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기어 온 드라이어드들은 거머리처럼 실새삼을 향해 들러붙었다. 저 드라이어드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실새삼에게 무얼 하려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실새삼은 드라이어드들에게 둘러싸여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이따금 그들이 모인 곳이 들썩들썩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 몸부림이 장난 아닌 것으로 여겼다.
별안간 그들의 중심에서 청록색의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실새삼의 소리 없는 비명을 들은 것 같았다.
섬을 흔들던 잔잔한 여진마저 뚝 끊기고 틈새를 비집고 나오려던 노란 줄기도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먹이를 탐하는 좀비처럼 붙어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조금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 등장부터 엎드려 기기만 했던 그들이 멀쩡히 몸을 세우자 긴장되었다. 저들이 돌변해 우릴 공격하기라도 할까 봐 언제든지 몸을 피할 준비를 했다.
“어…?”
일어선 드라이어드들의 모습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풀어헤쳐져 엉켜 있던 검은 머리카락에 청록색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깡마른 몸집도 점점 크기를 부풀리고 흙먼지가 묻고 거적때기처럼 낡고 해졌던 옷들도 점점 깨끗해졌다.
귀신처럼 기괴한 모습이었던 드라이어드들이 어느덧 하나둘 멀쩡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청록색 머리칼이 윤기가 흐르고 폭포수처럼 굽이쳤다. 처음엔 아무렇게나 기워 입은 옷처럼 보였으나 깨끗해지니 바다의 님프가 입는 옷처럼 나풀거리는 신비로운 옷이었다. 방금 전의 드라이어드들과 동일 종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들 중 하나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살풋 웃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모두 맨발이었다. 발목과 손목, 이마에 가는 금줄을 둘러 작게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망친 실새삼을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손에서 빠져나가 너무 힘을 불린 터라 치명상을 입혀 놓지 않았다면 저희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저희를 이곳으로 부른 것도 당신들이라고 들었어요.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앞선 드라이어드가 고개를 숙이자 뒤의 드라이어드들도 하나둘 우릴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 누구세요?”
“아, 저흰 인근 섬에 군락지를 가지고 있는 바위손입니다.”
“역시 드라이어드가 맞았구나.”
아니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지. 사람도 드라이어드도 아닌 기괴한 크리처가 등장했다면 내 멘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뻔했다.
이들이 인근 섬에서 왔다면… 모감주나무가 제때 미지의 섬을 찾아 원군을 데려온 거구나.
정말 레몬밤이 이야기했던 대로 이들이 등장하며 섬의 모든 식물이 말라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저흰 세계수의 부름을 받아, 엇나간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을 우리들의 섬에 가둬 구속하는 역할을 수행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순진한 하얀 꽃이 섬에 당도하지만 않았다면요.”
“실새삼을 구속하고 있었다고요?”
무지막지한 괴물을 구속하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이라니.
레몬밤이 그랬지, 바다 위 어떤 섬엔 괴물의 능력과 상반되는 식물들이 살고 있다고. 이 바위손 드라이어드들이 실새삼의 능력을 카운터 칠 수 있는 드라이어드들이라는 거구나.
“실새삼은 본체가 번식력이 대단하고 엉겨 붙은 모든 식물의 수분을 빨아먹으며 살아가죠. 대부분의 식물들은 실새삼에게 걸리면 고사하겠지만 저흰 수분이 없는 정도론 죽지 않는 식물들이랍니다. 온몸이 바짝 말라 행동이 굼떠지긴 하지만 절대 죽지 않는 불사의 식물들이에요. 저흰 일부러 수분을 아주 소량씩만 섭취하거나 아예 섭취하지 않으며, 실새삼에게 어떠한 양분도 제공하지 않고 그를 강제로 휴면 상태로 만들어 다스리고 있었답니다.”
말 그대로 좀비네….
“대단한 드라이어드들이었네요….”
“아니요, 저흰 아무 능력도 없는 식물들이랍니다.”
