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향기.”
달콤한 향이 제 주인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린다. 마치 숨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건물들이 등을 돌린 외진 곳에서 엘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실새삼이 엘더 쫓는 나침반처럼 위치를 집어내지 않았다면 오래 헤맬 뻔했다.
“엘더!”
하늘을 올려다보며 등을 돌리고 있던 그가 내 부름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어 휙 몸을 돌리더니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설마 여기까지 날 찾아온 거야? 벌써 그렇게 걸어 다녀도 돼?”
그러다 덜렁 안겨 있는 실새삼을 보곤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건 또 왜 안고 다녀?”
“아, 얘는 없다 생각해. 그냥 인형이려니 하고. 그리고 내가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테라리움 안 좀 돌아다닌다고 큰일 나진 않아, 뭐. 넌 이런 곳에서 뭐 하는 거야?”
“흠흠.”
“아, 인형이 말을 처하네. 어디다 던져 놓고 올까?”
실새삼은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
테라리움 어딘가에 내버려 두면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묘목인 줄 알고 좋다고 데려가지 않을까?
엘더는 티 나게 시선을 피하며 죄책감이 속 안에 똘똘 뭉쳐 있음을 알렸다.
“엘더, 너에게 사과할게. 그래프트는 내가 좀 주체를 못 했어.”
“그건 네가 사과할 일이 아냐! 애초에 나랑 그래프트를 하지 않았다면 네가 그렇게나 오래….”
“그래프트를 하지 않았으면? 그럼 우린 지금 여기에 있지도 못 했을걸?”
엘더와의 그래프트는 기적처럼 해일을 막아 냈다.
“하지만…. 나 때문이야.”
팔이 좀 아파 와서 실새삼을 내려놓으니 진짜 놓고 갈까 봐 황급히 내 다리에 매달린다.
“너와의 그래프트였지만 넌 내 영혼에 가지를 접목했을 뿐, 결국 시전한 건 나잖아. 내 모든 것을 걸겠다는 생각에… 좀 오버해서 힘을 썼어.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야.”
엘더, 그거 아니? 네가 평생 모아도 못 모을 만큼의 다이아가 그래프트에 들어갔단다. 현재 이 세계에 풀려 있는 모든 다이아를 모으면 그 정도로 모이려나?
“모든 걸 걸었다고? 그 파도에서 전부가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난 널 지키기 위해 그래프트를 한 건데 네가 없으면 무슨 의미야….”
“모든 걸 걸겠다고 마음은 먹되 당연히 나를 전부 걸 생각은 없었지. 난 전부를 살리고 죽을 만큼 그렇게 희생정신이 뛰어나지 않아. 내가 그렇게 쓰러져 버릴 줄은 정말 몰랐어. 그저 좀 심하게 오버해서 수치 조절을 잘 못했어.”
엘더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제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내 영혼을 쥐고 있던 네가 실시간으로 죽어 갔어.”
“엘더….”
“놓아 달라고 소리쳐도 네게 닿지 않고… 난 아무것도 못 하고 네가 죽어 가는 모습만 봐야 했어….”
곧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엘더의 눈가가 빨개졌다.
“정말 끔찍했어. 내가 생명을 살리는 꽃이라고? 네 생명을 뽑아다 남을 살리는 꽃이라면 차라리 너 말고 아무도 살리지 않겠어. 다신 그때와 같은 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 제이, 네가 나와 손을 맞잡고 죽어 갔다고…. 네가 죽는 모습도 죽어 가는 모습도… 아픈 것도 전부 싫어.”
날 바라보는 녹안이 비 내리는 숲처럼 젖어 들었다. 이슬을 떨궈 내는 풀잎처럼 맑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왜 울고 그래.”
하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티끌 한 점 없는 눈밭에서 녹아내리는 물처럼 순결하고 청초했다. 그 모습에 내 온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다 잘못했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 마…. 난 널 죽일 뻔한 꽃이야.”
엘더는 도통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을 무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성큼성큼 걸어온 하얗고 큰 덩치가 덥석 날 끌어안았다. 어찌나 힘 있게 안는지 키에 눌려 허리가 뒤로 꺾일 지경이었다.
“…많이 놀랐지. 그런데 나 정말 괜찮아.”
“…….”
물기 어린 목소리가 형태 없이 웅얼거렸다. 자꾸만 뭉개지는 목소리에 뭐라고 중얼거리나 들어 봤더니….
“…날 버리지 마….”
“…너!”
자신의 탓을 하는 건 이해할 순 있어도 설마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품에 안겨 있어서 뭐라도 말하기 위해 벗어나려는데 그럴수록 긴 팔이 더욱 거미줄처럼 옭아맸다.
“엘더!”
엘더의 상태가 심각했다.
그는 ‘날 버리지 마’ 한마디만 중얼거리며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말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괴로움에 짓눌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엘더, 잠깐만. 이것 좀 놔 봐. 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널 버리다니? 너! 그런 소리 함부로 할 거야? 내가 널 왜 버려!”
있는 힘껏 몸부림치니 겨우 엘더의 팔이 풀렸다.
숲에 내린 밤처럼 어둠이 깔린 녹안이 나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완전히 풀이 죽은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는 것은 알겠다. 어쩌다 사고 방식이 그렇게 튀었는지는 모르겠다. 내 정신이 부재한 한 달이란 시간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을 걱정하는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엘더는 수많은 걱정에 장시간 동안 짓눌려 온 것이다.
“엘더, 나 좀 봐. 우리 예쁜 꽃.”
“날… 버릴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마. 나 쓰러지기 전보다 지금이 더 아플 정도야.”
“아프면… 아파선….”
