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드라이어드의 힘을 흡수해서 사용하는 드라이어드라…. 어쩌면 단순하게 생각하면 바로 답을 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꼬리겨우살이, 다른 나무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식물. 롬가토가 내게 만들어 준 탄환이 기생 식물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쩌면 괴물이 그와 같은 기생 식물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괴물의 정체는 드라이어드야. 그것도 기생 식물 드라이어드. 메스키트, 시들링, 혹시 예상 가는 드라이어드 없어?”
드라이어드의 큰 특징인 꽃을 봤다면 바로 답이 나왔겠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건 흡혈을 할 때 사용하던 노란 줄기뿐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종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둘이라면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기생 식물이라…. 수많은 기생 식물을 알고 있지만 어째서 하나를 특정할 수 없는 걸까요?”
메스키트가 그녀답지 않게 난처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모른다는 얼굴이라기보단 뭔가 탐탁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잘 모르겠다. 바이오 필드의 식물들은 좀처럼 만나기 힘드니까.”
시들링 역시 답을 내지 못했다. 어쩐지 무척 시무룩해 보였다.
“보통 세계수에서도 다들 바이오 필드 드라이어드들과는 잘 어울려 놀지 않으니 정보가 적긴 해요. 남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종들이다 보니 다들 껄끄럽게 여겨서…. 그래서 시들링이 들은 것이 적을지도 몰라요.”
칼미아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녀가 불쑥 끼어든 타이밍이 마치 답을 하지 못한 시들링을 감싸기 위해서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바이오 필드라…. 처음 듣는 자생 필드였다. 기생 식물은 다른 식물을 숙주 삼아 살아가니 생명과 연관된 바이오가 붙는 걸까?
칼미아의 말을 들으니 세계수 내에 파벌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이야기는 예전 카나비스 때도 들었다. 인간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마약성 식물들이 세계수 내에서 좋지 못한 여론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경우는 드라이어드가 아끼는 드루이드인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싫어한다면, 기생 식물의 경우는 드라이어드 자체에게 해를 끼치니 싫어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기생 식물이란 걸 알게 된 이상 상황은 좋지 않아요. 그들 중 상당수가 피어난 곳의 식물들을 모두 고사시킬 때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에요. 물론 공존을 꾀하며 이득을 주는 종도 있지만 그런 종이었다면 이런 짓을 벌이진 않았겠죠?”
메스키트가 냉담하게 판단을 내렸다. 우리의 말이 기분이 나빴던 걸까? 다시 한번 사방에서 공격이 이어졌다. 시들링은 결국 피해가 누적된 벨라돈나를 아티팩트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연이어 이어진 공격 속에서 난 아주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럼… 바꿔 생각해 보면 식물이 없으면 어떻게 돼?”
“그들에게 식물은 필드 그 자체이니 살아갈 수 없죠.”
나는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드라이어드 힘이 응축된 탄환을 사용할 수 있는 내 유일한 무기였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건 장착된 아왜나무의 투척용 소화기나 다름없는 탄환이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드라이어드는 식물이지?”
“본체가 식물이나 다름없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그럼 드라이어드가 없으면 저 괴물의 목표도 사라지겠네.”
“‘드라이어드가 없다면’ 이라뇨?”
메스키트가 불안하다는 눈으로 나와 내가 꺼낸 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괴물을 잡기 위해선 그녀의 불안이 극대화되더라도 해야만 했다. 이것은… 어쩌면 ‘기믹’이었다.
인간은 드라이어드보다 한참 약하다.
내가 괴물의 공격 속에서 느낀 위화감은 그것이었다. 예전이라면 정신이 없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넓어지고 좋아진 시야 덕에 그 위화감을 잡아 낼 수 있었다.
드라이어드보다 한참 약해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 드루이드가 이처럼 사방에서 난무하는 공격 속에서 안전하기란 어려웠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노란 줄기는 마음먹는다면 언제든 나와 시들링을 제일 먼저 노려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린 아직까지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상한 액체가 피아 구분 없이 사방에서 뿌려졌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들의 드라이어드들이 희생해서 액체를 전부 맞아 지켜 낼 수 있었던 것도 애초에 분사 목표가 드라이어드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과거에 섬에 내려졌던 저주라든가 31번째 테라리움 일대를 강타했던 괴소문의 주체는 식물이었다.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었다곤 해도 먹고살 식물이 없어서 피해를 입은 것이지, 사람들이 말라 죽었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괴물이 만약 섬의 모든 생물을 볼모로 삼고 있다면 가장 쉽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말려 죽이는 것인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내가 땅굴에서 보았던 수많은 빛들 중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괴물은 식물만 공격할 수 있어.”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괴물을 공략하기 위해선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드루이드가 필요했다.
“식물이 아닌 나와 시들링을 공격할 수는 없어. 그래서 지금은 드라이어드가 나설 때가 아니야.”
“말도 안 돼요.”
“그건 너무 위험한 생각이에요.”
다들 내 말에 적잖게 반론을 던지거나 부정적 의견을 표했다.
“확실한가?”
하지만 시들링만큼은 진중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내 이론에 확신을 가져도 될까? 하지만 감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의 입장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드루이드를 지키며 적을 무찌르기 위해 존재했다. 그들이 전투 상황에서 필요 없다는 말은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며, 어쩌면 난생처음 듣는 말일지도 몰랐다.
