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6/604)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저 드라이어드의 정체가 실새삼이라고?

그리고… 분명 가디언이라고 했다. 내가 본 환각 속의 누군가가 저 드라이어드를 향해 메스키트와 같은 위치인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이라고 했다.

어쩌면 기생 식물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들어맞은 것은 좋았지만 그 수준에 대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발언을 듣게 되었다.

엄청 강하겠지? 데저트 필드의 메스키트가 가진 강함은 그녀의 주인인 내가 잘 알았다.

내가 여태 만나 본 드라이어드 중 그녀에게 대적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최근에 얻게 된 나의 새로운 스킬을 곧바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저게 필드의 가디언이라면 분명….

핸드폰이 금색으로 빛나며 화면에서 크로스 헤어가 있는 둥근 뷰파인더 스크린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메스키트를 포착했을 땐 붉은 점이 한 개만 반짝였는데, 지금은 수십 개가 넘는 작은 붉은 점이 빼곡히 화면을 채웠다. 10그루를 나타내는 필드의 가디언 수를 훌쩍 넘었다.

내 발밑은 물론 온 사방에 무언가가 있다고 스크린은 경고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 눈앞에 보이는 드라이어드는 분명 하나, 하지만 스크린에 나타난 표시는 하나 이상.

신전에 들어선 순간부터 미로 속에서 우릴 혼란스럽게 만들던 수십 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환청이나 속임수 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이라고….”

내 말에 실새삼 드라이어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럼 넌 전대야? 아니면 현대야?”

메스키트는 긴 세월 속에 전대에게서 현재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데저트 필드는 세대교체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다른 가디언들의 사정은 어떨지 모르나, 멸망을 기점으로 가디언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면 저 실새삼이 교체 없이 가디언의 자리를 오랫동안 영유하고 있는 것이 좀 이상했다.

“그런 말은 내게 무의미하지. 난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나일 뿐이다.”

세대교체가 없었다고? 그럼 몇백 년을 산 드라이어드라는 거야? 가디언 드라이어드는 모두 다 그런 걸까? 어떻게 드루이드가 없는 드라이어드가 그렇게 긴 수명을 가질 수 있지? 아니 드루이드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그렇게 오랜 수명을 가질 수 있다고?

잠깐… 만약 내가 환각 속에서 본 인물이 멸망을 불러온 그 드루이드라면…. 정말 영생을 사는 데 성공했다는 건가? 지금 어딘가에 그 드루이드가 살아 있는 건가?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들이 떠오르며 날 괴롭힌다.

“시들링, 방금 내가 한 말을 들어서 알겠지만 저건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이야. 메스키트와 같은 위치라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메스키트만큼 강하다. 아니 어쩌면 살아온 세월로 따지면 메스키트보다 강할 수 있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 중 가장 강한 듯한 벨라돈나가 속절없이 아티팩트로 물러갔던 걸 떠올리면 그 실력은 이미 증명된 거나 다름없었다.

“주의하겠다.”

시들링은 내 말에 검을 고쳐 쥐었다.

당장 메스키트를 불러와 맞붙여도 승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저 드라이어드를 공략하려면 우리 둘만의 힘으로 해내야만 했다.

비장한 각오로 검을 든 우릴 보며 실새삼이 실소를 머금었다.

“어린 드루이드여, 오해하는 것이 있군.”

그는 한 손은 뒷짐을 쥔 채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등을 곧게 세운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손짓 하나하나에 우아함이 가득했다. 마치 서양 배경의 귀족을 보는 듯했다. 파필리온이 공식 석상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저 드라이어드의 발끝도 못 따라갈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 대부분의 능력은 네가 판단한 것처럼 식물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너희들을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릴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 곤란하지.”

거대한 구멍 건너편에 있던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이런 미친, 순간 이동을 쓸 줄 아는 드라이어드라니! 시들링이 반사적으로 검을 세워 막자 둔탁한 소리를 내며 실새삼의 팔이 그 위를 내리쳤다.

그가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몸 자체가 무기인 듯했다. 공격한 그의 팔엔 여러 겹 휘감긴 노란 줄기가 금속 선처럼 날카로운 광택을 내고 있었다.

시들링의 검을 박살 내 버릴 기세로 실새삼이 팔을 망치처럼 쾅쾅 내려쳤다. 시들링은 좀처럼 반격을 할 엄두도 못 내고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나는 시들링을 보조하고자 실새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에게 내 검이 닿는 일은 없었다.

까드득.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그의 팔을 감은 것과 같은 광택 나는 노란 줄기가 내가 노린 등에서 뻗어 나와 허공에서 내 검날을 휘감았다.

탁한 밀빛의 눈이 날 노려보았다. 공격당하겠다고 느끼자 내게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기라도 한 것인지 순간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총을 꺼내 대뜸 그의 얼굴을 향해 탄환을 발사했다.

퍽, 하는 투박한 소리가 들리더니 아왜나무의 힘이 담긴 탄환이 실새삼의 얼굴에 적중했다.

검은 잡아당겨도 철사에 칭칭 엉킨 것처럼 꼼짝을 않기에 내버려 두고 그에게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케이크의 생크림 같은 하얀 액체가 거품을 내며 실새삼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거품이 조금씩 걷히며 흠뻑 젖은 그의 머리칼 사이로 분노가 가득 담긴 눈이 드러났다.

시발, 저 새끼 열받았어.

시들링을 크게 밀어낸 그는 대뜸 나로 타깃을 바꿔 날아왔다.

내게 시들링처럼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낼 힘은 없었다. 심지어 빼앗겼던 검은 꽈드득, 하는 기이한 소리를 내더니 사로잡힌 줄기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 아, 저거 시들링이 빌려준 건데!

하지만 거기에 마음 썼다간 다음 두 동강이 나는 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쿵! 쿵!

