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9화 (219/604)

내 말에 노인은 더 이상 내게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깊게 감긴 눈엔 많은 생각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의 당신들을 만든 선조와 똑같은 길을 가겠다. 어쩌면 난 당신들의 선조와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완전히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후자의 결말은 당신들이 알고 있다. 그럼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행동해야 한다.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도록.

날 감시해라. 이들만큼 그 일에 어울리는 감시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두머리 격이 되는 노인이 입을 다무니 더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노인이 생각을 정리할 동안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난 그 시간에 내 일행들에게도 섬에 대한 역사를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들링에게 세 장의 종이를 넘겨주었다. 직접 보라는 의미였다. 내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모두의 앞에서 풀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운이 좋다면 시들링도 벽화를 확인한 순간 머릿속에서 어떠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종이를 받아 든 시들링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잠잠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

“뭐?”

“이것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종이다.”

그럴 리가? 좀 전까지 내가 종이를 통해 벽화의 내용을 읽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냐는 식으로 그에게서 종이를 빼앗았다.

그런데 종이엔…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나와 시들링, 로웰라가 채워 넣었을 벽화의 그림은 온데간데없고 흰 종이만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다 어디 갔어?”

그때였다. 유리가 자잘하게 깨지는 소리가 허공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어어…!”

다들 하늘을 가리키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일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가리키는 것은 공중 정원의 벽화였다. 금으로 수놓아진 거대한 벽화들에 금이 가더니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든 벽화가 지워지고 있었다.

“벽화가 사라진다!”

종이에 옮겨 놓았던 벽화가 모두 사라졌다. 또한 다시 옮길 수도 없게 벽화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후대에, 혹은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 남겨져 있던 기록이 일시에 사라진다? 왜? 더 이상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니면 알아야 될 사람이 알아서?

마지막으로 알게 된 사람이 난데, 우연찮게 내가 인지하자 다 사라져 버린다고? 그럼 애초에 벽화는 이 섬에 찾아올 날 위해 남겨져 있었다는 거야?

나뭇가지 문양이 자리한 내 왼팔이 다시 한번 금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은하수처럼 흩날리는 금빛 가루들에 동조된 것처럼, 내 팔이 같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일정한 방향도 흐름도 없이 둥둥 떠다니던 금빛들이 갑자기 한데 모여 둥글게 휘몰아쳤다. 그건 꼭 먹이를 찾아 헤매는 벌떼와 같았다. 일순 그것들이 목표를 정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나였다.

“왁! 뭐야, 갑자기!”

거대한 금빛의 소용돌이가 날 향해 쏘아졌다. 시들링과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일시에 내 앞을 막고 엘더와 바곳, 마거리트가 날 끌어안았다.

공격을 대비했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에 부딪혔다거나 닿았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금가루들은 우리를 투과해 지나쳐 갔다. 아니 나는 투과하지 못했다.

애초에 해를 끼치려던 게 아니었나?

내게 도달한 금가루들은 전부 내게 흡수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왼팔의 나뭇가지 문양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었다. 그 이상 현상에 내 드라이어드들이 조금씩 내게서 몸을 떼고 내 왼팔을 바라보았다.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기분 좋은 공명음을 내며 진동하고 문양은 팔에서 붕 떠올라 오르골 오브젝트처럼 느리게 회전했다.

금빛이 진해지고 가느다란 줄기들이 자라나 얽혀 들어가며 더 많은 잎들이 가지에서 피어났다. 나무 문양은 더욱 정교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내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이동하는 뿌리가 비로소 한곳에 붙박여 있던 나의 발이 되어…. ‘과거의 업보를 대신 짊어지고’….”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문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의 눈먼 축복이 영혼에 투영된 곳곳의 세상을 살피며… ‘과거가 걸어온 것과 다른 길을 향한’ 눈을 뜨게 되고….”

하지만 조금 다른 문구였다. 내가 이걸 어디서 봤더라?

들려오는 소리는 거기까지였다. 순간 눈에 먼지라도 들어간 것처럼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아파서 눈을 잠깐 감았다 떴을 때 시야가 바뀌어 있었다. 시력이 확 올라간 것처럼 세상에 맑고 선명하게 보였다. 어쩐지 볼 수 있는 범위도 더 넓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선 시들링과 그 너머에 사람들 무리에 섞인 앙코라에게서 금빛 오라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와 로웰라에게서 보였던, 영혼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빛 무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심장이 있을 위치에 요동치는 금빛 구슬이 보였다. 그건 온몸을 향해 금빛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시들링은 온통 금빛으로 보일 정도로 구석구석 뿌리가 내려 있었지만, 반면에 앙코라는 상체만 금빛 뿌리가 뻗어져 나와 있을 뿐이었다. 내가 보는 건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너 눈이 이상해.”

엘더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 눈? 내 눈이 왜?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검은 화면에 거울처럼 날 비춰보았다. 꺼낸 핸드폰 역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시발, 내 눈이 왜 이래?”

