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막는 방패. 무의식적으로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유리한 필드를 불러오는 것만으로도 16번째 테라리움에서 거대한 불길을 막아 낸 그녀의 거대한 모래 언덕이 떠올랐다. 지상에 떠오른 듯한 태양과 같은 열기를 단신으로 막아 냈던 메스키트.
어쩌면 메스키트와 그래프트를 펼칠 수만 있다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비록 바다 위라 할지라도….
하지만 메스키트를 바라보는 내내 그 어떤 느낌도 받지 못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결국 난 메스키트와 그래프트를 펼칠 수 없는 것이다. 어째서….
“손 놓고 있을 거야? 이러다 모두 다 죽어.”
엘더가 투정 부리듯 메스키트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건 메스키트를 책망하기보단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향해 말한다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자신들의 드루이드들이 죽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메스키트는 이를 악물고 하늘 높이 치솟는 파도의 장벽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녀라도 필드의 페널티까지 안고 있는 상태에서 별수가 없나 보다.
선원들은 참담한 표정으로 선장실 안의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드루이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반인들과 다르니 어떠한 기적이라도 보여 달라는 것처럼. 그들의 두 손이 기도하듯 모였다. 우리가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고 말았다.
돛대가 부러지고 바닷물이 선장실 안을 휩쓸며 조타기도 망가졌다.
아가리를 쩍 벌리고 쫓아오는 파도를 피해 빠르게 도망치려는 발버둥도 못 치게 되었다.
“가자, 엘더.”
“뭐?”
“뭐라도… 뭐라도 해야지.”
아무 능력도 쓸 수 없는 사람들에 비해 우린 뭐라도 할 수 있잖아. 저들은 갑판을 뛰어다니는데 우리도 뭔가 최선을 다하는 건 보여 줘야지.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필살기인 그래프트를 쓸 수 있는 건 너뿐이니 가서 발악이라도 해 봐야지.”
배가 침몰되면 어떻게 죽는 걸까? 바다 밑으로 하염없이 가라앉을까? 운 좋게 바다에 떠도 해일을 뚫고 구하러 올 수 있는 구조선이 있을까?
불안한 마음에 연신 테라리움 아티팩트의 유리구를 매만졌다. 필드를 불러와 영역 선포를 할 수 없는 바다 위. 16번째 테라리움에서의 일전처럼 테라리움 자체를 필드로 불러온다면 세계수 가지의 힘이라도 빌릴 수 있었을 텐데.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엘더와의 그래프트뿐이었다.
“네가 내리는 비는 생명의 비잖아. 죽음밖에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 단 하나의 기적을 바란다면 역시 생명을 살리는 비뿐이지.”
드라이어드의 바크를 회복시키고 피로도를 되돌리는 엘더의 그래프트가 해일에 무슨 힘을 쓸 수 있을까.
“제이….”
“메스키트가 이렇게 어쩔 줄도 몰라 하며 당황하는 건 처음 봐. 역시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아무리 메스키트라도 어쩔 수 없나 봐.”
“위험하니 안에….”
“안도 위험해. 배 위에서 내가 안전한 곳은 없어.”
눈꺼풀을 떨며 불안함을 표하던 엘더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역시 믿을 건 나밖에 없지?”
그러곤 천연덕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언제 불안함을 표했냐는 듯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그래, 가자. 가서 생명의 비를 뿌리자.”
엘더가 앞장서며 선장실의 문을 열었다. 문은 파도의 피해로 위쪽 경첩이 떨어져 삐걱거리며 기이하게 울었다.
엘더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상했다.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난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몇 번도 더 했다.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파도의 장벽이 내가 겪은 위험 중 가장 절망적인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엘더의 손을 잡으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일상생활 속인 듯한 저 천연덕스러운 태도 때문일까? 바닷물을 맞아 차갑게 식은 손을 데우는 따뜻한 온기 때문일까?
어쩐지 여기서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다.
“미쳤어?”
엎어져 있던 짭신 엘더가 분위기를 깨며 소리쳤다.
“이런 상황에서 네가 기적을 보이겠다고? 네 한계는 같은 종인 내가 잘 알아! 저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네가 아직 제대로 된 한계를 못 봐서 그런 소리나 하는 거야. 야생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네가 엘더 플라워에 대해 전부 안다고 할 순 없지. 뭐, 이 기회에 진정한 엘더 플라워가 어떤 힘을 쓰는지 잘 봐 두기나 해라.”
똑같이 생겼으나 머리 길이만 다른 하얀 꽃 둘이 서로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기적을 보일 거라 생각은 안 해.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한 채 죽기 싫을 뿐이야.”
우리가 갑판으로 나오자 선원들의 얼굴에 미약한 희망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짭신 엘더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섬에서 수없이 봐 왔을 그 얼굴들.
섬의 신으로 군림하며 많은 생물들의 구원자가 되었을 그녀였으나, 그건 결국 만들어진 신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봤을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를 거짓된 희망이나 쥐여 주려는 사이비 교주 같은 모습으로 봤을 수도 있었다.
“교감은 충분하지?”
“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다이아 엄청 당겨 쓸 거야.”
