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7화 (227/604)

멈추랬더니 실새삼은 말 잘 듣는 개처럼 정말 멈춰 섰다. 바로 앞에서 멈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정말 내 말을 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실새삼의 의지가 아닌지 온몸이 속박된 인형처럼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조차 알 수 없는 현상이란 것처럼 얼굴엔 당혹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멈추란다고 멈춰? 정말로?

“너….”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날 향했다.

멈추라는 명령의 시전 타임이 끝났는지 그가 움직이려 하기에 다시 외쳤다.

“멈춰!”

동시에 아까처럼 눈이 지끈거리며 작은 고통이 따랐다.

무슨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착실히 내 말을 따라 멈췄다. 내가 이 기회를 그냥 놓칠 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신이 주신 기회였다.

구멍 한 바퀴를 빙 돌아 내가 서 있는 자린 실새삼이 내 검을 부러뜨린 장소였다. 부러진 검날을 주워 힘 있게 쥐었다. 포르타가 내게 만들어 준 장갑은 검날을 힘주어 쥐어도 쉽사리 찢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에 날카로운 감각은 느껴졌다.

그걸 쥐고 그대로 멈춰 있는 실새삼의 목과 어깨 사이를 노렸다.

드라이어드의 피부는 은연중에 인간의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만지는 살결이 인간처럼 보드랍기에 그런 줄 알았지. 하지만 직접 검날을 갖다 대니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검이 한 번에 안 박혀서 온 힘을 다해 밀어 넣어야 했다. 날카로운 검날이 손바닥을 찢을 것같이 아파 올 정도로 힘을 주어야 했다.

푹.

피륙이 뚫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푸른빛이 도는 투명한 액체가 얼굴에 잔뜩 튀었다.

놀란 얼굴을 한 실새삼과 눈이 마주쳤다.

다시금 멈추라는 명령의 효과가 끝났다. 곧바로 내게 반격해 올 줄 알았던 그는 내게서 멀찍이 물러났다.

검날을 목에 박아 넣은 채로 피를 뚝뚝 흘리며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점점 기괴한 웃음이 떠올랐다.

“하하하….”

웃는 그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의 고풍스러운 정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나의 주인을 위한 실로 완벽한 숙주가 아닌가. 그 거침없는 행동, 잔인함 그리고 그 눈…. 그래, 그 눈. 만물을 굽어살피는 듯한 저 하늘 위의 태양 같은 눈.”

내 눈이 뭐.

“숙주가 되지 못한다면 널 죽여 두 눈을 뽑아내겠다. 내 주인이 다시 돌아올 그날까지 너의 눈을 보고 그를 추억해야겠구나.”

치명상을 입혔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저 정도론 안 죽는다 이거야?

내가 온 힘을 다해 찔러 넣었던 것과 달리 그는 제 목에 박힌 검날을 쉽게 뽑아냈다. 막혔던 상처가 뚫리자 투명한 피가 간헐천처럼 솟구쳐 올랐다.

“데이지, 아티팩트로 돌아가.”

“제이 님….”

여태 우리의 드라이어드들 중 데이지가 가장 오래 실새삼의 줄기에 묶여 있었다. 저 아래서 보았던 미라 같은 드라이어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데이지가 그 모습이 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결국 데이지가 아티팩트로 돌아간 그때, 실새삼의 몸에서 거미줄처럼 수많은 줄기 다발이 뿜어져 나와 검에 뚫린 그의 상처를 감쌌다.

옅은 빛이 떠올랐다. 한눈에 봐도 치유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쿠르릉.

동시에 발밑에 약한 지진이 일어났다.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구멍 아래를 보니 벽면이 뜯겨 나가고 있었다.

단순 지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노란 줄기가 벽의 일부를 뜯어내 아래로 던지고 있었는데, 떨어지는 것은…. 드라이어드들이었다. 그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돌덩이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치유되는 상처, 버려지는 미라 같은 드라이어드들. 실새삼이 사용하는 회복 메커니즘을 알 수 있었다.