능력이 없는 식물들이라고? 겸손인 걸까?
“정말 저흰 그것 외에 아무 능력도 사용할 수 없는 드라이어드들이에요. 저희가 사는 바위섬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난 바위손들은 능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저흰 선조가 세계수에게 부탁해 가진 모든 능력을 반납해 정말로 아무 능력도 없이 태어나는 바위손들이랍니다. 그래서 실새삼이 저희를 흡수하더라도 아무 능력도 가져갈 수 없지요.”
실새삼을 구속하기 위해 존재하는 식물들. 말 그대로 실새삼에게 완벽하게 상반되는 힘을 가진 식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실새삼이 풀려나게 된 건가요?”
바위손은 다시금 살풋 웃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감긴 눈이 떠지고 나와 눈이 마주했을 때, 갑자기 정신이 붕 뜨며 시야가 일그러졌다. 눈이 시리고 약한 두통이 뒤따랐다.
시야가 점점 맑게 돌아오며 보인 풍경은 내가 서 있던 공중 정원의 신전이 아니었다. 사방에 바다가 깔린 알 수 없는 섬이었다. 다른 이의 시선을 빌린 것처럼 높낮이가 다르고 이질감이 느껴졌다.
내 의지와 다르게 시야를 빌린 다른 이가 고개를 돌리자, 배 한 척이 파도를 밀며 다가와 섬에 정박하는 것이 보였다.
“종종 외부에서 들여온 식물들이 그 지역의 식물들이 만들어 놓은 생태계를 교란하는 경우가 있죠. 순진한 하얀 꽃이 그랬답니다. 어쩌다 어선을 타고 저희 바위섬에 당도한 듯한데….”
섬에 정박한 배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그들은 둘로 나눠 일부는 물을 길으러 가고 일부는 짐을 잠시 내리고 점검했다. 그들이 내린 짐 중 하얀 꽃가지가 담긴 자루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이 다시 짐을 배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 자루 속 꽃가지가 떨어져 나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데굴데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꽃가지가 운 좋게 좋은 터에 당도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고 곧이어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 어린 드라이어드가 태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엘더 플라워의 묘목 시절 모습이라니…. 엘더 미니미는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고귀한 사제복은커녕 간소한 새하얀 로브를 두르고 주먹만 한 꽃 뭉치를 스태프라고 들고 있었다.
“그 꽃은 바짝 마른 저희의 모습을 보고 도움이 필요한 식물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실새삼이 그 꽃을 꼬드겼죠.”
엘더 미니미를 향해 노란 줄기가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말을 걸고 있었다. 엘더 미니미가 자라 어느 정도 성숙해질 때까지 노란 줄기는 끊임없이 엘더를 따라다녔다.
“그 녀석은 우리가 하얀 꽃의 힘을 받으면 위험해질 거란 걸 알고 있었답니다. 결국 하얀 꽃은 저희에게 회복의 힘을 아낌없이 나눠 주었지요.”
하얀 꽃은 역시 괴물과 출현 시기가 동일한 짭신 엘더 플라워를 말하는 것이었다. 엘더는 노란 줄기의 말을 듣고 섬 곳곳에 제 힘을 뿌리고 다녔다.
“그래선 안 됐어요…. 저흰 모든 능력을 세계수에게 반납하면서 오로지 모든 삶을 자연 그대로에 의지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식물들이랍니다. 그러니 하얀 꽃이 사용한 회복의 힘은 저희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바위손 드라이어드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점점 미로를 빠져나왔을 때의 귀신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갔다.
“강제로 회복된 몸에 부작용이 일어나 쓰러진 드라이어드들도 있었고… 실새삼이 수분이 충만해진 먹잇감을 그냥 놔둘 녀석은 아니었죠. 순식간에 간신히 휴면시켜 놓았던 실새삼이 부활해서 날뛰었답니다.”
