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화 (228/604)

딱 한 번만 더 멈추라는 명령이 먹힌다면….

내가 실새삼을 붙잡는다면 곧바로 등에 검을 꽂아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선 시들링이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마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 날 지키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을 것이다.

힘을 주어 눈을 부릅떴다. 실새삼이 내 명령을 들었을 때, 눈에 약한 고통이 따랐으니 이 눈이 뭔가 작용을 한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한 번만 더 발동해 줘, 제발.

실새삼이 날 바라보며 우아하게 손을 들었다. 그와 대비적으로 야만적인 빛이 그의 손에 휘감기며 모였다. 메스키트가 랜스에 힘을 집중할 때와 같은 효과였다.

엄청난 위압감이 날 짓누른다. 마치 적이 된 메스키트가 내게 랜스를 겨누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포가 심장이 조여 왔다.

실새삼이 뚜벅뚜벅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시들링이 움직이려 하길래 곁눈질로 바라보며 눈짓했다.

타이밍을 잘못 맞추면 끝이었다. 실새삼이 메스키트의 힘을 흡수하기 전에도 시들링은 그의 공격을 막는 것이 버거워 보였다. 둘이 대치한다면 이번에는 빠른 시간 내에 결론이 날 것이 분명했다.

실새삼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제발. 눈도 깜박이지 않고 열심히 실새삼을 노려보았는데 신호가 없다.

온갖 신을 다 찾아 기도하다가 끝내 세계수까지 속으로 부르짖게 되었다.

세계수! 뭐라도 해 봐! 네가 내 눈에 멋대로 준 힘이잖아. 이러다 네 대리자 죽게 생겼다고! 내가 죽으면 네 가지가 빨아먹는 다이아도 증발하는 거야!

“네 드라이어드의 힘으로 최후를 맞게 되겠구나.”

실새삼의 빨간 입술이 귀신처럼 휘어졌다.

죽는다. 뭔가… 뭔가를 해야…!

위기에 내몰린 내가 나도 모르게 초인적인 힘을 낼지도 모른다는 ‘운’에 맡겨야 하나 싶어 절망적으로 느껴질 때.

파삭, 하고 작은 유리 조각 같은 것이 박살 나는 소리가 연이어 세 번 들렸다.

익숙한 달콤한 향기가 날 감쌌다.

엘더? 아니 엘더의 향기가 분명한데 주위에 엘더는 없었다.

옅은 하얀 빛이 반짝반짝 요정의 가루처럼 내 몸 주변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작은 두통과 함께 그토록 기다리던 신호가 눈에 고통을 동반하며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니 시야가 바뀌었다. 실새삼을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오래된 필름을 눈에 덧씌운 것 같은 낡고 누리끼리한 색이 주변을 물들였다.

이 상황에서 과거를 보는 게 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살기를 띠며 내게 다가오던 실새삼이 놀란 얼굴로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역시… 살아… 살아 있었어.”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오던 그의 눈이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변했다.

“그럼 그렇지. 당신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잖아?”

날 보며 말하고 있지만 날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당신이 떠난 이곳에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난 돌아왔어. 당신도 다시 돌아오기로 했잖아, 그렇지? 다시 우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잖아.”

여태껏 그를 지배하던 광기와 완전히 다른 의미의 광기 어린 시선이 눅눅하게 날 주시했다. 형용할 수 없는 먹먹함이 날 잠식하니 가슴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모든 것이 변해도 그대로일 내 모습을 보면 안심할 수 있겠다고 했잖아. 잘 봐, 난 그대로야. 수백 년이 지나도 난 그대로 있을게. 그러니까….”

추수가 끝난 들판처럼 메마른 그의 두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난 너무 오래 기다렸어. 더 기다리라고 하지 마. 보고 싶었어, 나의 드루이드.”

주인을 잃었어도 무슨 이유에선지 함께 죽지 않았던 드라이어드.

그가 내 드라이어드가 아님에도 마치 오랜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만난 것처럼 절절함이 느껴졌다.

공격 태세를 완전히 풀어 버린 실새삼이 무방비하게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어쩌지도 못하고 서 있는 날 갑자기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아프게 코를 부딪혔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를 밀쳐 낼 수 없었다. 그가 보고 있는 환상이 깨져 버릴 만한 행동을 하면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날 끌어안았던 그가 슬쩍 몸을 떼고 날 내려다보았다.

“다시 우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해, 카수스.”

“…….”

“어서.”

그가 작게 달싹이는 내 입술을 바라보며 종용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의 추억에 잠자코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시들링.”

그 순간 번쩍이는 섬광이 터지더니 뭐라고 대꾸하려던 실새삼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투명한 액체가 솟아올랐다.

실새삼의 어깨 위가 텅 비어 버렸다.

툭, 투둑. 사라진 그것이 땅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자 온몸이 냉탕에 빠진 것처럼 바짝 얼어붙었다.

남아 있는 몸뚱이의 팔다리가 덫처럼 날 옭아매어 아무리 몸부림쳐도 놓아주질 않았다.

훅, 하고 뜨거운 기운이 끼쳐 오더니 시들링이 날 붙잡고 있는 실새삼의 몸뚱이를 거칠게 떼어 냈다.

짐짝처럼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몸은 굴러간 머리와 외따로 놓였다. 쓰러진 주변의 땅을 흠뻑 적시며.

