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 (221/604)

다들 배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려 달라고 당부하고 공중 정원으로 향했다.

메스키트가 세웠던 모래 기둥은 데이지의 발판 역할만 했을 뿐 이미 무너져 내린 후였고, 멀리서 공중에 덩굴로 엮어 만든 줄다리가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저 자리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떠오르니 절로 소름이 돋는다. 고소 공포증 같은 건 없었는데 이젠 생겨버린 것 같다.

“제이, 왔어요? 여긴 준비가 다 됐답니다….”

줄다리를 만들기 위해 붙잡고 있던 덩굴형 드라이어드들을 내가 온 방향으로 보내 주던 메스키트가 날 보고 놀란 눈을 했다.

“그쪽으로 쭉 가면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눈이 왜 그렇게 바뀐 거죠?”

“그냥 눈 색만 조금 바뀐 정도야….”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높은 곳에서 훌쩍 뛰어내려 우리가 있는 곳에 착지한 데이지도 날 보고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둘에게 공중 정원의 남은 계단을 올라가며 자리를 비운 사이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았다는 전설이 이렇게 증명되는군요.”

메스키트는 이젠 벽화가 사라져 버린 벽면을 바라보며 아픈 얼굴을 했다. 메스키트 이전에 필드의 가디언을 맡았던 드라이어드가 저지른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실상이 훤히 드러난 곳.

“자신의 드루이드를 위해서라….”

메스키트는 그렇게 말하며 날 바라보았다. 내 눈 색에 주홍빛이 좀 더 감돈다면 그녀의 눈 색과 비슷할 거라 했던가? 아니었다. 태양의 조각을 떼다가 붙여 놓은 듯한 강렬한 저 눈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제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제이를 위해서 전대의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글쎄…. 난 영생 같은 건 욕심 없으니까 그러지 말아 줘.”

그 드루이드와 같은 결말을 내지 않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다. 그리고 날 지켜봐 달라고 했지.

그 드루이드는 처음부터 영생을 바랐을까? 가진 것이 많게 되면 나도 그렇게 욕심내게 될까? <무한 다이아>를 떠올려 보았다. 폰에 깔린 이 게임 앱 하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살 수 있었다.

랜덤 박스도 마음껏 깠지. 하지만 나중엔 질렸어. 제한된 금액으로 한탕을 노리는 쫄깃한 기분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까.

치트 키나 다름없지. 하지만 어떠한 게임이라도 치트 키를 써서 쉽게 끝을 본 플레이보다 노력해서 끝을 본 플레이가 가장 재밌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욕심나진 않을 것 같다. 무한 다이아가 있다는 건 꽤 편하지만 이걸 놓고 죽는다고 상상해 봐도 원통하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이와 한날한시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게요.”

“에이, 내가 언제 죽을지 알고….”

한 번 정말로 죽을 뻔했던 기억이 떠오르니 갑자기 목이 턱 막혔다.

“…벌써 그런 이야기를 해. 나 죽으려면 아직 멀었어. 필드의 가디언도 이제 겨우 메스키트 하나 모았는걸. 다 모아야지.”

드루이드가 죽으면 함께 죽는 드라이어드들.

그렇다면 지금은 메스키트가 필드의 가디언이 됐으니까 결국 그 드루이드는 세상에 멸망을 불러오면서까지 영생하려던 욕심을 결국 이루지 못한 걸까?

이야기를 나누며 계단을 다 오르니 어느새 줄다리의 초입 부분에 도착했다. 이거 중간에 끊어진다거나 하진 않겠지?

“천천히 건너야 해요. 많이 흔들리면 위험할 수도 있답니다.”

저걸 나 혼자 건너야 하는 건 아니겠지? 수평이면 모를까 줄다리가 천국의 계단처럼 위로 치솟아 있는데?

“전 무게 때문에 아티팩트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제이가 다리를 넘는 건 데이지가 도와줄 거랍니다.”

메스키트는 시들링의 갑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아티팩트로 들어가고 싶은데.

“두 사람이 저 갑옷 무게보단 가벼울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시들링이 중간에 건너다 다리 끊어지는 거 아니야?”

“글쎄요, 그건 데이지가 얼마나 다리를 튼튼하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메스키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와, 남의 드루이드라고….

“열심히 만들었어요!”

데이지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시간에 저런 다리를 만들어 낼 정도면 대단하긴 하다.

우여곡절 끝에 다리는 넘었다.

중간에 끊어진다거나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난 아예 데이지의 줄기를 내 몸에 자진해서 감은 후 안전줄 삼아 건넜다.

시들링이 건널 땐 다리가 좀 많이 휘청거리며 휘긴 했지만 열심히 만들었다는 데이지의 노력 덕인지 잘 넘어왔다.

도착하자 아티팩트로 피신했던 드라이어드들이 하나둘 나와 적을 대비했다.

공중 정원 정상엔 하얀 엘더 플라워 꽃나무가 성벽처럼 빼곡히 자라 있었다. 억지로 비집고 피어난 꽃들은 서로의 꽃잎을 짓무르게 만들고 엇자란 가지가 옆 나무의 가지를 눌러 꺾고 있었다. 하얀 꽃나무로 둘러싸인 요새라….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에서나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나무. 꽃가지들은 시들링이 휘두르는 검날에 뭉텅뭉텅 썰려 나갔다.

“떠나라 했거늘….”

소란에 짭신 엘더가 다시 모습을 비췄다.

“아주 화려하게 배웅해 줘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짭신 엘더는 뻔뻔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나와는 상관도 없는 널 죽이고 모두를 구할 수 있다면 그게 낫지. 섬의 모든 생물들은 내 가솔들이니까.”