검은 화면에 노란 두 개의 구슬이 보였다. 내 눈동자였다. 검은색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드라이어드 같은 금빛 눈동자가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그 어떤 서클 렌즈를 가져와도 이처럼 자연스럽게 보이진 않을 거다.

“왜 이래? 내 눈 왜 이러는 거야?”

“어디 아파? 눈이 아프기라도 해?”

내 호들갑에 엘더가 파드득 놀라 날 살폈다.

“설마 저 벽에서 떨어져 나왔던 금가루들 때문인 거야? 그게 너에게 뭘 했어?”

“아니 아프지는 않은데… 오히려 시력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갑자기 내 눈 색이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바꾸듯 확 바뀌어 버렸다고요! 이게 뭐야. 어떻게 이 꼴을 하고 돌아다녀?

아니 잠깐. 생각해 보니 사람들 중에 나처럼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은 많이 없었잖아? 어닝도 금색 눈이었고…. 딱히 이상할 건 없나? 아니 이상하지? 이 꼴을 하고 어떻게 다시 학교를 다녀?

왜 눈 색이 변해 버린 거지? 나도 드라이어드들처럼 진화라도 한 거야?

찜찜하다. 뭔가 대단히 찜찜한 기분이 든다. 왠지 내 본모습이 바뀐다는 것이 달갑지 않게 느껴진다. 나중엔 여기서 더 바뀔까? 다음은 뭘까? 머리색이라도 바뀌는 걸까? 이 세계에서 내 세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건 내 모습과 내 핸드폰뿐인데….

쿠르릉!

괴이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엔 또 뭐야?”

또 뭐가 오는데? 벽화가 녹아내려 내게 흡수되더니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건데!

중앙의 공중 정원에서 거대한 모래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모래를 밟고 붉은빛이 뛰어올랐다. 달라진 시야 덕인지 멀리서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저건 데이지였다.

데이지는 혼자가 아니었다. 양 옆구리에 뭔가를 짐짝처럼 들고 있었다. 드라이어드?

모래 기둥은 계단처럼 높낮이를 달리하며 연이어 솟아올랐다. 그리고 데이지는 그 위를 밟고 차근차근 뛰어올랐다. 데이지가 들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손을 뻗자 굵기와 색이 다른 덩굴들이 뻗어 나왔다.

데이지는 덩굴로 실뜨기를 하듯 모래 기둥을 오가며 뛰어다녔다.

메스키트가 공중 정원의 꼭대기로 가는 통로를 해결하고 오겠다더니 그 과정인 듯했다.

덩굴은 순식간에 그럴싸한 줄다리 형태를 만들었다. 덩굴형 드라이어드를 찾더니….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황금 나뭇가지 에디션을 휘감은 듯한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반투명한 둥근 금빛 홀로그램이 핸드폰 화면에서 붕 떠올랐다. 둥근 홀로그램 창 안엔 크로스 헤어(Cross hair, 십자선)가 있었고 중앙을 약간 비켜 간 곳에 빨간 점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도 FPS(First-person shooter, 1인칭 슈팅 게임)에서 자주 봤던 것이라 빨간 점을 중앙에 맞춰 보려 핸드폰을 움직였다. 그리고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빨간 점이 중앙에 맞았을 때, 그곳엔 메스키트가 있었다. 핸드폰을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다시 맞춰 보아도 여전히 메스키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왜 메스키트를 가리키고 있는 거지? 이거 혹시…? 그녀가 필드의 가디언이기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서로의 위치와 정체를 말할 수 없는 필드의 가디언들.

이 문양이 엘더의 나비처럼 내게 나침반이 되어 줄 수도 있다는 건가?

어쩌면 10그루를 모두 모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도 막상 갈피를 잡기 힘들었던 그 일의 실마리를 잡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이 힘이 발현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거가 걸어온 것과 다른 길을 향한’ 눈을 뜨게 되고….”

어쩌면 갑자기 들려온 그 음성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다.

메스키트와 데이지가 다리를 다 만들어 간다면 준비는 거의 끝났다는 거다.

“이제 떠날 마음이 들었나요?”

노인은 고개를 들어 날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마 바뀐 내 눈 색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것이 그에게 확신을 주었는지 표정이 더없이 결연해졌다.

“알겠네. 죄를 반추하며 감시자로 살라고 했지? 그것이야말로 우리 일족이 해야 될 일인 것 같군.”

“그럼, 다들 여기서 뭐 해요? 어서 짐을 챙겨요!”

내 외침에 사람들이 부랴부랴 흩어졌다. 이제 애드너에게 부탁한 배만 오면 된다. 그리고 모감주나무가 찾아 떠난 드라이어드 원군들도.

“네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시들링이 짙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렸으니 쟤도 내 눈이 변한 것이 보일 거다. 섬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내가 벽화를 통해 해석한 은둔자의 정원에 대한 역사를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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