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604)

도착한 드라이어드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우리와 함께 있는 레몬밤에게 더욱 그러했다. 모든 일의 시발점이 레몬밤 때문이란 것처럼 증오가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그릇된 증오였다. 그러나 모감주나무가 어느 정도 설명은 하고 데려왔는지 섣불리 나서는 드라이어드는 없었다. 만약 오자마자 레몬밤을 해코지하려 들었다면…. 그들에게 일말의 정이 떨어진 나머지 구하겠다는 마음이 희석되진 않았을까?

그들을 향해 앞으로 섬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미 제압당한 적이 있으니 그들은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불순한 태도는 감추지 못했다.

내 설명이 끝나자 드라이어드들은 모두 경악했다. 어찌 되든 데드 엔딩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침착하기란 어려울 터였다.

“그리고 이건 짚고 가야겠어. 모든 일은 레몬밤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야. 오히려 레몬밤이 있었기에 모두 죽기 전에 발버둥이라도 칠 수 있는 거야. 그녀는 혼자 도망쳐 살 수도 있었어. 하지만 섬의 모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거야.”

내 말에 다들 레몬밤에게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하등하게 여기며 괴롭혔던 아이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이 믿기 힘든가 보다.

“이 중 몇 명은 레몬밤과 함께 괴물로부터 식물들을 보호할 원군들을 데리러 가야 하고, 몇 명은 이 섬 근처에 대기 중인 배를 찾아가 구조를 요청해야 해.”

애드너는 우리에게 하루의 말미를 주고 섬 주변에서 대기하겠다고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이니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쪽에서 신호탄을 쏘면 섬에 더 가까이 다가올 테고.

내가 지시한 사항들을 듣고 모감주나무가 각각의 일을 이행할 드라이어드 무리를 나누었다. 미지의 섬을 찾아 떠날 드라이어드의 수가 좀 더 많았다. 레몬밤은 어느새 우리 곁을 떠나 눈치를 보며 그 무리에 껴 있었다.

“그런데 레몬밤이 꼭 섬을 찾으러 가는 무리에 껴야 할까? 그 무리들이 우리에게 꼭 호의적이라고 할 순 없으니 유사 시 전투를 대비하려면….”

레몬밤은 아직 전투 능력을 보여 준 적이 없는 데다가 너무 어리지.

“그 섬을 찾아갈 지도는 따로 있으니 지도만 쥐여 주면 될 것 같은데.”

“저… 저도 돕게 해 주세요! 제가 꼭 밖으로 나가서 모두를 구하기로 그 드루이드 분이랑 약속했어요!”

그 드루이드는 로웰라를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아이가 서 있는 곳의 드라이어드 무리는 내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젠 레몬밤을 향한 적의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다.

레몬밤의 열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아이에겐 섬을 찾으러 떠나는 일보단 적재적소가 따로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하나의 인력이라도 급한 상태이니 레몬밤이 돕겠다는 걸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해서 대피할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해. 이건 드라이어드들만으론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외부인인 우리가 말이라도 걸려고 하면 다 숨어 버려서 문젠데….”

우리에게 로웰라의 행방을 알려 줬던 아이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 섬의 유일한 드루이드일 아이. 앙코라라고 했던가? 외부인인 우리가 무턱대고 섬에 큰 재앙이 일어날 거라고 말하는 것보다 마을의 사람인 그 아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레몬밤, 도와줄래? 적어도 섬에 사는 드라이어드들을 보고 사람들이 숨진 않으니.”

드루이드가 아닌 일반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드라이어드, 레몬밤. 그리고 드라이어드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드루이드, 앙코라. 이 둘의 존재가 섬사람들과 우릴 이어줄 다리가 될 수 있다.

“섬에….”

상황이 상황인 만큼 ‘사냥’을 한다는 둥 헛소린 하지 않겠지. 주변의 드라이어드들을 둘러보았다.

“드라이어드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 남아 있어. 오랫동안 숨어 지내서 들키지 않았던 것 같아. 레몬밤, 네가 그 아이를 불러내야 해.”

“제… 제가요?”

“응, 그 아이 부모는 아이가 사냥당할까 두려워하고 있어. 하지만 섬의 드라이어드인 네가 호의적으로 다가간다면 안심하고 나올 수 있을 거야. 공격하겠다는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 줘야 하는데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그걸 잘 해내지 못할 것 같거든.”

“네! 제가 꼭 그 아이를 불러낼게요! 그럼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거죠?”

레몬밤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린 대충 역할을 나눴어. 그런데 너희는 뭘 할 거야? 여기서 너희가 가장 강하잖아. 우릴 따라갈 거야? 아니면….”

모감주나무가 대표로 나와 우릴 향해 물었다. 우린 뭘 할 거냐고?

일단 배가 도착하면 바로 탈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계단이 끊긴 공중 정원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엘더 플라워가 가득 피어 있어서 구름처럼 보였다.

“괴물을 잡아야지.”

내 말에 드라이어드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로웰라도 구출하고 괴물도 잡고 짭신 엘더도 잡고.

