정 관리원의 방 대신 응접실로 사용하고 있다는 공간에 도착했을 때, 불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열매를 뽑기 위해 대기할 드루이드들을 위해 사용할 공간인지 그곳은 문이 없었다. 그래서 안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여과 없이 들려왔다.

“너무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 원, 누가 누굴 평가해야 하는지.”

“차라리 38번째 테라리움에서 28번째 테라리움을 평가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누가 누굴 평가해?

“…이리스가 엄청 참고 있나 본데요?”

제퍼가 사색이 된 얼굴로 슬쩍 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나 대신이란 자리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이리스가 이를 악물고 서비스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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