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7화 (217/604)

내 부탁으로 모감주나무가 모아 왔던 드라이어드들이 날 향해 적대심을 숨기지 않았다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 반대로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용케 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였는지 숫자가 상당했다.

하지만 테라리움에 비교하면 적은 인원수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 26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지에 열매가 열린 날, 과수원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나저나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드라이어드들까지 다 태우려면 배가 몇 척이나 더 필요할까? 애드너가 우릴 섬으로 데려다준 배만으론 부족해 보이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다들 웅성거리며 재앙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에 대한 해답은 내가 더 자세히 알려 줄 수 있을 텐데 누구 하나 나서서 내게 묻지 않았다. 난 그들이 좀 더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이 섬에 곧 거대한 해일이 덮칠 거란 사실은 대강 들으셨을 거예요.”

마이크나 확성기가 없으니 사람들을 주목시키기 위해 큰 소리를 내야 했다. 어쩌면 이렇게 소란스러우니 맨 뒤까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말을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다들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주위엔 정적이 흘렀다.

여러 일을 겪으며 내가 주목받는 일은 자주 있기에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수많은 눈이 나를 바라보며 내 이야기만 기다린다. 인원수가 달라지니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손끝이 조금 떨려 왔다.

“큼큼.”

꼴사납게 목소리마저 덜덜 떨릴까 봐 연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신입생 때 교양 과목으로 화술의 이론 강의를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시험이 없는 대신 과제로 대체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자유로 주제를 선정해 강의실 앞에서 PPT와 대본 없이 홀로 5분간 발표하기였다.

그땐 시험을 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마냥 좋아서 멋도 모르고 수강 신청을 했었지.

그때가 아마 내 생에 처음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 발표를 했을 때였을 거다.

우리 과 사람들은 해당 강의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교양 강의다 보니 강의실은 타과생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낯선 사람들과도 대화를 잘 텄기에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발표를 시작하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덜덜 떨렸고 전날 달달 외웠던 대본도 버그라도 걸린 것처럼 머릿속에서 휘발되었다.

그때 내가 뭘 주제로 발표했더라. 결국 어떻게 5분을 채웠더라. 오죽 보는 것이 딱했으면 교수님이 중간중간 독려하기도 했었지. 맨 앞줄에 앉았던 고학번 학생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날 지켜보던 것도 떠올랐다. 그날 쪽팔려서 강의가 끝나자마자 이른 낮부터 소주병을 깠지.

그랬던 내가 어느새 이런 자리에 나서기를 주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곤경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희망을 외치는 영웅이라도 된 것 같은 위치에서. 그리고 이제 목숨과 안위를 약속하는 중대한 발표를 해야만 했다.

“모두 여기서 떠나셔야 합니다. 해일이 덮쳐 수몰될 위험도 있지만 더 중한 이유론, 저희가 곧 저 꼭대기에 살고 있는 괴물을 치러 갈 거기 때문입니다.”

공중 정원의 꼭대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괴… 괴물?”

“방금 괴물이라고 했어?”

“섬에 정말 괴물이 살고 있다고?”

아주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호수에 일은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듣기론 괴물을 건들면 섬의 모든 식물을 일시에 말라 죽게 만들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건 여러분들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란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미리 섬에서 대피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물론 이 섬을 나간다면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당장 고민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께는 제가 살 터전을 제공해 드릴 수….”

그때 앙코라의 엄마가 손을 들어 내 이목을 끌었다.

“괴물이… 섬에 살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네, 듣기론 아주 오랫동안 이미 섬에서 살고 있었다고 해요.”

“이미… 섬에 살고 있었다고요? 누군가 불러온 것이 아니라요?”

그녀의 말에 긍정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짭신 엘더와 동시에 출현한 괴물. 그들이 신이라 믿고 지낸 기간만큼 괴물도 함께 살고 있었다.

나와 사람들 사이에 일시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앙코라의 엄마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거나 허망한 표정을 짓거나 분노하거나 아예 땅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었다. 내가 재앙에 대해 설명할 때보다 더 격한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멍해졌다. 왜들 그러는 거지?

“정말로 괴물은 이미 섬에 있었다는 겁니까?”

“드라이어드와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불러온 것이 아니라 이미 섬에 있었다고요….”

“그럼… 우리 애는 왜 끌려간 겁니까?”

“우리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집 안에서만 숨어서 살았어요!”

“우… 우리 딸도 저주받아서 괴물을 불러올 애가 아닌데… 왜 끌려간 거죠? 저렇게나 가까이에 이미 괴물이 살고 있었다면서요!”

“괴물이 이미 섬에 있었다면 대체 왜 저주를 두려워해서 우리 애를….”

“제 아이는 어떻게 된 건가요?”

