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대하는 건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어디서 어떤 공격이 오는지 모르니 방비가 거의 불가능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원래 약점 큰 놈이 숨어 있는 거거든!”
“나는 모든 곳에 있다.”
또다시 수십 개의 목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동굴 속에서 음성이 울리는 것과는 달랐다. 신전은 하늘이 보였기에 동굴이라 보기에도 힘들었다.
“블루 멜로우는 왜 바로 아티팩트로 돌아간 거지? 치료를 받을 시도도 하지 않았잖아.”
내 물음에 시들링이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반응이 없다. 안에서 휴면 상태인 것 같군.”
“잠든 거야? 그런데 분명 저 녀석이 블루 멜로우보고 눈치가 빠르다고 했지….”
블루 멜로우가 뭔가를 눈치챘고 바로 아티팩트로 돌아간 것이 좋은 판단이었다는 건가?
“벽에서 떨어지라고도 했어.”
우린 최대한 벽에 붙지 않게 통로 중앙으로 모였다. 하지만 미로처럼 길을 꼬아 놓은 탓에 사방이 벽이었다. 차라리 벽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며 메스키트가 크게 랜스를 휘둘렀다. 식물로 만든 토피어리 벽이든 돌벽이든 도미노처럼 뭉텅뭉텅 박살 나 공간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벽을 전부 박살 내는 것이 해답인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노란 줄기가 감긴 블루 멜로우의 손목이 바짝 말라 있던 것을 보면…. 설마 흡혈인가?
도난 사건과 더불어 31번째 테라리움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식물 흡혈귀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군락지 하나를 말려 죽였다는 소문과 섬 하나를 통째로 말려 죽였다는 소문.
혹시 식물 흡혈귀와 괴물이 동일 인물인 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전부 공격하면 된다.”
메스키트를 거들어 벽을 부수던 시들링이 결국 벨라돈나를 불러왔다. 광범위 공격에 특화된 그녀가 손을 올렸다. 검은 안개가 진득하게 땅을 따라 흘렀다. 검은 안개는 가로막힌 곳은 틈새를 찾아 비집고 흘러 들어갔다.
그녀의 공격이 성공적이라면 나도 바곳에게 같은 공격을 지시할 생각이었다.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벨라돈나의 공격이 먹힌 건가?
“이런.”
갑자기 벨라돈나가 공격을 멈추고 한 발을 들었다. 그녀의 오른쪽 다리에 어느새 노란 식물의 줄기가 칭칭 감겨 있었다. 다리를 올리니 줄기가 늘어나는 치즈처럼 죽 딸려 올라갔다. 메스키트가 나를 붙잡고 벨라돈나와 멀리 떨어뜨려 놓으며 방패를 들었다.
“시들링, 방비하거라. 느낌이 좋지 않구나.”
벨라돈나가 다급하게 검은 안개를 다시 손으로 불러들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매서운 눈이 상처 입은 맹수처럼 반쯤 감겨 있었다.
노란 줄기는 빠르게 조여 들어갔다. 그녀의 다리는 부츠에 감싸여 있었으나 전면이 헐렁해지고 있었다. 블루 멜로우처럼 줄기와 접촉한 부분이 말라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벨라돈나가 공격당하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어!”
총성이 두 번 터지고 칼미아가 다급하게 벨라돈나의 다리를 옥죈 줄기를 끊어 내며 말했다.
“주위에 사람이나 드라이어드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메스키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시들링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접근하는 대상을 가장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둘이 지척에서 벨라돈나가 공격당할 동안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물론 알았다면 블루 멜로우가 공격당하기 전, 바로 방비했을 것이다.
“시들링, 내게 같은 공격을 되풀이하는 걸 명령하지 말렴. 이건 충고란다.”
“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존재하나?”
“내 독은 분명 통했단다. 독에 면역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아니야. 물론 면역이 없는 상대에게 오랫동안 공격하면 필히 내가 이기겠지만 이건 느낌이 다르단다….”
벨라돈나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그녀는 감기려는 눈을 힘주어 뜨며 이를 악물었다.
“내게서 체액과…. 독을 빨아들였어. 일부러 독을 빼 간 것이 느껴졌단다.”
그때였다. 벽과 땅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벨라돈나가 내보낼 때와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다. 이건 꼭 적이 벨라돈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컥….”
카돈이 목을 부여잡고 무기를 땅에 꽂았다.
“바곳!”
메스키트가 곧바로 날 끌어안아 들고 바곳을 불렀다. 바곳은 반사적으로 스태프를 올리고 디버프 해제 스킬을 사용했다. 산약초 향이 파도처럼 퍼져 나가며 검은 안개를 빠르게 걷어 냈다.
바곳이 중독을 풀어낸 것은 아주 금방이었는데 그 잠깐 사이에도 여럿이 피해를 받아 끔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독을 지닌 두 드라이어드를 제외하고 멀쩡한 꼴을 한 드라이어드가 없었다.
시들링은 괜찮은지 돌아봤더니 놀랍게도 벨라돈나가 그의 멱살을 잡아 땅에서 발을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급한 대로 반응한 것처럼 보였다. 시들링… 참 거칠게 자랐구나.
벽은 물론 땅도 위험했다. 하지만 벽은 피할 수 있지만 땅은 하늘을 날지 않는 한 반드시 디뎌야만 했다.
메스키트는 아예 날 땅에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지, 내가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게 해 버티기 편하게 만들었다.
“고마워.”
자세가 너무나 다정한 연인의 포옹과 똑같아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잘 붙잡고 있으세요. 아무래도 제이는 제게서 떨어뜨려 놓아선 안 될 것 같군요.”
