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참 상도덕이 없네. 어떻게 얻은 하나밖에 없는 나비를 낭비한 데다 죽을 위기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연금탑의 큰 바곳도 그렇고, 왜들 그리 자존심만 높은지! 다들 데이지2를 보고 좀 배우란 말이야. 죄다 왕으로 섬기기 싫다 그러면 난 어느 세월에 남들처럼 날개 단 드라이어드도 보고 그러니?
미러전으로 누구 하나 개입 없이 깔끔하게 이겼잖아, 우리 엘더가! 얘가 너랑 인성이 예쁜 꽃들 사이 양대 산맥이긴 해도 정정당당하게 이겼는데 그걸 무르자 하면 어떡하니?
드디어 우리 엘더가 포레스트에 꽃 하나 영입할 수 있는 기횐데 내가 바곳 때처럼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줄 알아?
“메스키트.”
아티팩트 안에서 실새삼에게 입은 피해를 충분히 회복한 메스키트가 나타났다.
“업자. 말 안 듣는 애들은 전용 보모가 나서 줘야지.”
이미 하나의 엘더 플라워를 어엿하게 업어 키웠는데 말 안 듣는 한 그루 더 교육을 시키자.
메스키트는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짭신 엘더를 번쩍 둘러멨다. 그 모습이 다른 때보다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엘더는 순간 메스키트의 어깨에 들려진 것이 자신이라도 된 것처럼 흠칫 몸을 떨었다.
“이거 내려놔!”
“몸부림치지 마라. 상처 벌어진다.”
이곳에서 죽는다고 누가 알아주니? 내 속만 쓰리지.
공중 정원 꼭대기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물결이 괴물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재앙의 전설이 사실이라는 듯 낯설고 불안한 기류가 섬을 감싸기 시작했다. 일식이 도화선이라도 된 것처럼 분위기가 아주 갑작스럽게 변했다.
“뛰자!”
하지만 공중 정원에서 내려가기 위해선 위태로운 줄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야만 했다. 다들 마음은 급한데 시간이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실새삼이 죽기 전 발악해 군데군데 식물들이 말라 죽은 정원을 지나고 사람이 모두 떠나 버린 황량한 마을을 지났다.
무너진 공중 정원, 화려함을 잃은 벽화 등, 음산한 광경이 꼭 폐장 직전의 테마파크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처럼 활기를 잃었다.
“모두 여기로!”
멀리 애드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배에서 내렸던 곳까지 도달하자 다행히 배 한 척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해일을 예고하듯 파도가 격노했다. 배가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섬에 겨우 댄 발판이 휘청이다 못해 바위에 여러 번 부딪혀 중간이 뚝 부러졌다. 남은 지점까지는 뛰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데이지가 줄기에 날 묶어 투포환처럼 배 위로 던졌다. 대기 중이던 선원들이 골키퍼처럼 날 받아 냈다. 그 후로 남은 이들도 속속들이 배를 향해 뛰어 올라왔다.
더 늦었으면 자신들의 안전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릴 위해 끝까지 기다려 준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
“전부 도착한 것인가요?”
바위손 드라이어드들 때문에 늘어난 인원을 눈짓하며 애드너가 물었다.
“네, 섬엔 우리가 전부예요. 다 왔어요. 이제 출발하면 돼요.”
“출항한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선원들이 넘어져 무릎이 깨져 가며 출항 준비를 서둘렀다. 난 꼴사납게 배 위를 구르지 않게 기둥을 붙잡았다.
“내릴 거야!”
“정말이지, 누가 같은 꽃 아니랄까 봐 고집이 대단하구나.”
부상을 잔뜩 입고도 지치지 않는지 메스키트의 어깨 위에서 짭신 엘더가 열심히 발버둥을 쳤다. 물기에 젖어 산발이 된 은발과 눈밭처럼 창백하게 변한 얼굴이 고상한 모습을 무척이나 핼쑥하게 변모시켰다.
“난 저 정도는 아니었어.”
왕으로 섬길 마음이 없다는 말에 빈정이 상해 버린 엘더는 짭신 엘더를 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배는 힘겹게 출항을 시작했다. 퉁퉁, 하며 배 아래에서 큰 진동이 일어났는데 파도 때문에 배가 심하게 흔들린 나머지 섬의 바위에 연신 부딪히는 것처럼 보였다. 애드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배가 자칫 잘못하다간 섬을 떠나기도 전에 침몰할 수도 있었다.
구경거리에 동한 아이들처럼 갑판 외곽에 붙어 옹기종기 배 아래를 바라보던 바위손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손을 뻗었다. 뭘 하나 슬쩍 바라봤는데 그들은 바위가 부딪히는 곳에 식물을 피워 완충제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식물이 살기 힘든 바위섬에서도 자생하는 이들이라더니 배에도 뿌리를 내릴 줄은 몰랐다.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배가 드디어 파도를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은둔자의 정원이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전달한 편지는 받았습니다. 섬의 사람들과 드라이어드들은 안전히 육지로 옮겼어요. 테라리움까지 되돌아가 배를 움직이긴 시간이 부족해서 인근 어선들을 모아 움직였습니다.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직책을 빌리니 흔쾌히 움직이더군요. 권력은 참 대단한 것이에요.”
애드너는 선원을 시켜 내게 담요를 갖다 주며 선장실로 날 안내하며 말을 꺼냈다.
“다행이네요.”