그들은 날 향해 앞다투어 울분을 토해 냈다. 내가 인간 신문고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수의 민원이 밀려왔다. 시들링과 내 드라이어드들이 무리를 이탈해 내게 다가오려는 사람들을 제지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섬에 오늘 와서 잘 몰라요!”

세상에… 섬에 태어난 드루이드가 그렇게 많았어? 사냥했다고 하더니 죽인 게 아니라 끌고 간 건가? 대체 어디로?

“아이들의 행방은 아직 몰라요. 하지만 끌려갔다면 어딘가에 갇혀 있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짭신 엘더가 기거하고 괴물이 숨어 있다는 공중 정원의 꼭대기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괴물을 처치하러 가면서 끌려간 아이들이 있나 살필게요. 하지만 그것보다 여러분들이 먼저 이 섬을 안전하게 대피해야 구해 낸 아이들과도 만날 수 있어요.”

아이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그 한마디가 갖는 위력은 대단했다. 내게 울분을 토했던 사람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끌려간 아이들이 언제 끌려갔는지는 모른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났을 수도 있었다. 저들에겐 아이일지 몰라도 어느새 로웰라쯤의 나이가 됐을 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끌려가기만 했을지, 끌려가서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 자리에서 구태여 이런 점들을 짚어 낸다고 저들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

“여러분들을 싣고 갈 수 있는 배를 지원 요청한 상태예요. 하지만 혹시라도 자리가 부족해 한 번에 다 타지 못할 수 있으니 짐은 최소한만 챙기세요. 섬을 나가 살 터전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제 테라리움이 여러분들을 수용할게요. 전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제이예요. 제 권한으로 여러분들 모두 테라리움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하겠어요.”

새삼 내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이 전부 이주해도 자리가 남아도는 28번째 테라리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만약 대도시처럼 붐비는 16번째 테라리움만 놓고 본다면 무리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

내가 테라리움 하나 없이 다이아만 많은 상태라면 문제가 되었을 거다. 집단 이주. 저들의 의식주를 전부 다이아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주인이 있는 테라리움에서 출신이 불분명한 대규모의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 줄까? 저 사람들을 수용할 자리가 있었을까?

내가 다이아로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대가 없이 그런 막대한 일을 벌이는 게 외부에 좋게 보일까?

인력이 하나라도 기꺼운 28번째 테라리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몬밤이 해일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28번째 테라리움이기도 했다.

터전도 있고 자본도 있으니 이젠 저들을 옮길 수단만 있다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들이 전부 한마음 한뜻으로 이주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난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결코 세상 일이 항상 내 생각대로 풀리는 법은 없었다.

무리에서 등이 굽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마을 사람들 중 가장 연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노인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마을의 촌장쯤 되는 위치로 보였다.

“자네 제안은 잘 알았네. 아무런 인연도 없는 우리를 위해 터전을 제공하겠다고 하니 정말 고맙다네. 하지만 우린 섬을 떠나지 않을 걸세. 아니 떠날 수 없지.”

뭐? 당장 전부 죽게 생겼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노인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경악한 표정으로 전혀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노인은 ‘우리’라고 말하며 마을 사람 모두가 의견을 통일하도록 강요했지만 정작 그 말에 나처럼 의문을 품고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있다니?

“떠나지 않으면 전부 죽는데요?”

“그것이 우리 일족이 섬과 함께 맞이해야 할 최후라면 받아들여야지.”

“어르신,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전 여기서 죽을 생각이 없어요. 저 외부인들을 따라 섬을 나갈 겁니다!”

“우린 선조가 저지른 죄에 비해 너무 오래 살아남았어. 이렇게 대를 잇고 잘 먹고 잘 살았으면 과분한 걸세. 어쩌면 재앙은 이제 우린 여기까지만 세상 빛을 볼 수 있다는 걸 뜻하는 것일 수도 있지.”

노인의 말에 차마 반론도 펼치지 못한 채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떨군 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노인에게 반발하며 날 따라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왜 저러는 거지?

아직 배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 있다. 대체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다들 전멸을 맞이하려는지 들을 시간 정돈 될 거다.

그리고 설득해야만 했다. 여긴 아이들도 많이 보였다. 로웰라의 또래들도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마저 어른들의 결심에 따를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섬을 떠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선조가 저지른 죄라고요?”

노인은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곤 내게 물었다.

“자넨 재앙이 일어날 거란 징조 외에 다른 것은 읽지 못했나? 읽을 수 있는 사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을 텐데.”

“네?”

“벽화 말일세.”

노인은 지팡이로 공중 정원을 가리켰다. 벽화? 그러고 보니 층마다 내용이 달랐지. 1층의 벽화를 한데 모으면 일식이 시작되는 날 해일이 섬을 덮칠 거란 내용이 나왔다. 그렇다면 2층과 3층엔 무슨 내용이 있지?

떨떠름한 기분으로 벽화가 그려진 종이 세 장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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