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604)

“제가요?”

순례자의 길을 걷게 되면 필드의 가디언들을 10그루 모두 모아야 한다고 하니, 결국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을 내가 맡아야 하는 것이 맞긴 하지만….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으로 바위손이 건네는 열매를 받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아… 얘 키우는 건 진짜 자신 없는데….

잘못 자란 실새삼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봤다. 다시 키운다고 정말 엇나가지 않게 자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내가 키운 그 어떤 드라이어드들보다 각별히 신경 써서 키워야 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아무리 주의를 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얘가 날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기는 할까? 첫 만남이 열매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삐걱거리는데 말이야.

“열매에서 개화한 뒤에… 절 다짜고짜 공격하면 어떡하죠?”

“음….”

바위손은 내 질문에 작게 침음하며 열매를 바라보았다.

“일단 개화를 안 하고 버틸 수도 있어요. 당장은 저 껍데기를 깨고 나오게 하는 것이 문제일 텐데요.”

“네?”

“세상에 나오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거죠.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라… 솔직히 드루이드를 주인으로 삼았던 것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독단적인 녀석이거든요.”

“그럼 저와 영혼의 연결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요?”

“네… 그것도 일단 열매 밖으로 나와야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거지만.”

불량품인데요? 제게 웃는 낯으로 불량품을 넘기셨는데요? 상품 설명은 끝까지 하고 주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열매 안에서부터 주인을 고를뿐더러 원치 않으면 개화도 거부하는 드라이어드라니!

어쩐지 플로라의 손길을 피해 데굴데굴 굴러다녔던 마거리트 열매가 떠올랐다. 그래도 그 앤 내게 오기 위해 꾀를 뿌렸던 거지. 열매부터 호감도가 마이너스부터 시작하는 드라이어드는 대체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건가요?

“그래도 영원히 나오지 않고 버틸 순 없을 거예요. 열매는 결국 썩을 테니까. 죽기 싫으면 기어 나와야죠.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쯤엔 열매 안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반성한 후일 수도 있으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바위손이 마치 앓던 이를 뽑아 버린 것처럼 속 시원한 표정을 짓는 것을 얼핏 느낄 수 있었다.

“…반성 안 하면 절 다짜고짜 공격할 수도 있고요…?”

“음….”

그래서 개화하면 절 공격하나요, 안 하나요? 주머니에 넣어 놨는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제게 주먹을 들이대면 곤란한데요.

“그게, 나중에 보면 아시겠지만… 공격할 만큼 대단한 상태가 아닐 거예요. 아주 큰 상처를 입었으니까요. 개화해도 아마 이만큼?”

바위손은 두 손을 들어 길이를 가늠하듯 사이를 벌렸다. 그러다 허리를 숙이고 땅에서부터 자신의 무릎 아래까지의 길이를 손바닥으로 쟀다.

“묘목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새싹이 튀어나올 건데, 그 정도면 목숨이 위협될 정도의 공격은 못 하고 장난 수준일 거예요.”

“성인의 모습으로 개화하지 못한다는 건가요?”

“네!”

어이를 상실한 기분으로 열매를 바라보았다. 바위손이 가늠한 크기로 보면 민들레 아이들보다도 훨씬 작은 드라이어드로 태어날 거란 말인데. 난데없는 육아라니. 아니 육목인가?

“작은 몸뚱어리에 본래의 정신을 다 담지 못할 수도 있고. 엇자라지 않게 다시 키우기엔 최적의 상태로 개화할 거예요.”

“…….”

“보통 그런 작은 드라이어드는 세계수 밖에서 태어날 일이 없으니 드루이드로선 처음 보는 광경이 되겠네요.”

