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3화 (233/604)

“진짜 엄청난 녀석이네….”

칭찬 같은 말과 다르게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신경을 건든다. 누구지? 얼핏 처음 듣는 목소리인 것 같아서 주인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

그건 그렇고…. 해일은 어떻게 됐지? 설마 내가 막았나? 아니 이런 생각을 감히 할 수 있는 것도, 엘더와의 그래프트가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로 나타나서 정말로 파도를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들 괜찮을까?

“태평하네. 지금 그런 걸 걱정할 때야?”

‘넌 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앞도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래, 이제야 현실이 느껴지나?”

‘내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마치 생각만 해도 전달이 되는 사념파처럼 공간에 퍼졌다. 내가 지금 왜 이런 상태인 거야?

“어떻게 되긴. 딱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상태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더니 서너 살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아이…?’

아이는 내 말에 고개를 내려 제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 그래. 이런 모습이라 네가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아이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몸이 자라더니 내가 아는 이의 모습이 되었다. 고풍스러운 정장을 입은 실새삼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잠시, 갑자기 노이즈가 낀 영상처럼 모습이 뒤틀리더니 도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후… 결국 이런 모습이라 이거군.”

‘…….’

왜 열매 속에 있어야 할 실새삼이 여기에 있지?

아이는 아장아장 걸어와 내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내가 죽은 거야?’

“말했잖아.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고. 아니 정확히는 정신이 죽을 수도 있는 상태지.”

‘뭐?’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군. 몸뚱어리만 간신히 숨만 붙은 채로 남아 살아가는 것도 말이야. 날 이렇게 만든 드루이드의 최후로는 꽤 괜찮잖아?”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분노가 일었다. 갑자기 아이의 모습이 세차게 흔들리며 일그러졌다.

“반항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넌 지금 내 덕에 버티고 있는 중이니까. 날 밀어낸다면 정말 내가 말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완전히 흩어질 뻔한 너의 영혼의 한 가닥을 간신히 붙든 것 같거든.”

그럼 혹시 여긴 실새삼의 드라이어드 열매 안인 걸까?

“그러게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썼어야지. 무슨 짓을 했길래 순식간에 영혼이 날아가 버린 거야?”

아이는 천천히 날 살펴보았다.

“가만 보니 이상한 녀석이네. 왜 영혼이 세계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마치 내 본체들이 끈덕지게 식물에 들러붙는 것처럼 아주 지독하게 엮여 있군. 드루이드들이 세계수의 축복을 영혼에 심고 태어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보이는데?”

대체 뭐라는 거야?

“아, 그래. 그래서 이리 되어 버렸군. 세계수가 대체 왜 네게 기생하고 있는 거지?”

‘기생이라니?’

“난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이다. 기생 식물의 대표인 내가 이런 상태를 못 알아볼 것 같은가? 세계수에게 대체 뭘 제공하고 있길래 이리 강하게 네 영혼과 연결이 되어 있는 거지? 그게 끊기니 대체재로 네 생명과 영혼을 받아 가다가… 지금은 간신히 멈췄군.”

‘…….’

“평범한 인간의 육신이 세계수를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세계수가 내게서 생명과 영혼을 뽑아가려고 했다고?

<무한 다이아>에 빨대를 꽂은 두 개의 세계수 가지가 떠올랐다.

내가 엘더와 그래프트를 사용하며 <무한 다이아>의 모든 소지 다이아를 사용했으니 두 개의 가지가 일정하게 뽑아 먹던 다이아가 일순 텅텅 비었을 것이다. 설마 그렇다고 내 생명과 영혼에 손을 댄 거야? 이런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이 다 있어!

내가 듣기론 분명 다른 테라리움의 가지들은 다이아 공급이 끊기면 천천히 말라 죽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는 건 다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은 세계수 가지에게 다이아를 공급할 뿐인 아주 일방적인 관계라는 건데, 왜 난 다른 거지? 내가 주는 대로 받아 가는 게 아니라 아예 내게 붙어서 뽑아 가고 있다는 거 아냐?

‘지금은 멈췄다고…?’

“그래, 다시 대체재가 생겼나 보지.”