내가 피할 때마다 실새삼의 팔다리가 곡괭이처럼 내가 섰던 땅을 찍었다.

허리가 두 동강 나는 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동강 나게 생겼다.

“악! 괴물 같은 새끼!”

데이지처럼 날렵하고 요령 있게 피하는 건 못하니 죽자 살자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시들링이 바짝 따라와 견제를 하려 했으나 실새삼은 공중에서 시들링의 검을 피하며 날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당황하는 바람에 발이 꼬여 엎어졌는데 오히려 그 덕에 운 좋게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난 한 대만 맞아도 저 세상이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러다 머리 위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엎어진 날 노리고 야수 같은 얼굴을 한 실새삼의 시선이 쏘아지고 있었다.

미친, 그깟 타격도 없는 탄환 한 대 맞은 게 뭐가 그리 화가 나는데!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러 피했는데 하필이면 그곳이 바다로 직행하는 구멍이었다. 오른손잡이는 자동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반응한다더니, 이론대로 내가 스스로 무덤으로 빠질 줄이야.

“제이!”

“언니!”

날 부르는 목소리에 떨어지는 순간에 오른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았다. 다행히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아 바다로 떨어지는 것은 면했다. 아래가 물이라 해도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정면을 봤을 때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삼켜야만 했다.

눈앞에 노란 줄기에 꽁꽁 싸인 시체 같은 드라이어드의 얼굴이 존재했다. 땅속에 광물처럼 박힌 그것은 내가 정신만 따로 떨어져 본 환각 속의 그 모습과 똑같았다.

“허억… 허억….”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숨도 쉬기 힘들었다. 알싸하고 눅눅한 풀과 낙엽 냄새가 지척에서 느껴졌다.

주먹 하나 정도 되는 간격에서 마주하고 있는 드라이어드는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갑자기 눈을 떠 죽은 생선과 같은 허연 눈깔을 도르륵 굴려 나와 마주했다. 갑자기 손에 힘이 빠져 생명 줄처럼 잡고 있던 돌부리를 놓치고 말았다. 심장 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무서웠다.

“데이지!”

그 이름을 외침과 동시에 허리에 줄기가 감겼다. 웩하고 토할 것처럼 배를 조이는 고통이 따랐다. 떨어지던 난 데이지의 줄기에 묶여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멈춰 섰다. 벽에 단검을 박아 넣은 데이지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우, 살았다….

드라이어드를 소환해선 안 되지만 당장 내가 죽을 위기인데 어떻게 그래.

데이지가 줄기의 반동을 이용해 날 위로 던져 올렸다. 그녀는 동시에 내 옆으로 뛰어올랐는데, 거대한 몸체 하나가 더 그 옆을 나란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데이지와 함께 나타난 인영은 엄청난 속도로 실새삼을 향해 쏘아졌다. 큰 소리가 나며 구멍의 가장자리 한쪽이 베어 문 치즈처럼 완전히 날아갔다.

랜스로 실새삼의 어깨를 완전히 뚫어 버린 메스키트가 야차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흐흐…. 너… 나와 동류군.”

실새삼에게 엄청난 타격을 준 것은 놀라운 일이었으나 그에게서 거미줄처럼 뿜어 나온 줄기가 메스키트의 팔다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저건 벨라돈나와 바곳에게 했던 것처럼 흡혈을 쓸 것이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안 돼… 메스키트가 능력을 뺏기면….”

가디언에게 가디언의 능력이 흡수당한다. 그건 재앙이었다.

메스키트가 단순 공격 외에 무슨 능력을 쓴 거지?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메스키트는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블루 멜로우처럼 재빠르게 아티팩트로 돌아간 것이었다.

“하하하!”

실새삼이 뚫린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데이지가 지키고 있는 날 보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그거구나? 순례자. 그래, 그런 이름으로 불렸던가?”

그는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끊임없이 웃어 댔다.

“아하하! 네가 있다는 건 내 주인의 세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거지? 응? 내 드루이드가 살아 있는데 고작 너 같은 것이 내 주인과 같은 길을 걷고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고작 너 같은 것이 말이야.”

그는 웃고 있었지만 엄청나게 기분이 나빠 보였다.

“끝났다라…. 정말 죽었나 보군….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제 알 수 있었다. 내가 환각 속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세계를 멸망시켰던 그 드루이드였다는 것을. 그렇다면 난 정말로 과거를 본 거구나.

그런데 기분 나쁘네. 왜 날 보고 고작이라는 거야?

“뭐, 죽었다면 다시 살리면 된다. 숙주만 있으면 되니.”

웃음을 멈춘 그의 눈빛이 소름 끼치게 변했다.

“마침 여기에 좋은 재료도 있고. 성별이 바뀌는 정도는 내 주인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 말뜻을 단번에 이해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날 어쩐다고?

시들링의 공격을 떨쳐 낸 실새삼이 다시금 날 노리고 날아왔다. 데이지가 움직이려고 했으나 땅에서 돋아난 줄기가 그녀를 칭칭 감았다.

그녀는 흡혈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끝까지 날 지키려고 했지만, 빠른 몸놀림이 자랑인 데이지의 특기가 완전히 막혀 버려서 실새삼의 공격에 바로 반응할 수 없었다.

여태 공격을 피하기 위해 숨 가쁘게 뛰어다닌 나는 전처럼 움직이기엔 체력이 달렸다.

구멍에 빠졌다가 구출되면서 겨우 살았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도 확 풀려 버린 상태였다.

눈앞까지 다가온 실새삼의 주먹이 바위처럼 크게 보였다.

“멈춰!”

살기 위해 외쳤다. 그 순간 부릅뜬 눈이 지끈거렸다. 실새삼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거짓말처럼 그가 뚝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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