“그렇게 애써 포장하지 않아도… 열매를 다시 물리거나 하진 않을게요. 결국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을 제가 맡아야 하는 것이 맞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바위손이 바로 감사 인사를 전하며 웃어 보였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열매는 그 어떤 드라이어드 열매보다 단단해 보였다. 그 껍데기를 깨고 나올 생각이 절대 없다는 것처럼 날 거부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여길 오는 길에 그 하얀 꽃을 만났어요. 역시 실새삼이 데려갔었더라고요. 그런데 같은 꽃이 둘인 데다 저희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과격하게 싸우던데, 지금쯤 결말이 났으려나요?”

엘더들이 아직까지 싸우고 있었구나! 미러전이긴 해도 금방 결판이 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짭신 엘더가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나 보다.

결국 섬에 숨어 살던 괴물은 잡았다. 이제 모든 걸 마무리하고 섬을 떠야 할 때였다.

“로웰라! 지금 바로 구해 줄게!”

실새삼이 사로잡았던 드라이어드들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쥐어짜느라 신전 중앙의 거대한 구멍이 많이 손상되긴 했다. 그러나 다행히 로웰라는 안전하게 피신하고 있던 상태였다. 데이지를 보내 줄기로 로웰라를 끌어 올렸다.

그 와중에 바위손 드라이어드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무언가 속닥거리는 것이 들렸다.

“지독한 녀석, 모두 죽여 버린 것 같지?”

“분명 드라이어드를 흡수한 기운이 남아 있는데 정작 드라이어드는 느껴지지 않아.”

“수가 상당했을 텐데…. 우리가 놓치지만 않았어도 무고한 식물들이 죽는 일은 없었을 거야….”

“여길 나가면 모두 뱉어 내야겠어. 속이 울렁거려. 동족의 수액을 빨아먹었다고 생각하니 죽고 싶을 정도야.”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실새삼을 물리친 뒤 그에게 사로잡혔던 드라이어드들 중 살아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다면 구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위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끝을 내 버렸나 보다. 부디 그 드라이어드들이 오래 고통받았던 만큼 세계수의 품 안에선 편안하기를 기도했다.

묶인 손발을 풀어 주니 로웰라는 긴장이 풀렸는지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애써 참아 보려고 끅끅대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꼭 끌어안아 주었다.

“고생 많았지. 잘 버텨 주었어. 네가 잘못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언니… 그 신이라고 불리던 엘더 플라워는 어떻게 됐어?”

“지금 보러 갈 거야.”

“언니, 그 드라이어드 생각했던 것만큼 나쁜 드라이어드는 아닌 것 같아.”

음, 로웰라의 말처럼 섬의 모든 악영향은 실새삼이 끼쳤으니 제물을 바치라는 둥 물욕을 부린 정도론 짭신 엘더를 악당이라고 치부하기엔 미안할 정도였다. 어쩌면 실새삼에게 속고 있었을 수도 있고.

“내가 미끼가 되어 괴물의 시선을 끌 동안 레몬밤이 무사히 나가게 해 달랬는데 들어줬어. 레몬밤은 주인이 없는 드라이어드라 잡히면 꼼짝없이 죽기도 하고….”

로웰라는 자신이 잡혔을 때의 상황을 더듬더듬 이야기해 주었다. 앙코라가 목격한 것처럼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눈을 뜨니 좀 전처럼 땅굴 속이 아니라 짭신 엘더의 곁이었다고.

그리고 놀랍게도 미지의 섬으로 가는 지도는 짭신 엘더가 눈을 뜬 로웰라에게 직접 건네준 것이라고 했다.

“괴물은 자신을 구해 준 엘더 플라워에게 이 섬을 선물로 준 거래. 자신의 곁에서 아무것도 안 한 채 살아가면 신처럼 모두의 위에서 군림해도 되고 좋아하는 금은보화를 잔뜩 가질 수 있게 해 줄 거라고 했대. 하지만 사실 그건 괴물이 엘더 플라워에게 고마워서 준 선물이 아니라, 도망가지 못하게 섬의 생물들을 볼모로 잡고 있었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게 됐대.”