제로가 된 다이아 소지 수를 난쟁이들이 열일해서 다시 채우기 시작했나 보군.

“하지만 잠깐 사이에 이미 영혼은 큰 손상을 입었어.”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야?’

실새삼은 쉽사리 대답해 주지 않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몸에 숨만 붙어서 간신히 살아간다고? 그럼 나 지금 식물인간 같은 상태라는 거야?’

“식물인간이라…. 지금 네 상태에 가장 그럴싸한 단어로군.”

‘아니, 내가 지금 기로에 서 있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다시 살 기로를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거 아냐?’

“정신은 육체와 영혼을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다. 지금 네 정신은 이곳에 있지. 그래서 영혼이 네 몸에 안착하지 못한 채 붕 뜬 상태다. 영혼이 많이 망가진 상태니 빨리 육체에 안착해 시간을 약 삼아 치유해야 해.”

‘그럼 정신을 되돌려 줘.’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지. 말했잖아. 의도치 않게 흩어질 뻔한 영혼의 한 가닥을 겨우 내가 붙든 정도라고. 그 영혼을 타고 흘러온 네 정신이 내 영혼을 대피소 삼아 머물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난 그저 중간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는 정도야. 목적지를 찾아가는 건 네가 해야지.”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무한 다이아>의 다이아를 모두 소진해 버리는 것이 내게 이렇게 악영향을 끼칠 줄이야.

세계수 가지를 내 <무한 다이아>에 고이 모시는 조건으로 두 개의 테라리움을 얻은 것이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테라리움은 <무한 다이아>가 존재하는 한 다른 이들은 제공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다이아를 공급하기 때문에 다른 테라리움들보다 축복의 힘이 강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만큼 엄청난 다이아가 실시간으로 소비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내가 가지게 될 테라리움의 수가 늘어날 수도 있었다. 세계수의 가지들은 수를 늘려 더욱 내 다이아를 축내겠지.

단 두 개의 가지만으로 내가 이렇게 큰 타격을 받는다면… 가지가 더 많을 땐, 이렇게 정신이 간신히 머물 틈도 없이 죽어 버리는 거 아닐까?

물론 그 전에 다이아를 모두 소비해 버리는 행동을 절대 해선 안 되겠지만….

문득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 영혼에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수…. 그리고 테라리움을 얻게 됨으로써 행정 관리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희귀한 가드닝 스킬들. 그건 마치…. 드라이어드와의 교감을 한껏 높여 내 영혼에 드라이어드의 영혼의 가지를 접목해서 사용하는 그래프트 스킬과 어쩐지 비슷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래프트는 드라이어드의 영혼의 가지가 접목되는 영혼의 주체인 드루이드가 직접 드라이어드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전자의 생명력을 담보로 했다.

스케어크로우나 시들링 등, 다른 드루이드들이 그래프트를 사용할 땐 생명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난 다른 드루이드들과 다르게 엘더와의 그래프트를 사용할 때 생명력이 아닌 다이아를 대체재로 소모할 수 있었다.

가드닝 스킬도 세계수 가지와의 연계로 시전자의 생명력을 사용했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이전 행정 관리원인 파필리온이 내게 가드닝 스킬을 전승하기 위해 설명할 때 분명 생명력을 써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 스킬을 전승받은 내가 가상 아티팩트 공간을 만들어 낼 땐 생명력 대신 다이아를 사용할 수 있었다.

어쩌면 가드닝 스킬은 세계수와 사용할 수 있는 그래프트 스킬인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하나의 기묘한 느낌이 가지를 뻗는다.

그땐 단순히 내가 다이아가 아주 많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생명력 대신 다이아를 사용할 수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이아가 아주 많은 드루이드가 존재할 것이다.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역시 다이아가 많아야 유지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들 역시 나처럼 생명력 대신 다이아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래프트나 가드닝 스킬을 사용할 때 반드시 생명력이 소모된다는 절대 공식이 없지 않았을까? 왜 나만 특별한 걸까?

혹시 내 생명력과 다이아가 동일 선상에 놓여 있어서 생명력 대신 다이아를 사용할 수 있는 거라면…?