“엘더, 미안해. 네가 이렇게까지 두려운 생각에 가득 차 있을 줄은 몰랐어.”
엘더와 눈을 마주하느라 시선을 돌리는 대신 그의 팔을 더듬고 내려가 간신히 손을 찾아 붙잡았다. 흠칫 놀라 파드득 뛰던 손이 고집스럽게 붙잡자 따라 엉겨 붙어 온다.
“이것 봐. 나 이젠 정말 괜찮아. 그렇지? 한 달이나 누워 있던 거 사실 내가 잠탱이라 더 오래 잔 걸 수도 있어. 남들이라면 더 빨리 일어났을 거야. 지금 완전 멀쩡한 거 보이지?”
내 말에 엘더의 눈이 찬찬히 날 살핀다. 걱정을 가득 담은 눈이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건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를 바라보았다.
엘더의 손을 잡아 올렸다. 약간의 반항이 있었지만 그래도 잘 끌려 올라갔다.
“넌 내게 이처럼 널 맡겼을 뿐이고 손을 직접 끌어 올린 건 나야. 나조차도 내가 그렇게 엄청난 힘을 낼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래서 대가가 꽤 컸고. 다음엔 절대 무리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난….”
“그래도 불안하다면 네가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그래프트를 하자고 하지 않을게.”
자신이 먼저 마음먹어 놓고 막상 내가 말을 꺼내니 눈치를 봤다.
“그래프트를… 하지 않겠다고? 그래도 돼? 우리가 쓸 수 있는 가장 큰 힘이잖아.”
“네가 원치도 않는 힘을 억지로 사용해서 뭐가 좋겠어. 이참에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그래프트 사용해 보자고 닦달해야지. 그리고 엘더.”
이번엔 내 쪽에서 천천히 그를 끌어안았다. 최대한 안정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너와의 그래프트가 있었기에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진실이야. 넌 생명을 살리는 꽃이 맞아. 그래프트가 없었다면 지금쯤 난 바다에 수몰되었을지, 표류하다 발견되지 못해서 죽었을지 알 수 없지만, 다신 세상의 빛을 볼 수 없었다는 건은 확실해. 네가 있었기에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야.”
날 위해서라도 내 드라이어드들을 위해서라도 다시는 다이아를 전부 사용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아야겠다.
“내가 날 살린 꽃을 어떻게 버리겠어? 물론 그것 외에도 난 내가 가진 드라이어드들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욕심이 많아서 다 가지면 다 가졌지. 너희들이 날 떠난다고 해도 다리 붙잡고 안 보내 줄 거야.”
“내가 널 떠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래, 절대 떠나지 마. 그러니까 널 버린다느니 하는 헛소리도 하지 마. 내게는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소중하지만 그래도 넌 나와 처음으로 영혼의 연결을 맺은 드라이어드잖아. 내 여행의 시작이 너와 다름이 없는데 앞으로 계속될 여행에 그런 네가 빠져서 되겠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자.”
내 예쁜 꽃, 마음의 안정을 겨우 찾은 것인지 떨림이 멎은 엘더가 천천히 마주 안아 왔다.
겨우 그를 달랜 것 같지만 엘더는 다시 그래프트를 하겠다는 말은 결국 하지 않았다. 그가 자책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시간이 약일 것 같았다.
손쓸 틈도 없이 내가 죽어 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는 엘더. 내가 정말 여럿에게 너무 잔인한 짓을 했다.
거대한 자연재해에 단일 드라이어드의 힘으로 맞서고 모두를 구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기치도 못한 상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곪고 있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돌아가자. 아직도 날 피할 생각은 아니지? 나 한 달이나 네 예쁜 얼굴을 못 봤으니 못 본 만큼 실컷 봐야겠는데.”
“알았어…. 실컷 봐.”
아직도 눈물을 매단 채 우물쭈물 말하는 것이 여간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신 놓지 않을 거라는 것처럼 손을 꼭 붙든 엘더를 끌고 자리를 뜨려는데, 옷이 쭉쭉 아래로 잡아당겨졌다. 자신의 존재를 잊은 것이냐며 실새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엘더 달래는 동안 얜 그 자리서 다 지켜보고 있었겠군.
군말 없이 실새삼을 안으니 엘더가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저렇게 어디서나 잘 보이는 커다란 꽃은 잘만 챙기면서 이 작은 나를 놓고 가려고 했다니.”
“저걸 왜 굳이 안고 다니는 거야?”
“그럼 네가 안을 테냐?”
엘더가 실새삼의 말에 진저리를 쳤다.
“가만 보니 참 낯익은 꽃 같은데 말이야. 아무리 이 녀석의 곁에서 함께 있느라 오래 보고 지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익숙한 향기와 외모인데. 혹시 내 취향의 꽃인 건가?”
기억을 잊었다고 하더라도 짭신 엘더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이 잔상처럼 남아 있나 본데. 그러고 보니 은둔자의 정원에서도 그는 꽤 짭신 엘더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
단순히 구해 줬던 일이 고마워서였던 걸까? 아니면 섬의 생물들을 구슬리는 등의 일에 적합해서 곁에 두면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네 포레스트로 들어간 다른 엘더는 잘 있어?”
“내게 영혼을 위탁했기 때문에 우린 같은 고통과 슬픔을 공유하고 있어. 그 애도 지금 만만찮게 힘들어하는 중이야.”
엘더는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인즉슨 다들 28번째 테라리움을 돌아다닐 때, 짭신 엘더는 아티팩트에 콕 박혀 나오지도 않고 엘더처럼 한없이 우울해하고 있단 뜻이었다.
“다음엔 절대 한 달이나 눕는 일은 벌이지 않을 거야.”
“제발 그렇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