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6화 (236/604)

“엘더를 데려올까요?”

메스키트가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찾으러 갈게. 다들… 굳이 날 따라올 필요는 없어.”

혹시라도 중간에 걷다가 넘어질 것을 대비해 침대에 앉아 열심히 몸을 풀었다.

그러던 중 구석에서 부담스럽게 눈을 빛내며 날 바라보고 있는 마거리트가 눈에 띄었다. 내 몸 상태를 배려해서 곧바로 안겨 오지 않은 것을 잘했다고 칭찬해 줘야 할지….

“마거….”

운을 떼자마자 침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그대로 돌진해 오려던 마거리트의 경로를 메스키트가 다리로 튼 것이다.

“내 진리!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걷기 힘들면 전처럼 내가 안고 다닐까?”

은둔자의 정원에서 엄청난 수의 계단을 오르기 싫어서 마거리트에게 안겼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화려한 마거리트가 날 안고 다니면… 꽃마차나 다름이 없지. 하지만 꽤나 쪽팔렸던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니 웬만하면 다신 안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메스키트의 제지에도 꾸역꾸역 내 허리를 끌어안은 마거리트는 평소 때의 두 세배는 더 재잘거리며 떠들어 댔다. 저보다 훨씬 어린 민들레 아이들보다도 더 어리광을 피우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가 그만큼 불안했음을 표출하는 방식이므로 딱히 뭐라고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많이 걱정했지….”

그 말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던 민들레 아이들에게 신호탄이 될 줄은 몰랐다. 동시에 와락 뛰어드는 아이들의 행동은 메스키트마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라 난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아이들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라 의젓한 모습을 흉내 내려곤 했지만 결국 아이였다. 마거리트에 더해 둘의 무게까지 짓누르니 절로 죽겠다는 곡소리가 속에서 울려 퍼졌다.

엉엉 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데이지2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찍어 훔쳤다.

“아이고 내가 다 잘못했다. 빨리 일어났어야 했는데. 내가 워낙 잠탱이라 회복하고 나서도 더 잔 것 같네.”

“엉엉…. 작은 세계수님은 잠꾸러기.”

“으엉…. 계속 잠만 자고.”

“맞아맞아, 내 진리는 잠꾸러기.”

아이들이 그러니 마거리트까지 더욱 우는 소리를 냈다.

애들을 다 달래고 나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달래느라 진을 뺀 나머지 아주 몸이 잘 풀렸다.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뭔가 묵직한 것이 어깨에 턱 올라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실새삼이 자연스럽게 백팩처럼 어깨에 업혀 있었다.

“뭐지, 이 자식은….”

“나를 혼자 두고 갔다간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데저트 필드 놈도 그렇지만 꽃이 빨간 녀석도 여간내기가 아니란 말이지. 날이 아주 시퍼렇게 갈려 있어. 단숨에 내 목을 따 버릴 꽃이로다.”

빨간 꽃은 데이지를 말하는 건가? 무려 필드의 가디언에게 이런 평가를 받다니. 우리 데이지도 정말 많이 대단해졌구나.

“내려와, 무거워.”

“다리가 아직 짧아서 못 따라간다.”

“안 따라오면 되잖아.”

“혼자 두면 죽는다니까?”

섬을 전멸시킬 뻔한 놈이 제 과거도 생각 못 하고…. 아기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세상을 멸망시킨 드라이어드 중 한 놈이란 말이지. 그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면 절대 속내를 모를 거다.

어깨에 있던 놈을 끌어다 앞으로 안으니 세상 무해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와… 이 안정감.”

마치 꽤 큰 곰 인형을 안고 있는 것처럼 안정된 크기다. 이만한 애를 안아 보는 것이 얼마 만이지? 사촌 동생들도 여럿 안아 보긴 했지만 다들 훌쩍 커 버린 지 오래라 정말로 몇 년 만이다. 따뜻한 온기가 그를 안은 품에서 퍼져 나온다.