“사람 구하는 일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개인 어선들이라 결정을 내리기 쉽진 않죠. 그들은 정의보단 후에 떨어질 보상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요컨대 그들에게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입장으로 보상을 다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해일에 대해선 알고 있죠?”
“네, 31번째 테라리움엔 긴급 연락선을 이용해 전달했습니다. 일반인의 제보였다면 사실 확인에 시간이 걸렸을 테지만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란 직책이 신뢰성을 확보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외곽 쪽 사람들을 안으로 대피시키고, 해안에 인접한 다른 테라리움들에도 벌을 이용해 연락을 돌렸을 겁니다. 구급선이 돌며 섬에 갇힌 어부들을 대피시키고 있을 테고요. 갑작스러운 재난에 대비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지만 큰 피해를 어느 정도 방비할 순 있을 겁니다.”
얼마나 큰 해일이 올까? 격하게 물결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에 덩달아 긴장이 파도쳤다.
“해일이 덮치기 전에 육지에 도착하면 좋을 텐데….”
애드너는 걱정하지 말라며 날 선장실에 내버려 두고 갑판으로 나갔다. 그 순간 배가 지금까지와 다르게 아주 크게 흔들렸다.
난 의자에 앉은 채로 자빠져 바닥에 어깨를 부딪혔다. 말 못 할 고통이 올라왔지만 갑자기 심각해진 사태에 바닥에 널브러져만 있을 순 없었다. 메스키트는 짭신 엘더를 소파에 내팽개치고 일어나려는 날 부축했다.
유리창에 우박처럼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물방울이 떨어졌다. 수백 개의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물소리가 사방에 깔렸다.
갑판을 뛰어다니던 선원들이 배를 잡아먹을 듯 혀를 남실대는 파도를 피해 안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갑판 위에 순식간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해일이 갑자기 바다 위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크기를 키워 가던 파도가 순식간에 몸집을 불린 것도 아니었다.
다들 재앙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은둔자의 정원이 가라앉고 있었다. 거대한 섬이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정도로 점차 아래로 내려앉고 있었다.
섬을 감싸던 투명한 돔이 돌 맞은 계란처럼 빠르게 금이 가고 위에서부터 차곡차곡 박살 나기 시작했다. 바다에 떨어진 잔해들이 물결에 파괴력을 가했다.
“섬이 가라앉고 있어….”
해일을 예고했던 벽화의 그림이 떠올랐다. 일식을 기점으로 섬을 삼키기 시작하는 거대한 파도. 그건 외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파도가 아니라 섬이 가라앉으며 솟는 파도를 뜻했다.
순식간에 건물 높이만 한 파도가 생겨났다. 괴물의 아가리처럼 입을 쩍 벌리고 우릴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애드너의 배는 한 번은 파도를 견뎌 냈다. 결코 물에 맞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소리가 배를 후려쳤다. 돛대가 꺾이고 갑판의 상자들이 일제히 휩쓸려 갔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선원 몇이 난간에 매달려 구조를 기다렸다. 안으로 대피했던 선원들이 다시 빠져나와 바다에 떨어진 사람들을 향해 줄을 내리고 난간에 걸친 사람들을 끌어 올렸다. 드라이어드들이 구조에 가세해 사람들을 구하는 걸 돕기 시작했다.
해가 보이지 않는 초저녁의 어두운 광경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든 것들이 마치 재난으로 인해 종말을 맞이한 아포칼립스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있던 선장실도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지며 차가운 바닷물이 안을 휩쓸었다. 그 난리 통에 유리 조각을 맞은 것인지 볼이 따끔거렸다. 소금물을 맞아서 눈도 따갑고 온몸이 젖어 무거웠다.
탁자와 의자들이 한 방향으로 휩쓸려 가고 로웰라는 벽에 껌처럼 들러붙어 몸을 가누기 위해 낑낑거리고 있었다. 시들링이 간신히 로웰라를 덮치려는 가구들을 막고 있었다.
거대한 파도가 한 번 후려치고 연이어 작은 파도들이 배를 흔들어 댔다. 배 위의 모든 것들이 중심을 잃고 흔들거렸다. 한쪽으로 쏠렸던 가구들은 또다시 반대 방향을 향해 우르르 밀려났다.
이걸로 끝이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방금 거대한 파도는 단순 예고라는 듯 더 큰 파도가 멀리서부터 한 차례 몰려오고 있었다.
한 번은 버텼지만 다음은 버틸 수 있을지….
시야가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바다의 모든 표면에 거대한 담벼락처럼 파도가 솟아났다. 바다가 마치 작정하고 끝내려는 것처럼 굴었다.
공중 정원의 벽화는 대체 어떻게 이걸 예언할 수 있었던 걸까? 이걸 정말 자연재해로 볼 수 있는 걸까?
마치 무언가 은둔자의 정원이란 걸 작정하고 없애 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더러운 것을 물청소로 쓸어버리려는 것처럼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 단순한 감상은 이런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배는 다음 웨이브 때 침몰할 확률이 컸다. 이곳에서 배가 침몰한다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방비책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거리트가 이 상황을 미리 예언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이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배를 타야 했고, 저 거대한 파도 앞에 침몰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섬에 남는다면 섬과 함께 가라앉는 선택뿐이었다.
이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선 애초에 섬에 가지 않는다는 선택뿐이었는데, 이미 한참을 지나온 후였다.
생존을 위한 모든 기로가 꽉 막힌 사면초가였다.
이제 어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