땅굴 속, 거미줄에 사로잡힌 먹이 같은 모양새로 실새삼의 줄기에 감겨 있던 드라이어드들의 힘뿐만 아니라 생명력까지 남김없이 빨아먹은 것이다. 마치 힐팩처럼.

“아까운 양분을 낭비하게 됐군. …왜 그런 표정을 짓지?”

자신과 같은 드라이어드를 그렇게 잔인하게….

“아, 그걸 보았나? 이것 또한 자연의 이치지. 다른 식물들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것이 우리 바이오 필드들의 숙명인데 겨우 인간의 잣대로 이해하려 드는 건가? 그 점은 내 주인과 조금도 닮지 않았군.”

“넌 정도가 과해.”

“약했기 때문에 먹혔을 뿐이다. 내겐 그저 사냥감일 뿐. 살기 위해 벌레를 잡아먹는 식물들도 있다. 넌 그런 식물들에게도 벌레의 목숨을 동정할 건가? 나 또한 세계수가 만든 생명. 날 부정할 거면 날 만든 세계수를 부정해야겠군.”

“세계수가 이 땅 아래 수십의 드라이어드를 고치처럼 묶어 다 비상식량처럼 써먹으라고 널 만들진 않았겠지.”

실새삼의 눈썹 한쪽이 위로 비죽 솟았다. 마치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눈치였다.

저놈이 타락한 필드의 가디언이란 것은 알겠다. 대다수의 가디언들이 필드의 규율을 수호하지 않게 되었다더니. 저 모습을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기생 식물이 살아가는 자연의 이치를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실새삼처럼 행동하면 공존은커녕 그들이 뿌리내린 일대는 전부 생명이 살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다 같이 자멸하는 길이었다.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계속 멈추라는 명령을 해서 죽을 때까지 칼로 찔러야 하는 걸까? 하지만 또 아까처럼 회복하겠지. 땅굴 속에 묻힌 모든 드라이어드가 사라질 때까지 회복하겠지.

몸을 전부 회복한 실새삼이 다시 날 노리고 다가왔다. 이번엔 아무리 멈추라고 외쳐도 먹히지 않았다.

시들링이 적절하게 나 대신 어그로를 가져갔지만 역시나 그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내가 멈추라는 명령을 사용하고 시들링이 공격을 넣는다는 작전도 생각했지만, 너무나 빠르게 명령이 효과를 잃어버렸다. 대체 이전엔 어째서 명령이 먹혔던 거야?

단 한 번, 일격에 당장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대미지를 입힌다면….

내가 하는 단순한 공격보다 시들링의 공격이 제대로 먹힐 수만 있다면….

시들링이 휘두르는 모든 공격이 실새삼의 철통같은 방어에 모두 막히고 있었다. 지 혼자 공격, 방어, 자힐까지 다 해 먹는 진짜 개사기 캐릭터네.

실새삼은 번번이 날 노렸지만 나는 시들링이 그를 잡고 있는 틈을 타 공격 반경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멀찍이 도망 다녔다.

저 방어, 시들링이 결정타를 날릴 수 있게 저 방어만 어떻게 한다면.

내가 시들링처럼 실력이 뛰어났다면 공격할 틈을 마련해 줬을 텐데.

“잠깐… 방어… 방어를 아예 없애 버린다고?”

뭔가 떠오를 것 같았다.

메스키트, 드라이어드 중 가장 방어가 막강한 탱커.

“방어를 버리고 공격에 집중하기 때문에 보통 때보다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아져.”

엘더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내 영혼의 크기가 커지며 메스키트가 사용할 수 있게 된 본래의 기술 중엔 그녀의 장점인 방어를 모두 버리는 기술이 하나 존재했다.

민들레 군락지에서 원 킬을 내지 않으면 후폭풍을 주던,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불이 있었다. 그 인간이 알고 보니 시들링이었지만.

사막의 모래 폭풍 같은 노란빛을 랜스에 두르고 위협적인 그 불들을 전부 꿰뚫어 버렸던 기술.

방어형이지만 엄청난 페널티를 안음으로써 무지막지한 공격형이 될 수 있는 기술.

