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5/604)

어떻게 사람이 한 달간 잠만 잤는데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지?

“제이, 아직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요!”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내려가려다 대차게 굴러떨어질 뻔했다. 멀쩡한 게 아니구나.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건전지 떨어진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다. 메스키트는 날 번쩍 들어다가 다시 침대에 앉혀 주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체력은 쓰레기라도 살면서 크게 앓은 적이 없어 병실 침대에도 누워 본 적 없는 애매하게 건강하고 튼튼한 몸인데.

내 드라이어드들이 말하길, 엘더와의 그래프트를 끊자 그대로 쓰러졌다고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던 것이 그 순간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한 채 쭉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실새삼이 내 영혼이 손상됐다고 했었다. 그리고 영혼을 회복하려면 시간을 약 삼아 치유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 치유가 한 달 동안 잠만 자는 것일 줄은 전혀 예상도 못 했지만.

그나마 있던 근육이 전부 사라지기라도 한 것인지 손을 들어 올리는 것도 꽤 힘이 든다.

말끔한 손톱이 보였다. 누가 다듬었다기보단 잠들기 전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꽤 길게 흐른 것치고 뭔가 이상했다. 손톱도 그대로고 머리 길이도 그대로다. 육체의 시간은 그대로 정지된 것처럼….

병원에서처럼 링거를 꼽거나 무슨 장치를 한 것도 아닌데 뭘 먹지도 않고 잘 살아 있네. 약한 허기는 좀 있고. 몸에 욕창도 없네….

이건 마치… 내가 이 세계에 넘어올 때의 상태 그대로의 육체에… 오래 잔 페널티로 내가 가진 스탯만 잔뜩 깎인 기분이었다. 체력이라든가 민첩 같은, 캐릭터에 적용되는 게임 수치 같은 것 말이다.

아직까지 멍한 정신을 좀 깨우고 싶었다. 차분히 생각도 정리하고. 모두가 한결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 조금 부담되기도 했다.

“이후의 일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나 좀 씻고 와도 될까?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조금 필요해….”

“못 움직이실 텐데요.”

데이지2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아냐, 막 일어났을 땐 힘들었는데 천천히 힘이 돌아오는 느낌이야.”

씻는 것도 도와준다고 할까 봐 최선을 다해 몸을 풀었다. 상체는 어느 정도 마음껏 움직일 수 있고 문제는 하체라, 메스키트가 번쩍 들어 욕조에 앉혀 주는 걸로 타협을 봤다.

한여름에도 따뜻한 물을 고수하는 편이지만 일부러 차가운 물을 잔뜩 뒤집어썼다.

아직도 얼떨떨했다. 배 위에서 까무룩 기절한 때와 지금 이 순간의 시간 간격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이상하지 않았다면 그저 하루 정도 푹 자고 일어난 거라고 착각했을 것 같았다.

내가 착용하고 있던 장비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입혀져 있는 편안한 긴 셔츠와 바지를 물속에서 비적비적 벗었다.

그리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게… 다 뭐야?”

내 온몸을 기괴한 나무줄기 문양이 칭칭 감싸고 있었다. 왼팔에 문신처럼 자리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그 와중에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니, 좀 다른 의미지만 자체 발광 인간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나 같은 사람 몇 명만 더 있었어도 밤에 불 안 켜도 되겠어. 자원도 절약되고 얼마나 대단해?”

어이가 없으니 절로 농담이 나온다.

“이거 세계수, 네 짓이겠지? 사람 죽일 뻔해 놓고 이게 무슨 짓이야.”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금빛이 천천히 일렁거렸다. 마치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닦으며 천천히 살피자 상대적으로 움직이기 편해진 상체의 줄기 문양은 형태가 옅었다.

반면 힘이 돌아오는 속도가 더딘 다리 쪽은 형태도 짙고 빛도 강했다. 줄기가 얼기설기 얽힌 모양새가 꼭 무너지기 직전의 담벼락을 나무 덩굴이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발로 욕실을 걸어 나가기 위해 몸을 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드라이어드들은 섣불리 욕실로 들어오지 않고 차분히 날 기다려 주었다.

난 나가자마자 이상한 줄기 문양이 칭칭 감긴 내 상태에 대해 숨김없이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이르는 행세가 됐지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제이를 옮기기 위해 28번째 테라리움을 선택했다고 했죠. 본래 제이는 31번째 테라리움의 병원으로 바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 이상하게 상태가 계속 나빠졌어요. 코와 입에서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고 숨도 미약했어요. 마치 천천히 육체가 망가지는 것처럼 보였어요.”

메스키트가 그때를 회상하니 무척이나 끔찍하다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고 이를 악물었다.

“실력 좋다는 의사는 모두 제이 님께 붙었다고 들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연금탑에서 고위 연금술사들이 죄다 뛰어나와 연금술을 이용해서라도 제이 님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하지만 차도가 보이지 않아 절망적일 때, 저 드라이어드가 이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어요.”

“저 드라이어드?”

메스키트 대신 설명을 이어가던 데이지2가 내가 누워 있던 침대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 함께 있었는지 모를 조막만 한 아이 하나가 태평하게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뭘 봐?”

“미친,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니 왜 벌써 나왔어?”

