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화 (220/604)

다들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았다는 드루이드의 전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 것에 놀라워했다.

그 끝은 결국 세계 멸망이라는 엄청난 결말의 전설이었다. 내가 있던 세계로 보면 운석이 떨어지고 빙하기가 도래해 지구상의 공룡들이 멸종했다는 설과 다름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또한 과학적 추론이지 실제로 그 시대를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진실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전설의 경우는 산증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세계가 멸망했는데 어떻게 섬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섬을 둘러싼 거대한 돔과 연관이 있는 걸까?

“그래서 내가 그 원인이 된 드루이드처럼 순례자의 길을 걸을 거고 섬사람들을 모두 감시자로 삼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저 벽화가 모두 사라지고 내 눈 색이 이렇게 변했어. 이것도 이상이라면 내겐 정말 큰 이상이긴 한데… 뭐 딱히 아픈 곳도 없고, 오히려 시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아.”

“…어쩌면 나중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 주의하는 것이 좋을 거다.”

“왜 하필 금색이야.”

시들링이 내 안위를 걱정하는 한편 엘더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차라리 녹색이면 좋았을 텐데.”

“내겐 금색이나 녹색이나 당황스럽다고.”

핸드폰 화면을 통해 내 눈을 다시 살펴보았다.

“음… 여기서 좀 더 태양처럼 주홍빛이 돌면 메스키트 눈과 똑같으려나?”

“그러니까.”

엘더가 더욱 툴툴거렸다. 뭐야, 얘 지금 자기랑 눈 색이 커플이 아니라고 이렇게 툴툴거리는 거였어? 정말 어이가 없는데 그 모습이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는지 너무 귀엽게 보인다.

너희 세계수한테 뭐라고 해라. 세계수의 상징색이 금색이라 내가 이렇게 된 것 같은데 적어도 선택권은 주지 그랬냐고.

어떤 게임은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바꾸려면 재화를 소비하거나 이용권을 구매해야 하는데, 자기가 뭔데 예고도 없이 유료 서비스를 강제로 떠넘기냔 말이야.

이게 색깔이 캐릭터 개성으로써 중요시되는 룩덕 게임이었어 봐. 눈이 금색으로 바뀌면 머리색부터 장비 색까지 다 다시 바꿔야 했다고. 그건 또 얼마나 시간과 재화가 많이 소비되는데! 당장 운영자 소환하고 커뮤니티 터지고 난리 났을 거란 말이지.

“진리는 네가 아니라 내 눈 색에 더 가까워.”

마거리트의 샛노란 눈이 애정을 가득 담아 날 바라본다. 어찌나 펑펑 울었던지 눈가가 아직도 빨갛다. 안타까워서 눈가에 손을 대니 자신의 말에 동의한다고 생각했는지 마거리트의 입이 크게 곡선을 그었다.

두툼하게 올라오는 볼살을 따라 휘는 검은 균열이 눈에 띈다. 이걸 모르는 척하는 게 마거리트에게 좋은 걸까…?

이제 겨우 괜찮아져서 엘더에게 시비를 걸 정도가 되었는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조금 때웠을 뿐인데 금세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젠 사람들이 모이고 있으니 섬에 남아 있는 드라이어드들도 챙겨야 했다. 모감주나무를 따라 한차례 많은 드라이어드들이 배를 타고 떠나긴 했지만 섬은 넓었고 피어 있는 허브도 많았다. 아마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이 더 많을 터였다.

시들링에게 섬의 드라이어드들을 모아 오는 일을 부탁했다. 레몬밤에게만 부탁하기엔 아이 말을 들어주기보단 다짜고짜 괴롭힘부터 당할 확률이 높았다. 시들링은 나와 다르게 주변에 드라이어드가 있으면 기척을 느낄 줄 알고, 데리고 있는 드라이어드들을 푼다면 곳곳에 있을 섬의 드라이어드들을 빨리 데려올 수 있을 터였다.

시들링이 군말 없이 내 부탁을 수행하러 떠났다. 그의 아티팩트에서 튀어나온, 벨라돈나를 제외한 드라이어드들이 날렵하게 섬을 뛰어다녔다.

집이 가까운 사람들부터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모이기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들 양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짐만 챙겨 왔다. 그들은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결코 짐이 저 정도만 나올 리가 없었을 텐데, 촉박한 시간 속에서도 다들 잘해 주었다.

“혹시 아직 오지 않은 분은 없죠? 이웃이 모두 잘 왔나 살펴봐 주세요.”

내 말에 다들 주변을 둘러보며 아는 얼굴들을 찾으며 웅성거렸다. 그 때문에 주변이 잠시 소란스러워졌지만 곧 조용해졌다. 다들 빠짐없이 모인 모양이다. 누구 하나 섬에 두고 가면 큰일이었다.

“여러분이 가실 곳은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이에요.”

“테라리움이 뭔가요?”

아, 내가 이 세계에 오자마자 가졌던 여러 개의 의문 중 하나를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테라리움은 이 섬처럼 마을을 뜻해요. 다른 점은 세계수의 가지의 축복을 받는 안전한 곳이란 점이에요. 밖을 나가면 이 섬과 달리 ‘불’의 위협을 받을 거예요.”

“불이요?”

이 섬은 세계수의 가지가 없음에도 불의 위협을 전혀 받지 않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불에 대해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불에 대한 의문 역시 내가 이 세계에 오자마자 데이지에게 물었던 질문 중 하나였다. 이거 원…. 생뉴비 제이가 수백 명 모여 있는 셈이네.

