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8화 (218/604)

이걸 맞춰 보면 노인에게 물은 질문의 답이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2층의 벽화에 사람 형태가 있었지. 세 장을 겹쳐 살펴보았다. 이게 무슨 내용이지?

거대한 사람 옆에 배를 탄 채 따르고 있는 수많은 작은 사람들. 그리고 배는 섬에 정박했다. 그들이 은둔자의 정원으로 이주하는 내용으로 보였다.

그리고 공중 정원을 세우고 거대한 사람의 지도하에 벽화를 그리는 모습까지 담겨 있었다. 역시 저 거대한 공중 정원은 사람들이 직접 만든 거구나. 꼭 이집트의 피라미드 벽화를 보는 기분이다.

시간상으론 마지막엔 섬 전체에 테라리움의 과수원처럼 돔이 둘러지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2층의 내용은 저들이 은둔자의 정원에 이주했고 무엇을 했는지만 나와 있지, 왜 그들이 섬을 떠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해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3층의 벽화는 무슨 내용이지?

어쩐지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미친 듯이 긴장이 되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내가 이 내용을 알아도 될까 하는 원초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정말 내가 알아도 될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진실을 알아내려 할 때보다 견디기 힘든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3층의 내용을 대충 한눈에 담았을 때, 섬으로 사람들을 이주시킨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자 숨을 크게 들이쉬어야 할 만큼 엄청난 압박감이 밀려왔다. 대체 누구길래? 직감적으로 난 이 내용을 알게 된다면 절대 그 사실을 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알게 되기 전과 후의 나는 어떻게든 달라질 거란 기분이 들었다.

시간의 순서대로 천천히 그림을 하나하나 짚었을 때, 앞서 다른 층의 그림들을 살폈을 때와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그림을 따라 누가 내게 전래동화를 읽어 주는 것처럼 머릿속에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련한 음성과 지지직거리는 잡음 때문에 마치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재생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주 옛날, 강하고 도전적인 드루이드가 있었다.”

거대한 사람 형태의 주위로 그려진, 그를 나타내는 작은 도형들. 별, 다이아, 검 등등….

“드루이드는 세상을 모험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누구도 가 보지 못한 장소들을 속속들이 찾아냈다. 그 모험 끝에 수많은 강한 드라이어드들을 손에 넣었다.”

꽃과 잎을 단 인형들이 드루이드의 주변을 빙 둘러 싸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드루이드의 강한 영혼에 끌려, 세계수의 지휘하에 10개의 필드를 수호하는… 가디언 드라이어드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동그란 원, 점점이 찍혀진 모래, 흐르는 물, 입을 벌린 파도, 고인 웅덩이, 거친 바위, 눈이 내리는 구름…. 모두 10개의 자생 필드를 나타내는 문양들이었다.

“허업….”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여기서 이 내용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세계수의 대리자가 되어 걸어야 할 순례자의 길. 메스키트를 비롯한 10개의 필드를 수호하는 필드의 가디언들을 모두 모아야 한다는 내 최종적인 목표.

먼 옛날 전설처럼 전해지는 내용 중 정말로 10그루의 필드 가디언을 모두 모은 드루이드가 있었다고 했다.

“아주 먼 옛날, 필드의 가디언들을 한데 모은 드루이드가 고대의 힘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다 균형이 깨지고 결국 세상에 멸망이 도래했다는 전설이 선조로부터 내려오고 있답니다.”

메스키트의 이야기가 끼어들었다.

세상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그 사건. 세상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은 드라이어드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괴담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그 6개의 멸망 징후는 내가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잘 이용해 먹었다.

“필드의 가디언들은 모두 그의 말을 따랐고 가디언들이 수호하던 필드의 규율은 그 드루이드 앞에서 무력했다.”

“모든 필드를 자유롭게 부릴 수 있게 된 드루이드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해졌다.”

“많은 재화와 사람들이 그 발밑에 쌓이고 모였다.”

“그 드루이드는 절대자가 되었다.”

왕좌에 앉아 사람들을 굽어살피는 모습.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하지만 초월적인 힘을 얻게 된 드루이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었다.”

고민하는 사람의 모습 옆에 모래가 얼마 남지 않은 모래시계가 그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놓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것은 신과 같은 힘이었기에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며 신이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두 팔을 벌리고 하늘에 떠 있는 사람. 그 뒤로 그려진 후광. 하지만 반대로 점점 더 줄어드는 모래시계의 모래 양. 인간의 오만함, 그 이야기의 끝을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막강한 힘을 가진 자는 그에 따른 중대한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그는 책임을 저버리고 결국 자신을 선택했다. 필드의 가디언들 또한 자신의 드루이드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이미 필드의 규율을 저버린 지 오래였고 그 어떤 것보다 자신들의 드루이드가 가장 소중했다. 그들이 지켜야 할 것은 필드의 규율이 아니라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드루이드였다.”

“그래서 기꺼이 드루이드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사용했다. ‘드루이드를 그 무엇도 해할 수 없는 신으로 만든다.’”

10그루의 드라이어드가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점차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온몸이 물 위에 떠다니는 듯한 기묘한 긴장감이 날 잠식했다.

분노와 절망, 슬픔과 무력감이 동시다발적으로 내게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 감정을 느끼는 건 대체 누구?

“그리고 균형을 이루던 자연의 이치가 모두 깨졌다.”

거대한 유리 공이 보였다. 그건 행성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니면 단순히 자연을 표현하기 위한 도형일 수도 있었다. 공의 한 부분이 금이 가더니 깨져 버렸다.