어쩐지 제대로 안으니 예상했던 것보다 무게도 견딜 만해서 신기했다. 드라이어드라 인간이랑 무게가 좀 다른가?

“말랑말랑하다.”

더구나 옷감 너머로 닿는 몸도 아기처럼 포동포동하고 말랑거렸다. 한없이 마음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이놈이 애가 된 건 본능적 자기방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모든 동물의 새끼들이 귀여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게 생존을 위한 본능일 수도 있다는 인터넷 유머가 떠올랐다.

이렇게 귀여운 모습으로 보호 본능을 자극하니 막 대하기 어려웠다. 실새삼에게 직접 당했던 우리 드라이어드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일단 나는 이 아이를 거칠게 대할 수가 없었다.

이놈은 겉과 속이 다른 잔인한 드라이어드다…. 괴물이라고 불리던 드라이어드다….

내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안긴 자세가 좀 불편한 듯 실새삼이 몸을 꼼지락거리며 편한 자세를 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입가가 풀리기 시작했다.

“귀엽다….”

“실례다. 너도 봤겠지만 난 이미 어엿한 드라이어드다. 인간의 아기를 대하듯 나를 대하지 말아라.”

“역시 말투는 깬다. 놓고 갈까?”

“난 사실 귀엽다. 가끔은 인간의 아기처럼 대하는 것도 괜찮지.”

실새삼이 다시 세상 무해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이 자식… 다 알고 이러는 거다, 분명.

“그나저나 엘더는 어디로 갔으려나?”

“저쪽이다.”

실새삼이 코를 킁킁거리며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이라고?”

“술처럼 날 매혹시키는 달콤한 향기가 저쪽으로 여운이 남아 있다.”

냄새로 드라이어드를 찾는 건 처음 봐서 어이가 없었다.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좀 큰 중형견을 안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이 실새삼은 함께 살았던 짭신 엘더를 기억할까? 은둔자의 정원을 기억 못 하니 짭신 엘더도 기억 못 하겠지? 함께 있던 모두가 실새삼에게 피해를 받고 그를 괴물로 기억할 텐데, 저 혼자 홀랑 기억을 잊어버리는 건 좀 불공평한 것 같기도 하다.

“와…. 건물이 생겼네. 헐, 식당을 연 거야? 이야, 이제 좀 사람 사는 마을다워졌네.”

엘더를 찾아 걷는데 주위의 풍경이 아주 많이 바뀌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묵고 있던 곳이 꽤 주택다운 곳이었다. 좋은 욕실도 갖추고 있었고. 반파되어 임시 주거지만 겨우 갖춘 과거의 28번째 테라리움을 생각하면 많이 이상하긴 했지.

광장을 중심으로 아직 높다 해도 2층이 다지만 꽤 많은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행인이 쉴 수 있도록 벤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인부들이 일하다 쉴 때면 높다란 잔해에 걸터앉는 것이 전부였던 과거를 생각하면 아주 많이 발전한 거다. 이젠 이런 편의성을 신경 쓸 만큼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건물 중 지붕이 유리인 데다 옆으로 아주 넓어서 일반 거주지라기엔 용도를 알기 힘든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드라이어드들이 한데 모여 우르르 나올 땐 심장이 울리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설마 드라이어드 교습소…?”

미리 28번째 테라리움에서 터를 잡고 있던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과 은둔자의 정원에서 봤던 드라이어드들이 짝을 이뤄 다니고 있었다.

우리 테라리움엔 NPC처럼 묶인 드라이어드들이 많다 보니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하나 만들어도 괜찮겠다 싶었던 시설이 눈앞에 있었다.

“와… 그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제 종과 유사한 드라이어드들을 하나 이상씩 꿰찬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에게 박수라도 보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민들레 묘목들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드라이어드들을 부러워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 본격적으로 그런 상황을 노리고 있었구나 싶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실새삼을 바라보았다.