“제가 줄기로 감아서 들고 있을까요?”
“데이지는 언제든지 공격하러 나가야 할 수 있으니 제가 낫답니다.”
여기에 엘더가 있었다면 걔도 저 대화에 꼈을까?
“벨라돈나의 공격을 당한 적은 이런 기분이구나….”
“같은 팀이라 다행이야.”
칼미아와 페리윙클이 얼굴을 문지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어째서 벨라돈나의 공격을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거지?”
“이래선 섣불리 공격하기도 애매한데.”
공격 반사? 설마 게임에서 딜러진을 공포로 몰아넣는 그 악독한 공반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내가 아는 공격 반사 스킬과는 좀 달랐다. 공격 반사는 일정 시간 동안 공격받은 대미지를 그대로 되돌려 줘서 강제로 딜을 멈춰야 하는 스킬이었다. 즉 대미지 반사가 더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게 맞다면 메스키트나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벽을 부수거나 노란 줄기를 공격했을 때, 그들이 똑같이 대미지를 입어야 했다. 하지만 이건 벨라돈나의 공격을 똑같이 따라 했다. 거기다 위력이 절감되지 않고 그대로 들어왔다.
이건 스킬을 ‘훔쳤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흡혈과 기술 훔치기…. 그렇다면 노란 줄기로 인해 체액이 빨리면 드라이어드가 가진 기술까지 훔쳐 간다는 건가?
게임에선 보통 흡혈 기술이 어떻게 표현되더라? 상대에게서 흡혈한 만큼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블루 멜로우와 벨라돈나가 잠이 드는 걸 보면… 어쩌면 괴물은 정말 사기적인 흡혈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으악!”
갑자기 바곳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스태프 끝부분으로 바닥을 푹푹 찔렀다. 어느새 벨라돈나가 당했던 것처럼 바곳의 다리에도 노란 줄기가 감겨 있었다. 데이지가 황급히 줄기를 끊어 냈다. 하지만 바곳 역시 줄기가 감겼던 부위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바곳이 겁을 먹고 내게 달려와 바짝 붙었다. 그러곤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두 손으로 안경 너머 눈을 열심히 비비기 시작했다.
잠시 뒤, 엘더 플라워의 달콤한 향이 미미하게 감돌던 신전 안에 바곳의 은은한 산약초 향이 진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바곳은 이미 스킬을 끊은 상태였는데 마치 다시 사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술에 동반되는 꽃향기가 퍼지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바곳의 능력도 훔친 거야?”
“역시 능력을 훔쳤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물음에 시들링도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디버프 계열의 스킬만 훔쳐 가는 게 아니네?”
왜 디버프를 쓰지 않은 바곳의 기술까지 가져간 거지? 거기다 기술을 사용한 드라이어드에겐 귀신같이 달라붙고.
정작 가장 많이 난리를 치는 메스키트나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겐 노란 줄기를 뻗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디버프에 버프까지 흡수하다니…. 혹시 블루 멜로우가 여기 들어오면서 스킬을 사용했을까?”
“그 앤 감지가 특기이니 적을 감지하기 위해 분명 여기에 들어올 때부터 힘을 사용했을 거예요.”
칼미아가 내 물음에 답해 주었다.
“잠깐, 블루 멜로우의 능력은 단순히 적 위치를 감지하는 게 다가 아니야. 등급은 물론 저력이나 드라이어드의 여러 특기도 감지해 낼 수 있어. 제대로 힘을 쓰면 약점까지 알아낼 수 있고.”
옆에서 듣던 로즈우드가 심각한 목소리로 칼미아의 말을 이어받았다.
“만약 블루 멜로우의 스킬까지 훔쳤다면… 정말 큰일 났겠네요?”
이제 알겠다. 왜 블루 멜로우가 당하자마자 곧바로 아티팩트로 피신했는지. 단순히 방어에 가장 취약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감지 능력이 뛰어나니 적이 자신의 능력을 훔쳐 가기 전 도망친 것이었다. 그래서 눈치가 빨랐다고 한 거였어.
아티팩트로 돌아가기 전에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잖아! 물론 능력을 뺏기기 전에 황급히 아티팩트로 도망가야 하긴 했지만!
“확실해졌어요. 적은 드라이어드의 기술을 훔칠 수 있어요. 기술이 발동한 상태에서 흡혈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 조건인 것 같아요. 그리고 흡혈당하면 기운을 빼앗기기 때문에 졸음이 오는 걸 거예요.”
남이 쓴 디버프는 확정 반사시키고 남이 가진 버프는 자기도 갖는다. 완전 개사기 스킬이네! 흡혈이 공격 기술 판정이면 디버프 해제 스킬도 통하지 않을 거 아냐?
“그럼 어떡해야 하죠?”
“공격을… 하지 말아야죠? 아니 기술을 쓰지 말아야… 그럼 어떻게 전투를 하지?”
아직 노란 줄기를 통한 공격이 감지되지 않을뿐더러 아무 곳에서나 튀어나온다는 것이 문제긴 한데.
“제법 생각이라는 걸 하는구나. 하지만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조용하다 싶었더니 사방에 다시 목소리가 울린다. 얄밉게도 당연히 뭐가 틀렸는지 알려 주진 않았다.
촤악!
갑작스러운 물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차가운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산약초 향은 사라지고 지독하게 짙은 허브 향기가 액체를 타고 흘러나왔다.
허브 향? 배 위에서 선원들이 공격받았을 때 느껴지던 허브향과 같은 지독함이었다.
로웰라를 곧바로 쓰러뜨렸다는 이상한 물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