“네, 활활 타오르는 그걸 떠올리실 텐데 조금 달라요. 밖의 불은 살아 움직이고 모든 것을 공격해서 태우는 몬스터예요.”

“밖에… 괴물이 우글거린다는 건가요?”

사람들 얼굴에 두려움이 내려 앉았다. 괴물을 피해 밖으로 나가는데 오히려 밖에 괴물이 우글거린다면 아이러니하겠지. 다시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은 무찌를 수 있어요. 여러분이 존재 자체도 제대로 모른 채 두려움에 떨던 괴물과는 달라요. 더구나 28번째 테라리움은 세계수의 축복의 힘이 강하고 주변을 지키는 드라이어드도 많으니 불로 인해 피해를 받는 걸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가막살나무가 틈틈이 순찰을 도는 듯하고 인공개량 드라이어드들도 테라리움 밖에 터전을 잡고 경비병 NPC를 자처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당시 주변에 작은 불 하나도 보지 못했다.

“여러분들은 그곳에 도착하면 거주지를 짓는 일부터 하셔야 해요. 즉,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하셔야 된다는 거예요. 일이 좀 있어서 건물이 하나도 없거든요.”

거대한 불에 의해 모두 반파됐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지금은 안전하다는 이야기에 의문만 생길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식량과 물은 충분해요. 그곳에서 하시고 싶은 모든 일을 하셔도 돼요. 농사를 지어도 되고 무언가를 만들어도 되고. 이참에 섬 안에선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 보시는 것도 좋겠죠.”

황금 호박 상회가 들어와 물품을 순환시키고 주얼리 콘이 들어와 장인들이 풍부하며 그레이트 빈 연합이 들어와 일꾼들도 충분하니 충분히 자립할 수 있을 거다.

“그 정도는 각오했다네. 갈 곳이 아주 없는 것보단 낫군. 옛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때에 토대부터 다듬는 일은 더없이 걸맞다네.”

나와 논쟁을 나눴던 촌장급 노인이 내 우려를 잠재웠다. 노인의 말을 따라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의 보좌관 자리를 저분께 맡겨 볼까? 데이지2는 드라이어드다 보니 업무에 한계가 있을 거고 이미 사람들을 통솔하고 있던 분이시니 적합할 것 같은데. 모두 안전하게 테라리움으로 이주한다면 꼭 의논해 봐야지.

마지막으로 이주를 점검하고 떠날 준비가 다 되었을 때, 멀리서부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드라이어드들이 속속들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어린 드라이어드들은 최대한 나무나 수풀에 몸을 숨기며 경계를 쉬지 않는 한편, 엘더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중 정원에서 우리와 대립했던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소식을 듣지 못한 드라이어드들은 아직도 우리 엘더를 신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드라이어드들을 모아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다시 설교를 하는 것보단 엘더를 내세워 구세주 역할을 시키는 것이 더 빠르고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더 많이 찾아왔어.”

“웃기지 마. 쟤넨 내 발포 음을 듣고 나타난 거야. 그러니 쟤넨 내가 찾은 거지.”

“네 총소리를 듣고 도망가던 걸 내 채찍으로 잡아 온 거잖아.”

“그렇게 따지면…. 내 수정구로… 그 일대 모든 드라이어드들을 감별해 냈으니…. 찾은 거로 치면 내가 우승이지….”

“카돈의 몽둥이를 보고 겁에 질린 드라이어드들을 내 바이올린으로 다독여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내가 더….”

그 잠깐 사이 자기들끼리 시합이라도 한 거야? 시들링의 네 드라이어드들은 서로 자기들이 섬의 드라이어드들을 더 많이 찾아내 데려왔다며 시끄럽게 굴었다. 금세 별것도 아닌 걸로 아웅다웅 싸우는 것이 꼭 쉬는 시간의 학생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덩치도 큰 것들이….

상품을 뭐 대단한 거라도 걸었나 했더니 듣다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뭐로 싸우는 건데? 우승하면 뭐가 좋은데?

“내가 이 부케에서 가장 능력 있는 드라이어드야.”

아, 그래. 학주인 벨라돈나가 떠야 정리가 되겠네. 시들링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묵묵하게 걸어왔다. 그 손엔 어린 드라이어드의 목덜미가 덜렁 들려 있었다.

발버둥 치던 드라이어드는 결국 힘으로 못 당한다는 걸 판단했는지 축 처졌다. 불쌍한 것…. 어쩌다 쟤한테 잡혀 왔니….

구세주 역할을 시키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엘더의 등을 대뜸 밀었다. 긴가민가하던 드라이어드들도 엘더가 작정하고 신처럼 구니 깜박 넘어갔다. 엘더에게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내가 설명했던 것들을 최대한 간결하게 드라이어드들에게 전해 달라고 했더니….

“모두 나를 따라 새 터전으로 가면 축복받은 새 인생을 맞이할 수 있을 거다.”

“와아아!”

“신님 만세!”

사이비 교주를 보는 줄 알았다. 쟤도 아마 내 손에서 안 태어났다면 짭신 노릇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다들 도착했으니 남은 것은 운송 수단뿐이었다. 배가 제때 도착해 줄까?

우리가 배를 타고 내렸던 곳으로 모두를 데려다 놓고 애드너에게 전하는 편지를 써서 촌장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모든 대비는 끝냈다.

다리가 완성된 공중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괴물을 치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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