“세상에 멸망이 닥쳤다.”

첫째, 해가 보이지 않는데 세상은 불 속에 있는 것처럼 뜨겁다.

1층 벽화의 하늘을 가득 채웠던 일식을 표현한 문양. 그것이 3층의 벽화에 재등장했다. 그리고 온 세상이 끝자락부터 불바다에 잠기는 듯한 끔찍한 그림이 이어졌다. 지옥도를 보는 듯한 아비규환.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세상에 더 이상 평화는 없다. 드루이드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만이라도 세상의 멸망 속에서 구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3층의 그림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리고 2층의 사람들이 이주하는 그림으로 이어졌다.

벽화의 내용을 모두 확인했지만 차마 종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야?”

종이를 든 두 손이 덜덜 떨렸다.

그렇다면 과거에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아 세상에 멸망을 초래한 드루이드의 후손이… 여기 있는 섬사람들이라고?

“몇몇 과거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선조의 죄가 거의 희석되었음을 믿고 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역사를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네. 그래서 젊은이들 중엔 자신의 핏줄의 유래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많지 않다네.”

노인은 내가 벽화를 모두 해석했다고 믿었고 사람들이 결코 섬을 떠나선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그 이유에 동조해 주기를 바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

종이는 나 홀로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니 진상을 알고 있는 것도 나뿐이었다. 엘더가 사색이 된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다들 말을 안 했다 뿐이지 엘더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보다 마을 사람들을 먼저 설득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제가 본 것이 진실된 역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노인은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했다.

“그리고 제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고 당연히 여러분들이 죽도록 내버려 둘 거라 생각하시는 거고요?”

“그건 단순한 괴담이 아닐세. 선조들이 자신들의 죄를 잊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벽화로 남긴 것이지.”

3층은 은둔자에 대한 전설, 2층은 은둔자의 정원이 탄생하게 된 계기.

그렇다면….

“그렇다면 왜 오늘날에 대한 예언이 있는 거죠?”

“그것이 섬이 맞아야 할 최후이기 때문이지.”

1층은 은둔자의 정원의 결말? 정말로?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언이 남아 있는 건 여러분들이 피할 수 있도록 알려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요.”

노인은 내 말을 부정하듯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침음했다.

“선조의 죄가 거의 희석되었다고 믿는다고요? 맞아요. 아니 희석됐을 뿐만 아니라 아예 없어요. 물론 최초의 선조는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이 차마 심판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일을 저질렀어요. 하지만 수많은 세월이 흘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 죄가 동등하다고 할 수 없어요.”

이 기막힌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그들이 과거의 죄를 반복하고 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때를 추억하며 그날이 다시 오기를 바라고 있나? 그것도 아니었다.

선조인 드루이드를 되살리기 위해 매일 제사라도 지내고 있나? 역시 아니었다.

이들이 한 일이라곤 고립된 섬에서 살아간 것일 뿐.

“그리고 죄를 갚는 방법이 여기서 다 같이 죽는 것뿐이라는 점도 동의할 수 없어요. 그게 대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길인데요? 다른 가능성은 하나도 살펴보지 않고 포기해 버리는 것이잖아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게도 어떻게 그러라고 할 수 있어요? 섬 밖의 세상이 정말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섬 안이 전부라 믿고 끌어안고 죽어 버리는 게 정말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우린 본래 지금까지 살아와선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네.”

“그런 건 없어요! 지금 여기 있는 분들이 밖의 사람들에게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는데요? 차라리 나가요. 살아서 나가서 뭐든 해요! 평생을 불을 무찌르든 어려운 사람을 돕든 땅을 가꾸든, 그것이 여기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겠어요! 역사를 잊는 것이 죄라면 나가서 모두에게 역사를 인식시켜요. 그래서 그 역사 때문에 모두를 위해 행동하겠다는 당위성이라도 찾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여기서 모두 데리고 나간다.

“자네에게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은 없네.”

“그런 그림만 남은 역사가 그렇게 중요해요? 어르신께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권한은 없어요.”

공중 정원의 벽화를 바라보았다. 3층의 둥그런 형태가 보인다. 아마도 저것이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아 세상을 멸망시킨 어이없는 드루이드의 대가리.

잘못한 놈은 금칠을 하고 저기 남아 있는데 죄를 전해 들은 사람들만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난 저 드루이드가 될 거예요.”

“뭐라고?”

둥근 대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내 말이 뭘 뜻하는지도 모르겠지.

“물론 세상을 멸망시킬 드루이드가 되겠다는 건 아니에요. 전 세계수의 대리자이자 순례자로서 저 드루이드와 똑같은 전철을 밟아 필드의 가디언들을 전부 모을 거예요. 모두 모은 후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 드루이드가 썼던 결말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만들 거예요. 잘은 몰라도 그 끝을 멸망하는 세계가 아닌 모두를 위한 안전한 세계가 되도록 할 거예요.”

나를 보는 노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런데 내 자신도 날 모르는데 당신들은 날 장담할 수 있어요? 당신들이야말로 역사의 산증인인데 내가 저 드루이드와 똑같은 결말을 만들어 내지 않을 거라 믿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살아서 여길 나와 함께 나가요. 그리고 날 지켜봐요. 내가 끝내 잘못된 길로 빠진다면 그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그 길이 될 거예요. 내가 그 길을 걷지 못하게 감시해요. 죄인이라고요? 그럼 똑같은 죄를 지금 세대가 덮어쓰지 못하게 반추하면서 날 막아요. 과거의 역사를 알고 있다는 건 미래에 같은 잘못이 되풀이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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