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5화 (225/604)

“이건 하나의 시련이야. 드라이어드들이 곁에 없으면 적은 공격을 못 해. 사방에서 뿌려지는 저 이상한 액체들? 드라이어드가 없으면 애초에 발동하지 않을 테니 없는 게 오히려 우리에게 더 안전할 거야. 이제 디버프를 해제해 줄 바곳은 없어. 그렇다면 만약 공격을 얻어걸린 나와 시들링은 이제 누가 깨워 줄 건데?”

내게 단델리온의 파나케이아가 한 병 더 있었다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 텐데.

“만약 메스키트가 무의식적으로 날 보호하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면?”

그녀에겐 공격을 무조건 3번은 막아 줄 수 있는 사기적인 실드 스킬이 존재했다. 그게 적에게 넘어가면 어떠한 결정적인 공격을 날리든 3번까지는 아무런 대미지도 입히지 못한다.

“만약… 마거리트가 날 위해 또다시… 예언의 힘을 사용해 버려서 위기를 벗어나려 한다면?”

마거리트는 내 죽음을 예언하고 미리 행동했다. 예언의 힘이 적에게 넘어가면 이길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만약 공격을 되풀이할 수 있는 데이지가 잡히기라도 한다면….”

흡혈하는 줄기가 뻗어져 나오는 타이밍과 위치를 아무도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없다. 막을 수 없는 스킬이 존재하지 않는 한 페널티는 뻔했다.

드라이어드의 능력이 강하고 희귀하고 특별할수록 전투에 불리했다. 다른 전투에선 이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나 지금 상황에선 완전히 역효과를 내고 있었다.

“제이님.”

모두가 격렬하게 반응할 때 조용히 있던 데이지가 나를 불렀다.

“전 제이 님을 믿어요.”

그녀는 모든 드라이어드 중 유일하게 내 의견을 동의해 준 드라이어드였다.

“제이 님을 믿는 건 수많은 시련을 견뎌 냈기에 제가 이곳에 있을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이 님은 모든 순간에서 절 믿어 줬어요. 그러니 이제 제가 제이 님께 믿음을 보여야 할 때에요. 그러니… 꼭 이기셔야 해요!”

진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하던 데이지는 마지막에 환한 웃음으로 내게 용기를 주고 곧바로 아티팩트로 돌아가 버렸다. 그 모습에 모든 드라이어드가 입을 다물었다.

“제이… 난 항상 당신에게 내가 온전히 믿음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곧 깨져 버릴 것처럼 위태한 살얼음판 같은 긴장을 유지하던 메스키트의 분위기가 탁 풀려 버렸다.

“난 메스키트를 항상 믿어.”

“하지만 저보다 한참 늦게 태어난 드라이어드마저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믿음을, 전 해내지 못했군요. 오랜 세월을 살아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 제가 그걸 못 해냈어요. 그래요. 전 확실히 당신을 위해 세상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것만큼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없을 텐데. …모든 것은 나의 ‘세계수’의 뜻대로.”

메스키트가 날 땅에 내려 주었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다시 곁을 지킬 거예요.”

메스키트는 정말 힘겹게 말을 마쳤다. 그녀의 눈엔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지만 결국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물론 내게 찰싹 붙어 있던 마거리트의 팔을 끌고 강제적으로 함께. 먼저 아티팩트로 송환된 바곳까지, 내 주위엔 단 하나의 드라이어드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내 드라이어드들이 이런 행동을 벌이니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도 결국 내 제의를 다시 판단해야만 했다.

그리고 괴물의 공격이 연이어 터졌다. 하지만 내 근처는 전보다 확연히 피해가 줄었다. 내가 느려터진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모두 피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드라이어드들이 오래 머물수록 오히려 드루이드들이 더 위험해져.”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 봐, 내 말이 맞았잖아.

“만약 시들링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당신을 평생 원망할 거예요.”

“칼미아!”

시들링이 분노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 드루이드예요! 소중한 우리의 드루이드라고요!”

“난 아직도 너희가 돌봐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다. 내 판단의 책임을 그녀에게 전가하지 마. 이건 오로지 나의 생각으로 내가 내린 판단이다.”

“아냐! 넌 현혹된 거야. 네가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리가 없어!”

“칼미아, 적당히 해. 시들링은 묘목 드라이어드가 아니야. 언제까지 그의 버팀목으로 있을 예정이야? 초대(初代) 메인이 이걸 원했을 것 같아?”

내 의견에 부정적으로 반응했던 페리윙클이 칼미아를 향해 날카롭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칼미아는 쉽사리 진정하지 못했다. 괴물이 몸부림치듯 연이어 벌인 공격이 그녀를 몰아붙인 것처럼 보였다.

항상 시들링의 모든 행동에 참견했던 칼미아의 반응이 떠올랐다. 드라이어드들의 과잉보호가 시들링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고치지 못했던 그의 드라이어드들의 태도.

결국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은 선두로 움직인 페리윙클에게 억지로 붙잡힌 채 아티팩트로 돌아가며 모두 자리를 뜨게 되었다.

마침내 시들링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괴물의 공격이 모두 멈췄다. 주변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괴물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내 판단이 괴물에게 말도 못 할 만큼 조바심을 느끼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국 드라이어드를 모두 돌려보내야 하는 기믹이 맞았음을 뜻하겠지.

그런데 막상 내 드라이어드들이 곁에 없으니 위축되고 심장이 빠르게 뛰며 불안함이 온몸을 잠식해 오긴 한다. 내 든든함과 자신감의 원천은 결국 내 드라이어드들이었기에, 나 역시 그들에게 아주 많이 의존하고 있었음을 다시 돌아봐야만 했다.

“믿어 줘서 고마워.”