엉켜서 뽑혀 나온 듯한 머리카락 같은 노란 줄기들이 바위섬의 모든 곳을 순식간에 뒤덮기 시작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환각에서 깨어났다.
마치 바위손의 기억을 공유한 기분이었다. 달라진 내 눈이 과거를 볼 뿐만 아니라 다른 드라이어드의 기억도 공유할 수 있다니…. 아니, 메스키트의 과거를 본 적도 있고 실새삼의 과거를 본 적도 있으니… 어찌 보면 내가 본 것도 결국 그들의 기억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실새삼은….”
그러고 보니 그들이 둘러싸고 있던 실새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한 거지?
“저흰 분명 아무 능력도 없지만 딱 하나 특이점이 생겼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실새삼을 지키다 보니 자연스레 저희가 실새삼의 천적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 자연의 약육강식이 부여한 우선권으로 현재 사방에 바위손을 퍼뜨려 실새삼이 흡수하는 수분을 중간에서 갈취해 힘을 억누르고 있지만….”
바위손이 땅 아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실새삼은 절대 죽지 않아요. 죽일 수 없어요. 당장은 본체를 만들지도 못할 타격을 입어 드라이어드가 될 수 없는데…. 현재 자기가 퍼뜨려 놓은 분신들에 정신을 옮겨 다니며 도망 다니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도 곧 한계가 올 것이니.”
진짜 까다로운 녀석이네. 죽일 수 없는 식물이라니. 정신을 옮기며 도망 다니고 있다고? 핸드폰이 띄운 뷰파인더 스크린엔 아직도 붉은 점이 가득했다. 사방이 녀석의 도주로였다.
바위손은 고개를 들어 다시 날 바라보았다.
“군락지에 당도한 작은 꽃가지 하나가 그가 도망갈 틈을 만든 것처럼 그는 언제든 다시 우리의 손을 빠져나가 재앙이 될 수 있지요. 저흰 더 이상 그를 영원히 구속할 수 없어서 실새삼을 다른 이의 손에 맡겨야겠다고 이곳에 오면서 판단했답니다.”
다른 이의 손에 맡겨야겠다고?
“이렇게 속을 썩이는 것도 결국 그가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랍니다.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의 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실새삼이 가져갈 거예요. 죽지 않으니까. 하지만 단지 세대교체가 되냐 마냐의 문제죠. 찾았다! 노목이여, 그대는 너무 오래 해 먹었어.”
바위손은 그렇게 말하며 별안간 자신이 딛고 선 땅 아래로 주먹을 깊숙이 내질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굴착기처럼 주먹이 땅을 파고들었다.
잠시 후 바위손이 회수한 주먹에 노란 줄기 다발이 머리끄덩이처럼 잡혀 끌려 나왔다.
“실새삼이 번식시킨 새로운 실새삼은 모두 그의 분신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섬에 뿌리내린 수많은 분신들에게도 결국 세계수의 축복은 닿기 마련이죠. 그러나 가디언이 억누름으로써 드라이어드가 되지 못한 실새삼도 존재합니다. 그게 이거예요.”
어디선가 실새삼의 귀곡성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바위손이 쥐고 있는 노란 줄기 다발은 노랗게 빛을 내더니 투명한 드라이어드 열매가 되었다.
“실새삼은 다시 본체를 만들기엔 힘을 다 써 버렸고 이곳으로 정신을 옮겨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네요.”
나는 멍하니 바위손이 들고 있는 드라이어드 열매를 바라보았다.
“미래의 바이오 필드 가디언이 태어날 드라이어드 열매입니다.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이 섬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악독한 녀석이 될 수도 있고, 이번엔 정신 차리고 제 필드의 규율을 지킬 녀석이 될 수도 있죠.”
바위손은 상품을 권유하는 서비스 직원처럼 열매를 내게 건네며 밝게 웃었다.
“늦게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세계수의 대리자님. 이 녀석을 맡아 주실 분은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