이 세계로 넘어오며 유일하게 함께 넘어온 게임, <무한 다이아>의 존재도 정말 이상했지.

이 세계에서 다이아는 세계수의 수액이 증발해 드루이드의 영혼에 맺혀서 생기는 것인데, <무한 다이아>에서 생성된 다이아는 그런 공식을 깨고 난쟁이들의 광산에서 끝없이 파낼 수 있는 거였다. 이 세계의 다이아와 성능이나 기능도 전혀 다르지 않으면서.

그렇다면 내 생명력과 <무한 다이아>의 연계성은 대체 뭘까?

그걸 알게 되면… 난 그래프트나 가드닝 스킬을 사용할 때 외에도 다른 상황에서 내 생명력을 다이아로 대체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되면 내 생명력이 무한이 되는 걸까? 생명력이 무한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타격을 받은 것치고 정신은 꽤나 말짱해 보이는데 말이야.”

실새삼이 입을 열어 내 상념을 깼다.

“왜 안 돌아가는 걸까? 못 돌아가는 걸까? 여기서 내가 손만 놓아 버리면 갈 데가 없어지는 아주 위험한 상태인데 말이야.”

아이는 다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돌아갔다.

‘손 놓기만 해 봐.’

아이는 작은 얼굴로 퍽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내 열매가 네 손에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정말 못마땅하지만 결국 먼 미래엔 널 주인 삼아 살아가게 되겠지.”

아이는 마치 그날이 절대 오지 않았으면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영혼의 한 가닥을 붙든 것이, 온전히 어디에나 들러붙을 수 있는 내 능력 때문이라기보단 그 예정된 운명의 이끌림 때문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하, 이젠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내 진정한 주인을 잊고 널 주인으로 삼아야 한단 말이지…. 그래, 차라리…. 차라리 네가 낫겠군.”

아이는 작은 입으로 폭 한숨을 쉬었다.

“세계수가 기생하는 대단한 드루이드 아닌가? 그 정도 배짱과 스케일은 되어야 날 위해 특별히 마련된 드루이드라고 볼 수 있지.”

‘웃긴 녀석이네. 내가 널 위해 마련되었다니?’

저 녀석이 내 드라이어드가 되어도 나를 주인이 아닌 제 숙주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다른 별 볼 일 없는 인간을 드루이드랍시고 주인으로 삼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낫겠어. 그러니 안심해라. 내가 복수한다고 손을 놓진 않을 테니, 어서 네 육체를 찾아가기나 해.”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찾아가고 싶거든.’

“그래서 말인데, 손을 놓아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네가 아닌가?”

‘뭐?’

실새삼이 내 앞에서 앙증맞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보여 주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네 정신은 말했듯이 타격을 받은 것치고 너무 멀쩡하다. 망가져서 육체로 돌아가지 못한다기보단… 이 경우는 네 육체가 문제군. 계속 분에 넘치는 힘을 사용하고 있으니 육체가 정상일 리가 있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손을 놓아라. 그래프트를 멈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번쩍 뜨였다.

***

“헉….”

짠 바다 내음이 깊숙하게 폐를 파고들었다.

“제이 님, 제발 멈춰요. 다 끝났어요. 제발… 제발 그만해요….”

“제이, 제발!”

손이 얼얼했다. 무언가 내 손을 강하게 쥐어뜯고 있었다.

난 여전히 엘더의 스태프를 두 손으로 굳건히 쥐고 있었다. 그 손 위로 상처가 가득한 손이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억지로 내 손을 떼며 내게 상처를 입히는 대신 자신의 손을 희생한 모양새였다. 아주 오랫동안 내 손을 스태프에서 떼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드니 눈물로 범벅이 된 데이지의 얼굴이 들어왔다.

“제이 님!”

데이지 뒤로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마어마한 비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파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손을 떼자 날 지배하던 강한 압박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비의 장막도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까지 그래프트를 사용 중이었다니….

코와 입에 불쾌한 비린내와 쇠 맛이 가득했다. 무거워진 고개가 저절로 땅을 향해 숙여졌다.

바닥에 붉은 피가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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