만약 <테라리움 어드벤처> 게임이 드루이드의 레벨을 제외한 스펙과 상관없이 오로지 영웅 캐릭터인 드라이어드만 키우는 게임이었다면 모든 콘텐츠에 드라이어드의 공격력이 필수인 게임이라 생각했을 거다.
실제로 대부분의 영웅 수집 게임이 게임 내 모든 콘텐츠에서 영웅들만을 내세워 클리어하는 식이었다. 영웅들이 모두 죽으면 전투는 끝나는 거다. 출전의 주체이자 영웅 캐릭터를 지휘하는 로드 캐릭터는 전투에서 그저 조작을 하는 유저를 상징적으로 나타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부가적으로 드루이드의 스펙도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강해질수록 드라이어드도 강해지지만 내가 좋은 장비를 입는다면 나 역시 강해지고, 무기를 쓸 수 있었다. 더 단련된 시들링이나 이리스 파티의 드루이드들은 직접 전투에 뛰어들기도 했다.
분명 내가 한 게임 중 몇몇은 로드 캐릭터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전투의 승패에 관여하기도 하고, 영웅이 모두 살아 있으나 로드가 죽으면 전투가 끝난다든가 로드 캐릭터만 참가할 수 있는 1:1 PVP 경기 시스템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니 <테라리움 어드벤처>가 그 소수의 게임에 해당할 수 있고, 로드 캐릭터의 전투 능력이 현재 보스인 괴물을 공략하는 데 필수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결국 <테라리움 어드벤처>는 게임이니까 이게 맞을 거야.
“확신해. 시들링, 드라이어드들을 모두 아티팩트로 돌려보내. 메스키트, 데이지, 바곳, 마거리트, 너희도 모두 아티팩트로 돌아가. 우리가 직접 괴물을 잡으러 가자.”
내 말에 괴물은 위기를 느낀 것일까? 다시 한번 공격이 이어졌다.
바곳은 줄곧 디버프 해제 스킬을 끊기지 않게 유지하며 안간힘을 쓰다 두 다리가 노란 줄기에 완전히 감겨 버렸다. 그를 당장 아티팩트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었다.
만약 지금 이곳에 엘더가 있었다면, 흡혈 능력에 대항할 수 있었을까?
이어진 공격과 바곳의 리타이어 때문에 우리의 드라이어드들은 더욱 격렬하게 내 판단에 저항했다. 내가 그 공격을 통해 확신을 얻은 것과 달리 드라이어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위험한 전투 속에서 드루이드를 지킬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아티팩트로 돌아가야 한다니. 특히나 드루이드를 끔찍이 생각하는 우리의 드라이어드들에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일 테다.
“너의 판단을 믿겠다. 모두 아티팩트로 돌아가라.”
“시들링!”
“저건 너무 멍청한…. 위험한 판단이야!”
칼미아가 나를 보고 멈칫했지만 다시 소리쳤다.
“지금처럼 네가 저 드루이드를 신뢰하는 것이 애석하게 느껴질 때가 없었어! 네가 그토록 바라던 인간관계보다 너의 목숨이 더 중요한 거야!”
“왜 그렇게 아둔한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안 돼, 내 진리, 여긴 너무 위험해. 내가 대신… 대신할게. 진리를 혼자 둘 수 없어. 제발 진리에게서 날 떼어 놓지 마.”
마거리트가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울먹였다. 그녀가 대신하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에 심장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물기 젖은 눈을 보니 마음 한쪽이 약하게 흔들렸다. 내가 정말 잘못 생각한 걸까?
“내 주인, 제이. 저 역시 제이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어요.”
항상 나를 지지해 주던 메스키트마저 내 의견에 반대했다. 예전에 엿봤던 그녀의 짤막한 과거는 물론 나를 대하는 태도들을 볼 때 메스키트가 얼마나 주인에게 강하게 집착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내린 판단이 그녀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지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더 강해질게. 내가 더 강했어야 메스키트가 안심했을 텐데. 앞으론 말뿐만 아니라 정말 노력할게.”
“그런 말이 아니에요. 당신을 지키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이자 신념인데 그걸 저버리라니…. 왜 제게 그토록 잔인한 판단을 강요하시는 건가요? 당신을 두고 갈 수 없어요.”
하지만 메스키트가 나를 지지해 주던 이유는 그녀가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얼마든지 위기 시 개입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걸 지금의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오롯이 드루이드로서 강해져야 해.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는 건 이걸 의미하는 거였어. 내가 나 자신에게 져서 잘못된 판단을 하면 세상의 결말은 또 멸망뿐이야. 메스키트가 그랬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나를 위해 전대의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지금의 메스키트는 똑같은 행동을 할 것 같아.”
“제이!”
“지금의 메스키트는… 내 영생을 바라며, 나의 목숨을 세계의 모든 것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전대의 행동을 반복할 거야. 그것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든. 그게 내가 드라이어드 없이 홀로 설 수 없다는 걸 보이고 있기 때문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필드의 규율을 어길 만큼 드루이드가 너무 소중해져 버린 가디언 드라이어드들의 말로(末路).
당장 내가 내 드라이어드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예정된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