“헉… 헉….”

“모두 끝났다. 잘 버텨 주었다.”

내 눈앞에서 머리가 날아가는 광경을 봤는데도 결코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솟구치던 드라이어드의 투명한 피가 망막에 새겨진 것처럼 떨쳐 내기 힘들었다.

검으로 찌를 거라 생각했는데 머리를 날려 버릴 줄은….

멍한 정신이지만 다리는 착실히 움직여 실새삼의 시체와 거리를 벌렸다.

“…죽은 거 맞아?”

“머리가 날아간 드라이어드가 살아 움직인다는 소린 들어 본 적이 없다.”

시들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검으로 나와 실새삼 시체 사이를 가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필드의 가디언이란 위명을 가지고 섬을 통째로 주름잡던 재앙 같은 드라이어드였다.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버렸지만 어쩐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체가 안 사라져, 시들링. 시체가 안 사라진다고!”

드라이어드가 죽으면 빛에 감싸여 열매로 변한 후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즉사가 확실한 피해를 받고도 시체는 덩그러니 눈앞에 놓여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시들링에게서 검을 빼앗듯 빌렸다. 항상 영화나 소설에서 죽은 줄 알고 확인 사살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눈앞의 시체가 징그럽지만…. 가루가 되어 날아가지 않는다면 직접 가루로 만들어 주마.

덩그러니 놓인 머리를 향해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렸다. 실새삼의 얼굴은 순식간에 당한 탓에 눈도 감지 못한 상태였다.

막 마음을 독하게 먹고 검으로 내리치려 할 때였다.

그 순간, 그의 두 눈이 데구르르 움직였다.

“시발!”

이 섬 진짜 싫다. 내 평생 볼 공포스러운 광경은 여기서 다 보고 간다.

눈을 질끈 감고 검을 내렸다. 퍽, 하고 단단한 것에 검이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죽일 거다…. 모두 죽여 버릴 거다….”

분명 제대로 머리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발아래서 울리고 있었다.

“미친….”

더 이상의 용기는 무리였다. 검을 거칠게 뽑아 회수하고 시들링에게 쥐여 준 채로 멀찍이 도망갔다. 왜 아직도 살아 있어?

짐짝처럼 널브러져 있던 몸뚱이도 스멀스멀 움직였다.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움직이고 경련하듯 온몸을 떨었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땅이 여태까지와 비견도 되지 않을 만큼 크게 흔들렸다. 섬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처럼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다.

“섬의 모든 생명을 다 집어삼켜서라도 너흴 죽여 버릴 거야…. 난 절대… 죽지 않는다.”

괴물이 섬의 모든 식물을 말려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갑자기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 멋대로 떠오른 금빛 둥근 뷰파인더 스크린이 온통 빨간색이었다. 붉은 점이 너무 많아 붉은 면처럼 보였다.

이제 알 수 있었다. 왜 저놈은 하난데 붉은 점은 여러 개였는지.

우리가 오면서 봤던 노란 줄기가 전부 저 녀석이었다. 사방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뻗어져 나왔던 줄기가 전부 하나의 드라이어드였다. 실새삼은 섬 전체에 줄기를 내리고 있었다.

독립된 개체라고 여겼는데 식물 하나하나가 저 녀석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왜 예민한 메스키트나 시들링이 줄기에 대처하지 못했는지 이제 알았다. 섬에 들어선 순간부터 드라이어드 위에 발을 딛고 있으니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대로 정말 섬이 통째로 말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들었다. 늦지 않게 애드너의 배가 도착했을까? 다들 안전하게 배를 탔을까? 모감주나무는 지원군을 데려왔을까? 바깥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불안만 커져 갔다.

어느새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반 이상 집어삼켜져 주변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영화처럼 사방이 지진으로 흔들리고 어둠이 내려앉는다.

떨어진 머리와 몸뚱이에서 노란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터진 인형을 봉합하듯 양쪽을 끌어당기며 서로 맞붙으려 하고 있었다.

실새삼이 섬의 모든 식물을 흡수하고 생명을 회복해 다시 살아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컥…!”

갑자기 실새삼을 둘러싼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말미잘처럼 흔들리던 노란 줄기들이 일제히 바짝 마르고 실새삼의 얼굴이 가뭄의 논밭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길….”

섬의 식물들을 모두 집어삼키려던 그의 계획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잘도 도망가 꼭꼭 숨어 있었구나.”

불현듯 미로의 어둠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던 엘더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얀 것을 꼬드겨 빠져나가다니….”

“같이 가자…. 우리와 같이 가자….”

“이리 온….”

“집으로 돌아가자….”

스슥… 스슥….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 땅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우리가 있는 중앙을 기점으로 주변을 둥글게 둘러싼 미로의 출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게 다 뭐야…?”

땅바닥을 귀신처럼 기어 나오는 것은 전부 드라이어드였다. 풀어헤친 머리가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으나 결코 인간으로 볼 수 없는 행색이었다.

“안 돼….”

실새삼의 몸뚱이가 거칠게 반항하듯 움직였다.

공포 영화를 직접 체험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목이 떨어져 나가도 움직이는 시체, 귀신처럼 땅을 기어 다니는 드라이어드.

이대로 기절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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