열매가 썩기 직전에나 겨우 꾸역꾸역 모습을 드러낼 줄 알았던 실새삼이 거만한 얼굴을 하곤 그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내 숙주가… 야, 그렇게 보지 마. 결국 저 드루이드는 내가 강제로 열매를 깨고 나오지 않았으면 아직까지 못 일어났을 거 아냐? 지금 내 상태는 네가 주먹으로 살짝 치기만 해도 죽는다고.”

실새삼은 메스키트가 매섭게 노려보자 황급히 말을 늘였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해서 육체가 깨진 거니 더 큰 힘이 수습해 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이 님의 영혼에 연결된 세계수 가지를 이용하는 것을 제안한 것이고요.”

데이지2가 차분히 끼어들어 설명을 마저 끝냈다.

요컨대 내 몸에 둘러진 금빛 줄기 문양이 세계수 가지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이걸 생명 유지 장치처럼 쓰며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이고. 힘을 되찾은 상체부터 줄기 문양이 옅어진 것은 할 일을 끝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세계수 이 자식… 사람한테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실새삼이 여기 있다는 건… 혹시 세계수가 내 영혼을 손상시킨 것에 대해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는 걸까?

아니, 그랬다면 메스키트가 28번째 테라리움을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깨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근본적인 원인은 세계수 가지가 다이아가 없어지자마자 반사 작용으로 내 생명력과 영혼을 빨아들인 것에 있었다. 현재 세계수는 내게 양날의 검 같은 존재였다. 죽을 뻔하게 만들고 죽지 않게 힘을 써 막다니. 죄책감이라도 든 거야, 뭐야?

실새삼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말했다.

“말 안 했구나.”

“그런 말을 해 봤자 저들이 너를 쉽사리 이곳에 데려왔겠느냐. 오히려 멀리 떨어지려고 했겠지. 그건 네가 판단하거라. 귀찮은 설명 따위 나에게 맡기지 말고.”

그는 아이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근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얘 좀 말투가 오락가락하는데?

내가 판단해야 된다라…. 드라이어드들에게 세계수가 날 죽일 뻔한 사실을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말하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수의 대리자가 되는 걸 막으려고 할까? 세계수가 하는 모든 행동을 의심하고 반목하겠지? 세계수는 이 세계의 절대신 같은 존재니까.

“…시기상조라고 생각해. 다들 그렇지 않아도 막 일어난 내 상태 때문에 혼란스러울 텐데.”

“그것이 네 판단이면 그러겠지.”

꽤 오래 실새삼과 조용히 모종의 이야기를 나누니 메스키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제이, 무슨 이야길 하고 있는 건가요?”

“어른이 이야기하는데 함부로 나서지 말거라. 세계수도 많이 늙었지. 저리 새파랗게 어린 나무를 필드의 가디언이라고 앉혀 놓다니…. 야야, 힘 살살 써라. 나 죽는다니까.”

메스키트가 팔을 내려치자 침대 매트가 크게 반동했다. 실새삼은 작은 몸으로 폴짝 뛰어 잽싸게 내 뒤로 숨었다.

“바이오 필드 가디언은 새로 뽑는 것이 좋겠군요.”

“아직도 못 깨달은 것인가? 가디언은 나로 유일무이하다.”

“바이오 필드에 망조가 꼈군요.”

“나 때의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은 좀 더 과묵하고 진중한 나무였는데 말이야.”

이 애늙은이가… 메스키트를 어린 나무 취급하다니. 정말 상식 밖의 드라이어드다.

잠깐, 분명 바위손 드라이어드가 실새삼은 열매에서 깨어나면 기억이 온전치 않을 확률이 크댔는데? 아무리 봐도 이 새끼 다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 어쩌다 열매가 된 건진 기억해?”

“뭐, 새 몸으로 갈아탈 시기가 됐나 보지.”

“그럼 열매가 되기 전엔 어디에 있었는지는 기억해?”

“흠… 내 전 주인과 같이 여행을 했겠지. 마지막 여행지가 어디였더라? 바다였나? 여기 있다는 건 내 전 주인은 죽었나 보군. 아무리 내 쪽에서 먼저 강제로 네게 영혼의 연결을 했다지만 내 주인은 이제 너다. 영혼의 연결을 한 이상 전 주인에 대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별걸 다 묻는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실새삼은 은둔자의 정원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가장 최근 기억은 내 정신을 대피소처럼 보호하고 있던 것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애새끼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말에 동의하듯 메스키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엘더…. 엘더는 어디 갔어?”

눈을 떴을 때만 해도 꼭 붙어 있던 엘더가 보이지 않았다. 날 보자마자 입을 연 그가 한 말은 자신과 함께했던 그래프트에 대해 후회하는 이야기였다.

마치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자신의 탓이며, 그렇기에 다시는 그래프트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건 엘더의 잘못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연재해에 맞서 보겠다고 내 모든 것을 걸겠다는 마음이 <무한 다이아>의 소지 다이아를 전부 걸어 버려 원인을 제공했다.

내 물음에 데이지가 엘더의 마음 고생이 심했다는 말과 함께 문을 가리켰다. 엘더는 내가 일어나는 것만 보고 자리를 뜬 것이다. 그는 아주 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