광전사, 버서커 기술이라면 방어력을 전부 공격력으로 변환시킬 수 있었다.

버서커를 사용한 메스키트의 힘을 아무런 의심 없이 실새삼이 흡수하기만 한다면, 시들링이 결정타를 날리는 순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메스키트.”

거대한 갑옷이 방패 대신 랜스를 들고 내 옆에 묵묵히 나타났다.

“아무리 같은 가디언이라고 해도 드라이어드의 힘은 내 앞에서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실새삼이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부탁해.”

메인을 메스키트로 두어 영혼의 연결에 집중하니 내 생각이 가감 없이 모두 메스키트에게 전달되었다.

“내 주인이 원하는 대로. 최강의 공격을 보여 드리도록 할게요.”

메스키트가 가소롭다는 듯이 실새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랜스를 중심으로 모래가 휘몰아쳤다. 주변의 기세를 모두 억누를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이 그녀에게서 퍼져 나왔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실새삼이 눈을 빛냈다. 그의 새빨간 입술이 배고픔에 허덕이는 식귀처럼 쭉 찢어졌다.

그는 메스키트가 사용하는 힘을 반드시 흡수할 작정이었다.

팡! 공기가 터지는 소리에 고막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눈이 감히 쫓을 수 없는 속도로 메스키트가 쏘아져 나갔다. 땅에 그녀가 나아간 궤적 그대로 거대한 상흔이 남았다.

메스키트의 빛나는 랜스는 단숨에 실새삼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는 걸로 모자라 그의 몸을 종이처럼 구겨 버렸다.

실새삼은 꼬치에 꿰인 고깃덩어리처럼 메스키트의 랜스에 꿰여 그녀가 날아온 속도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가공할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차라리 방금 그 공격에 끝나 버렸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이도 결국 드라이어드가 한 공격의 한계라며 비웃기라도 하듯, 여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엄청난 수의 노란 줄기가 튀어나와 메스키트를 꽁꽁 싸맸다.

즉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실새삼은 얼굴에 웃음을 띨 만큼 여유로워 보였다. 튄 피가 그의 허연 얼굴을 잔뜩 적시고 있었음에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지진이 다시 이어지고 구멍 아래서 수많은 드라이어드 사체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땅굴 속에 묻어둔 드라이어드들을 이용해 생명력을 회복하며 동시에 메스키트에게서 능력과 생명력을 뽑아내고 있었다.

“너의 그 힘은 내가 잘 사용해 주지.”

“그래, 아낌없이 가져가거라. 하나도 남김없이.”

메스키트의 묵색 갑옷을 휘감고도 남은 노란 줄기는 그녀의 얼굴을 스멀스멀 침범해 왔다.

드라이어드의 힘을 흡수해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실새삼의 사기 스킬. 하지만 그것이 독이 되어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힘을 흡수하도록 내버려 두는 건가?”

시들링이 불안하단 목소리로 실새삼과 메스키트를 바라보았다. 메스키트의 힘에 대해 모르는 그라면 이 상황이 불안할 법했다. 가디언의 힘을 흡수한 가디언이 되는 것이니까.

“괜찮아, 시들링. 이제 공격이 통할 거야.”

난 아주 작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단숨에 죽여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공격해야 해. 실패하면… 아마 너나 내가 죽을 수도 있을 거야.”

버서커 기술을 흡수함으로써 실새삼에겐 약점이 생겼지만 반대로 아주 강해지긴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그의 공격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메스키트는 곧 사라졌다. 그녀의 기술이 실새삼에게 흡수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실새삼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메스키트가 꿰뚫어 놨던 상처는 어느새 치료된 후였다.

중앙의 구멍의 크기가 더욱 넓어졌다. 아마 아주 많은 수의 드라이어드에게서 생명력을 뽑아내야 할 만큼 큰 상처였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굉장한 힘이야….”

실새삼이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내가 미끼가 되어 단 한 번만 그의 시선을 묶어 둘 수 있다면….

시들링이 굳은 표정으로 조심히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리를 옮기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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