제물을 바치라거나 드루이드인 아이들을 납치해 갔으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한다.

“떠나라 할 때 떠났어야지. 너희만 섬에 오지 않았어도 평화는 오래 유지되었을 거다. 이젠 부질없다. 그가 너희의 존재를 모두 알아 버렸으니.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겠지. 차라리 너희를 죽여 그의 분노를 잠재우겠다.”

그는 또 누구야? 괴물을 지칭하는 건가?

“아이… 그래, 드루이드란 이유로 납치된 아이들은 어떻게 했어? 로웰라는?”

“이곳에 없다.”

“뭐? 이곳에 없다니. 아이들이 없다는 거야, 로웰라가 없다는 거야?”

“둘 다 이곳에 없다.”

“로웰라를 어떻게 한 거야!”

로웰라가 잘못된 건가? 문득 짭신 엘더가 로웰라는 바다에 던져둘 테니 알아서 건져 가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바다에 정말로 던져 버렸다는 거야?

“제가 들어가서 찾을게요!”

데이지가 단도를 쥐고 뛰쳐나가려던 것을 엘더가 붙잡았다.

“네가 저 녀석에게 피해를 입히면 나와 저 녀석의 왕위가 걸린 우성종 싸움이 성립되지 않아.”

엘더가 앞으로 나서며 스태프를 들었다.

“넌 내가 잡는다.”

연금탑의 종자 보관소에서 바곳끼리 맞붙었을 때 아무도 끼어들어선 안 됐던 일이 떠올랐다.

“쉽사리 당해 줄 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짭신 엘더가 소매로 가려져 있던 손을 들었다. 온갖 휘황찬란한 보석 반지들이 그녀의 손가락에 휘감겨 있었다.

땅 부자들이 열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죄다 끼고 부를 과시하는 것보다 더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드라이어드들 손에 있던 반지도 빼 갈 정도로 대단한 도둑들이라더니. 그만큼 실력이 대단하다고 과장하기 위해 나온 소문이 아니라 진짜 반지를 훔친 거였어?

엘더의 전투 보너스 달에 맞는 루비는 물론 여러 태양의 보석들이 잔뜩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석의 등급은 알 수 없으나 게임으로 치면 현질 장비를 잔뜩 두른 상태였다.

쟤 템발로 밀어붙이려나 본데?

“드루이드가 없는 드라이어드의 한계를 알게 되겠지. 뭘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우리 엘더는 자신이 반드시 승리할 거라 장담하고 있었다. 그래야지, 내 꽃인데. 너만 반지 꼈냐? 우리 애도 최상급 루비 반지 끼고 있거든.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지면 안 되지.

“여긴 내게 맡기고 안으로 가 봐.”

대비도 없이 곧바로 유니크급 힐러들의 미러전이 시작되었다. 하얀 꽃가지가 어지러이 피어났다.

연금탑의 아카시아들을 상대했던 힐러 미러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로 똑같은 캐릭터 둘이서 일대일 전투를 벌이는 거였다. 캐릭터가 같은 경우 승자는 전투력이 더 높은 쪽이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이곳으로 오는 통로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했죠? 그 통로는 무너진 계단이었고, 저와 데이지가 보수를 하고 있었지요. 무언가 이변이 있었다면 제가 알아차렸을 거랍니다.”

메스키트가 날 보며 말했다.

“그럼… 로웰라가 아직 안에 있을 수도 있겠네?”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서 안으로 가요.”

짭신 엘더는 신전으로 진입하려는 우릴 막으려고 했지만 머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스태프의 큰 스윙에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상대는 보석의 힘 덕인지 잘 먹고 잘 큰 우리 엘더의 공격을 잘 버티고 있었다.

“널 쓰러뜨리면 그 반지들도 전부 내가 갖겠어.”

저 까마귀…. 저 와중에도 반지를 탐내다니. 아니, 엘더의 말도 생각해 보니 괜찮았다. 전부 빼앗아 버리고 우리가 쓰자, 엘더!

“엘더, 힘내! 금방 갔다 올게. 내가 다녀오면 꼭 네가 왕이 되어 있어야 해.”

엘더가 날 보며 삐뚤게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식으로.

“안 돼!”

짭신 엘더가 등 뒤로 우릴 향해 비명처럼 외쳤다. 하지만 그녀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신전 안은 돌과 수풀들을 이용해 만든 미로와 같았다. 메스키트는 앞을 가로막는 벽을 굳이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듯 랜스로 죄다 깨부수고 전진했다. 별로 힘을 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돌이 우수수 박살 났다.

대체 어떤 괴물이 나타날까?

이 전력이라면 어떤 괴물이 나와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젠장…. 시들링, 난 아티팩트로 돌아갈게…. 다들 조심해…. 벽에서 떨어져….”

갑자기 블루 멜로우가 픽 쓰러지더니 평소보다 더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티팩트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그의 손목은 벽에서 튀어나온 노란 줄기에 감겨 있었다. 놀랍게도 묶인 부분이 미라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대체 무슨 능력에 당한 거지?

“눈치가 빠르네.”

사방에서 이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한 자는 분명 하난데 수십 명이 여러 방향에서 말하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괴물이 말도 하네. 그럼 괴물의 정체는 사람이거나 드라이어드였나?

잠깐…. 그러고 보니 우리 팀의 유일한 힐러가 밖에서 싸움 중인데…. 능력을 알 수 없는 괴물을 상대로 힐러 없이 전투를 해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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