“드루이드인 너의 판단을 믿은 것이다. 나 역시 예전처럼 너를 같은 드루이드가 아닌 묘목으로 생각했다면 결코 네 의견을 듣지 않았을 거다.”

그는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이 널 만나기 전까지의 내 모든 행적이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인 판단을 받게 만들었다. 내가 너의 곁에 있기 위해선 그걸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이 발전했네.”

내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건넨 대화였지만 시들링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과잉보호하는 드라이어드들을 떨쳐 내고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젠 모두가 피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의 곁엔 우린 길드원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 쓸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는데.”

난 죄를 고백하는 심정으로 착잡하게 총을 들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막상 드라이어드들을 돌려보내긴 했지만 내가 전투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뛰어난 건 쟤였다.

드루이드의 전투 능력이 필요한 순간이었지만 난 그동안 훈련을 한다거나 딱히 뭘 한 것은 아니기에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아마 로웰라가 나보다 레벨은 낮아도 사람 대 사람으로 놓고 보면 강하지 않을까? 걘 막대기 같은 거 휘두르던데.

내게 남은 건 무한으로 증식하는 다이아뿐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당장 특정 게임처럼 이걸 돈 던지기 스킬처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내 드라이어드와 다이아에만 의지하긴 했구나.

내 말에 시들링은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작고 낡은 검을 하나 꺼내 주었다.

“오….”

근력이 달리는 내가 들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살짝 휘둘러 보았는데 꽤 쓸 만했다.

“내가 어릴 때 수련하던 검이다.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 갖고 있도록.”

“고마워.”

검에 묻은 손때가 얼마나 그가 열심히 이 검으로 수련했는지 보여 주었다. 이러니 더욱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 정말 여길 나가면 열심히 수련할 거야.

공격이 없자 우리는 어려움 없이 신전의 미로를 통과했다. 전처럼 가로막힌 벽이 나타나자 시들링이 메스키트가 했던 것처럼 모두 박살 냈으나 적에겐 일말의 반격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그곳은 공중 정원 꼭대기의 정중앙이었다. 미로를 모두 헤치고 나오자 우리가 빠져나온 미로 외에도 여기저기 비슷한 미로가 더 존재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공간의 가운데엔 밑도 끝도 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거대한 구멍도 존재했다. 짙은 어둠이 가득해 끝을 볼 수 없었는데 별안간 음산하게 윙윙대는 바람 소리가 용솟음치며 옅은 파도 소리까지 싣고 왔다. 아랜 바다까지 뚫려 있는 무저갱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무너진 계단을 통하지 않으면 로웰라를 옮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바로 바다로 뚫리는 구멍이라니.

“로웰라!”

공중 정원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멍이 있다는 것보다 결국 짭신 엘더의 말이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정말 저 아래로 로웰라를 던져 버린 거면 어떡하지? 불안함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언니!”

더는 들을 수 없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거대한 구멍 아래에서 들리는 로웰라의 목소리가 순간 환청인 줄 알았다.

“아래 사람이 있다.”

“언니! 구하러 와 줬구나!”

놀랍게도 구멍이 일직선으로 쭉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뚫린 공간이 있었나 보다. 그 한쪽에 로웰라가 양손과 발이 결박된 상태로 위태하게 얼굴을 내밀고 날 부르고 있었다.

“조심해!”

내가 해야 할 말인데 로웰라가 대뜸 내게 소리쳤다.

“확실히 어엿한 드루이드는 머리가 빨리 굴러가는군. 드라이어드들을 모두 돌려보낼 줄이야. 정말 그것들처럼 성가신 존재들이야.”

미로 속에서 우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목소리가 거대한 구멍 반대편에서 들렸다.

완전히 쓸어 넘긴 밀빛의 거친 머리칼과 동색의 눈, 새하얀 피부, 그리고 눈밭에 떨어진 핏방울처럼 대조적인 새빨간 입술이 눈에 띄는 남성형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정장과 망토가 고전 영화에서 보던 뱀파이어를 떠올리게 했다.

저 드라이어드가 바로 괴물의 정체였다.

“나의 사랑스러운 엘더는 어디에 있지?”

사랑스러운 엘더? 내가 여태 봤던 드라이어드들 중 눈빛이 완전히 맛 가 버린 것처럼 썩은 드라이어드는 저놈이 처음이었다.

확실히 정상적인 드라이어드는 아닌 것 같았다.

“언니! 드라이어드를 꺼내면 안 돼! 내 엉겅퀴가 완전히 당했어!”

로웰라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그녀는 엉겅퀴의 희생으로 뒤늦게 괴물을 상대할 공략을 알아차린 듯했다.

로웰라에게 시선을 잠시 뺏겼다가 드라이어드를 다시 바라보았을 때, 갑자기 두통과 함께 눈이 시큰거렸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주변의 색상이 오래된 필름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누렇게 변했다. 그리고 노이즈가 낀 것처럼 어지럽게 사물이 흔들렸다.

내가 다른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정신만 땅굴 속으로 끌려 들어갔을 때와 달랐다.

마치 내 눈에 다른 렌즈를 덧입힌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바라보는 구멍 반대편의 드라이어드 옆엔 어느새 후드를 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유령처럼 나타나 서 있었다. 괴물 드라이어드는 갑자기 그 사람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세상을 지배할 당신을 위해….”

괴물 드라이어드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우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보다 비교적 맑고 깨끗했다.

“그날을 기다리겠다, 위대한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 실새삼이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동시에 눈을 감았다 뜨자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무릎을 꿇었던 모습과 달리 드라이어드는 여전히 처음 봤을 때처럼 곧게 서 있었다.

내가 바라본 광경에 잘못 끼워진 필름의 한 부분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 필름의 정체는 뭐지? 혹시… 과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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