“볼모라….”

로웰라는 짭신 엘더가 자신에게 해 줬던 이야기라며 내게 전해 주었다.

“엘더 플라워는 그래서 오랫동안 기다려 왔대. 자기와 영혼의 연결을 할 수 있는 드루이드를. 영혼의 연결을 해서 더 강해지면 섬의 모든 생명들이 죽기 전에 자신이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그러나 실새삼 역시 섬에 드루이드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드루이드의 존재에 무척이나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섬에 자신의 주인이 아닌 다른 드루이드가 존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드루이드가 성장할 수 있는 모든 기로를 막았다.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물론 강해질 그릇을 가지고 있는 드라이어드를 모두 잡아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드루이드가 될 수 있는 어린아이들 역시 잡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짭신 엘더가 개입해 아이들을 빼돌렸다. 지식이 부족한 짭신 엘더는 드루이드만 있으면 바로 영혼의 연결을 할 수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설익은 열매가 필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섬의 사정을 설명하며 영혼의 연결을 강요했지만 번번이 실패… 끝내 그녀는 아이들이 드루이드로서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기에 자신과 영혼의 연결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느 순간부터 짭신 엘더는 섬에서 태어나는 드루이드들에게 기대를 거는 것을 포기했다. 실새삼은 섬에 정착하며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자신이 아무리 강해도 실새삼의 힘에 저항해 섬의 모든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희망을 완전히 버리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새삼이 아이들을 잡아가는 것을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자신이 거둬서 숨겨 두기엔 섬의 모든 곳에 실새삼의 눈이 존재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로웰라를 쓰러뜨렸던 것과 같은 이상한 물을 실새삼에게 받아 아이들을 죽이는 척, 기억을 모두 지우며 섬 밖으로 빼돌렸다고 한다.

“아이들이 살아 있어?”

“저 아래 구멍으로 배를 띄워 아이들을 바다로 보냈나 봐. 하지만 다들 어디로 갔는 지는 몰라.”

아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망망대해를 떠돌다 잘못됐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발견됐을 수도 있었다.

“자기에겐 더 이상 희망이란 남아 있지 않은데 실새삼과 싸우는 내 엉겅퀴를 보고 미약하게 느꼈대. 섬의 드라이어드들과 다를 바 없이 생겼는데도 나와 함께하는 엉겅퀴는 무척 용맹했다고. 그래서 혹시나 하고 내게 지도를 주며 이야기를 해 주고 레몬밤이 빠져나갈 수 있게 내버려둔 거야. 물론 난 이렇게 잡혀 있는 것밖에 하지 못했지만.”

“지도는 정말 큰 도움이 됐어. 레몬밤이 전달한 너의 말이 아니었다면 아이의 주장을 완전히 믿지도 못했을 거야.”

주위가 더욱 어두워졌다. 섬에 해일이 닥치는 시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신전을 빠져나가며 바위손 드라이어드들에게도 대피할 것을 권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바위섬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이미 그들을 데리고 온 모감주나무를 비롯한 드라이어드들은 다 도망갔을뿐더러 해일의 영향에 작은 바위섬이 안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피신할 수 있게 남겨 뒀을 배를 타고 함께 떠나자고 일러둔 후 신전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엘더….”

하얀 꽃들의 승부는 이미 결말이 나 있었다.

짭신 엘더는 박제된 곤충처럼 하얀 꽃가지들에 팔다리가 꿰인 채 주저앉아 있었다. 전투는 졌지만 우릴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항상 거만함을 유지하던 얼굴이 가면인 것처럼, 그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승부는 졌지만 그냥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둬. 미안하지만 너를 왕으로 섬길 마음은 없어.”

하지만 짭신 엘더의 입이 열리며 나온 말은 의외였다.

“모든 게 나 때문이야. 그냥 이곳에서 죽겠어.”

그리고 어느새 하늘의 해가 완전히 먹혔다.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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