“양동 작전을 펼쳐야지. 식물들을 보호할 드라이어드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괴물이 무언가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저길 어떻게 올라가지? 계단이 끊겨 버려서, 원.”

“설마… 괴물이 있다는 곳이 저기야? 신님이 계시는 곳을 말하는 거야?”

모감주나무가 경악한 얼굴로 공중 정원을 올려다보았다.

“왜… 왜… 신님이 괴물과 있다는 거야? 신님은 괴물이 나타나지 못하게 우리를 지켜 주고 계신댔는데…? 어… 그럼?”

“궁금한 게 있는데 섬의 식물이 모두 말라 죽기 시작한 때와 너희들이 신이 나타난 때는 차이가 많이 나니?”

내 질문에 모감주나무는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나도 잘 몰라. 그때 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니까. 하지만 그 이상한 저주가 나타난 것도 어느 날 갑자기라고 했고 신님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셨다는 것밖에….”

“그렇다면 둘이 동시에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겠네.”

“…너! 너 설마 우리의 신님을 의심하는 거야?”

식물을 모두 말려 죽이는 저주의 발현 그리고 그 저주를 막아 구원자가 된 짭신 엘더. 저주는 괴물의 능력과 동일.

만약 섬이 아주 오랫동안 식물이 말라 죽는 병으로 고통받았다면, 마을에 사람이 그렇게 많을 수 있을 리 없을뿐더러 공중 정원을 가득 채울 만큼 허브들이 보존되고 있을 리 없었다.

큰 위협이 되기 전에 기적처럼 짭신 엘더가 나타나서 구해 냈다? 하지만 엘더 플라워에게 저주나 병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은 없지. 공교롭게도 섬에서 가장 높은 자가 기거하는 곳에 아무도 모른 채 숨겨져 있던 괴물.

어쩌면 괴물은 짭신 엘더가 섬으로 오며 함께 데려온 것이 아닐까? 둘은 모종의 관계가 있고.

“잘 봐, 얜 너희 신들과 똑같은 종의 드라이어드야.”

엘더를 가리키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의심스러운 눈으로 힐끔힐끔 엘더를 보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이젠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희 신들과 똑같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식물이 말라 죽는 저주로부터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이렇게 원군을 데려오길 기다리는 처지야. 장담하건대 이 앤 저 위에 있는 너희들 신보다 강해.”

내 말에 엘더가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이 앤 못 하지. 애초에 그건 엘더 플라워 드라이어드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야. 너희들의 신이 식물들이 말라 죽는 저주를 무찌르는 건 불가능해.”

“그… 그럼… 신님께서 우릴 속였다는 거야?”

“대체 어떤 잔꾀를 부렸는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럴 리 없어! 우리의 신을 모욕하지 마!”

모감주나무가 분노하며 소리쳤다. 오랫동안 섬의 모든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된 짭신 엘더. 그녀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내 말 한마디로 이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기엔 무리였다.

“그럼 확인하러 가야지. 그 괴물을 너희들의 신이 어쩌고 있는지를. 그래서 말인데, 계단 말고 저 위에 올라갈 방법은 없어?”

시근덕거리던 모감주나무가 고개를 저었다.

“계단이 유일한 통로야.”

“아, 큰일이네. 그럼 어떻게 올라가지? 드라이어드들이 하늘을 날 순 없겠지…?”

지진도 일으키고 배를 띄워서 바다도 건너도 드라이어드들인데 하늘은 못 날아다니나?

점프를 잘하는 데이지도 저만한 높이를 한 번에 뛰어오르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

고층 건물 한 채는 족히 넘을 듯한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흐음, 바람을 이용해 공중에 장시간 떠다닐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드라이어드들이 있긴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엔 보이진 않는 것 같군요.”

메스키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답했다. 와, 하늘을 날 수 있긴 하구나? 진짜 드라이어드의 힘은 무궁무진하네.

“방법이야 찾아내기만 하면 되죠. 만약 계단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힘들었겠지만 아직 반은 남아 있잖아요? 끊긴 부분만 연결할 수 있다면 제이가 원하는 대로 저 꼭대기를 향해 갈 수 있을 거랍니다.”

메스키트는 다 생각이 있구나…. 아니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녀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날 향해 웃으며 데이지의 양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일단 저와 데이지는 올라갈 길을 만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네요. 제이를 곁에서 지켜야 하지만 제가 꼭 나서야 하는 일이니…. 다른 이들이 나의 제이를 안전히 잘 지켜 줄 거라 믿고 맡겨야겠지요.”

메스키트는 엘더와 바곳 그리고 시들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허리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는 마거리트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을 바라볼 때보다 좀 더 오래. 그리고 그건 좀처럼 속을 헤아릴 수 없는 눈빛이었다. 어쩐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내가 정말 위험하면 마거리트가 또다시 예언의 힘을 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마거리트에게 어떠한 리스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메스키트에게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우선시한 나머지 마거리트를 세이브 포인트쯤으로 여긴다면 난 마거리트에 대한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메스키트가 입을 여는 것이 빨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