은둔자의 정원의 드라이어드들은 왕을 중심으로 제대로 자랄 환경이 되지 못했다. 햇빛이 부족해 웃자란 식물들처럼 성장이 기묘했고 성목이 되기 전에 일찍 죽거나… 그나마 잘 자랄 싹이 보였던 드라이어드들은 이 실새삼이 잡아다 죄다 힐링 팩처럼 사용했다.

참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일을 벌였던 괴물 같은 놈이 귀여운 아이의 모습으로 제 전 과거를 죄다 잊어버린 채 내게 안겨 있다니.

육지는 은둔자의 정원과 달리 불이 활개 치고 다니는 곳이었다. 저 아이들이 부디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에게 잘 배우고 잘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은둔자의 정원의 드라이어드들이 여기 있다는 건, 그곳 사람들도 무사히 이곳으로 이주해 왔구나.

테라리움이 겨우 한 달 사이에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겠지?

“불만 있나?”

“아닙니다! 제 표정이 원래 이렇습니다!”

“불만 있으면 언제든지 덤벼도 돼… 말했잖아. 날 이기면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니까.”

“아닙니다! 저는 대단한 나무를 버팀목으로 삼은 영광을 누리고 있는 미천한 드라이어드일 뿐입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찾으니 그곳에 모감주나무를 비롯한 드라이어드 몇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도망간 줄 알았던 모감주나무를 비롯한 패거리 역시 28번째 테라리움으로 함께 이주한 것이다.

성격이 꽤 사납고 호전적이었던 그녀는 놀랍게도 커다란 잔해를 두 손으로 번쩍 든 채 쭈그려 앉아 있었다.

“속이 덜 차서 영 단단해지지 않는단 말이야. 역시 이런 훈련으론 부족한 걸까? 불에 좀 타고 번개도 맞으면 더 단단해질 텐데. 비 오는 날 뛰어다니게 할까?”

“그럼 죽지 않을까? 버텨서 살아남았기에 우리가 된 거잖아.”

“하지만 너무 약한걸.”

모감주나무와 닮은 드라이어드들이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야기들이 꽤나 섬뜩한 내용이라 침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태생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저 녀석도 참 대단해. 저렇게 말도 안 듣는 묘목들보단 말 잘 듣는 묘목들이 널려 있잖아. 저걸 갱생시켜서 데리고 다니다니.”

“고분고분한 묘목들보다 저런 애들이 길들이는 맛이 있대. 친하게 지내지 말자.”

나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감주나무가 적수를 만난 것이다.

저렇게 훈련 받다 보면…. 저들 중 언젠간 왕의 그릇이 될 드라이어드가 나타나겠지?

어엿하게 모험을 떠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되면 테라리움을 방문한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을 생각해서 테라리움에 설익은 열매를 좀 구비해 둬야 할까?

“기묘한 드라이어드들이 상당히 많군. 내가 모르는 사이 교잡종들이 유행이라도 탄 것인가?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나?”

마치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의 정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실새삼의 말에 뜨끔했다. 눈치 빠른 자식….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그래 봤자 가는 곳마다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있으니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러나 다행히 실새삼은 그 이후로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에 없던 보석 공방이 생긴 것도 발견했다. 주얼리콘에서 온 장인들과 세공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난 그곳에서 루프의 가족들도 만났다.

그들이 날 알아본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을 기웃거리며 공방에 대해 묻다가 59번째 테라리움에서 대대로 보석을 세공해 오던 장인들도 있다는 이야기에 알아차린 것이다.

루프는 아직 18번째 테라리움에 있으려나?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할 생각에 공방을 지나쳤다.

루프의 가족들이 이주해 왔다면 필라의 가족들도 여기 어딘가에서 식당을 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이주 임무를 끝낸 이리스 파티도 혹시 테라리움에 있으려나?

시들링과 로웰라는 어디에 있을까?

엘더를 찾아 그를 달래 주고 나면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살펴야 될 일이 꽤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