엘더가 비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다이아를 정말 세계수 가지가 빨대 꽂듯 쪽쪽 빨아 쓸 생각이구나. 다이아 한 알이 아까워 전전긍긍하는 엘더가 그러니 입맛이 썼다.
“에이, 여기서 마지막은 좀 아니지 않니? 내가 두고 온 테라리움만 두 갠데.”
“그렇지? 마지막은 아니겠지? 난 아직 네가 얼마나 많은 다이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음, 그건 진짜 마지막이 와도 안 알려 줄 거야.”
엘더가 파도의 장벽을 바라보며 내게 스태프를 뻗었다. 그의 몸에서 따뜻한 하얀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자… 잠깐!”
짭신 엘더가 비틀거리며 갑판 위에 선 우릴 향해 걸어왔다.
“나도… 나도 돕게 해 줘!”
“돕는다고?”
“뭘 하든 그게 모두를 구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면… 내 힘이 보탬이 될 수 있게 해 줘. 흉내 내는 것이 아닌, 나도 정말 누군가를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
그녀는 입술을 씹으며 울먹거렸다.
“내 꽃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꽃이야. 그런데 섬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괴물이 두려워서 신전에 숨어 살기만 했어. 그런데… 넌 달라. 저건 괴물보다 더한데.”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파도를 가리켰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내가 두려워하면 내 드루이드는 누가 지켜?”
엘더의 대답에 그녀가 날 잔잔히 바라보았다. 지친 에메랄드색 눈이 안주할 곳을 찾는 것처럼 내게 오래 머물렀다.
“넌 고작 한 명의 인간을 지키기 위해 낼 수 있는 용기를… 난 섬의 모든 생명을 저울에 올리고도 내지 못했어…. 네게 내 모든 힘을 줄게. 내 전부를 걸게.”
“얘. 이게 모두를 구할 수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안 하겠다고 버티더니 정말 포레스트에 들어가려고?”
섬에 남아 차라리 죽겠다더니.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이 상황에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건 당신들뿐이니까. 그리고 난 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여기서 더 발버둥 쳐도 결국 저 녀석보단 못할 테니…. 차라리 내 영혼을 더해 강해진 왕이, 내가 섬기는 왕이 무언가를 하게 된다면… 그땐 내가 힘을 보탰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왕으로 섬기겠다면 앞으로 ‘저 녀석’이 아니라 예의를 갖춰 대하도록.”
엘더가 턱 끝을 들고 거만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짭신 엘더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정말 마음을 먹은 건지 언쟁을 멈추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신께 제 영혼을 바칩니다.”
그 순간 내 곁에 선 엘더의 존재감이 훅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데이지2를 포레스트에 영입했을 때처럼, 엘더가 가진 힘이 두 배로 커진 느낌이었다.
하얀 꽃잎의 비가 주위에 흩날리며 동시에 엘더의 스태프가 하얗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스태프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수많은 금색 줄기가 어지러이 스태프 전체를 감으며 올라와 파릇파릇한 녹색 잎을 피워 냈다. 눈덩이처럼 소복하게 모여 있던 작고 예쁜 꽃들 위로 녹색 잎이 연꽃처럼 모여 피어났다.
그 가운데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보주가 주먹만 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보주 안은 영롱한 빛이 은하수처럼 담겨 회오리치고 있었다.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워진 스태프는 마치 고대의 보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엘더는 스태프를 왕의 홀처럼 쥐고 이곳이 성의 알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엄 있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켰다.
“똑똑히 지켜봐. 엘더 플라워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엘더는 등을 돌려 배를 삼키기 직전인 파도를 바라보았다.
“해 보자.”
그는 한껏 진화한 스태프를 내게 건넸다. 마지막으로 그래프트를 했을 때보다 훨씬 거대해진 나무가 곁에 서 있었다. 두 그루를 합친 것처럼 기둥이 굵고 가지는 더 넓게,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달콤한 꽃내음이 소금기가 가득한 바다 내음을 완전히 묻어 버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온몸을 들뜨게 했다. 엘더의 스태프를 쥐었을 때, 거대한 나무가 내게로 감겨 들어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엘더의 스태프는 내 손 안에서 배 전체를 비출 만큼 환하게 빛을 냈다.
내 모든 것을 건다. 내 모든 것을 걸어 저 파도에 맞설 테다.
그 순간 쿵, 하고 온몸에 주체할 수 없는 기운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숨도 쉬기 힘들 만큼 벅찬 기운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르릉
하늘이… 진동하고 있었다.
차르르.
작은 구슬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금빛의 무언가가 일렬로 정렬했다. 그것들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숫자였다. 999,999,999…. 내가 가진 <무한 다이아>의 소지 다이아.
모든 자릿수가 슬롯머신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제히 하나의 숫자를 향해 멈춰 섰다.
0. 제로.
하늘에서 도저히 비라고 부를 수 없는, 빗방울이 한데 뭉친 물의 장벽이 바다를 향해 내려쳤다.
바다에 닿는 모든 하늘에서 일제히 물의 장벽이 내리꽂혔다.
비의 장벽에 파도의 장벽이 부딪히기 직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암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