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 (214/604)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다 죽는다고?”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불안 때문인지 급박함 때문인지 모를, 헐떡이는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쾅!

동시에 무기끼리 맞부딪히는 거친 소리와 함께 목소리의 주인이 나가떨어졌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모감주나무였다. 섣불리 우리에게 접근했다가 도무지 이야기에 집중을 못 하고 있던 카돈에게 걸려 경계를 당한 것이었다.

덕분에 레몬밤과의 이야기는 끊기고 모두의 이목이 모감주나무에게 집중되었다.

“씨이, 이번엔 공격하려고 했던 게 아니잖아!”

그런 그녀에게 카돈이 몽둥이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검 들고 왔잖아.”

“그럼! 너희가 불과 몇십 분 전에 날 때려눕혔는데 빈손으로 다가가라고?”

모감주나무는 억울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더 공격받으면 난 정말로 죽어! 어차피… 내가 너희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좀 봐주면 어디가 덧나? 저주받아 죽을 놈들!”

“뭐, 그렇지. 괜히 무기를 쓸 필요도 없긴 하지만…. 혹시 모르지. 죽기 전 발악이라도 할 수 있잖아?”

카돈은 아무 말 없이 나를 한 번 쓱 바라보았다. 그 발악에 가장 먼저 피해를 받을 게 나라고 생각하는 건가? 주인이 내게 과하게 집착하니 드라이어드들도 영향을 받는 거니?

“싹수 노란 놈! 불이 장작으로도 안 쓸 지독한 놈! 애먼 바람에 기둥이 뚝 끊겨 뒈져 버려라!”

모감주나무는 더 다가오지도 못하고 쓰러진 자리에서 땅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카돈을 향해 온갖 험한 말을 내뱉었다. 다만 당사자는 귀를 후비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지만.

“거기 너! 우리가 다 죽는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데? 너 때문이지? 저주받은 너 때문에 괴물이 끌려온 거지?”

카돈이 반응이 없자 그녀는 만만한 레몬밤으로 타깃을 변경했다. 레몬밤은 이미 괴롭힘을 당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곁에 자신을 지켜 줄 자들이 있어도 흠칫 몸을 떨었다.

“괴물은… 이미 섬에 있었어.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다고 했어…. 내게 저주 같은 건 없어….”

레몬밤은 의견을 피력하면서도 드문드문 모감주나무의 눈치를 봤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기에 일부러 레몬밤의 앞을 나서 몸을 가렸다.

“당장 사과까진 안 바라지만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너의 안하무인인 태도부터 고쳐. 네 물음대로 이 섬의 식물들은 물론 모든 생명이 경각에 달렸어.”

내 말에 모감주나무는 뭐라 대꾸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으면 뭘 할 건데? 분이 풀릴 때까지 레몬밤을 때릴 거야? 그럼 네 목숨이 안전해지기라도 해?”

“나도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아. 저 녀석을 흠씬 패 주는 것도 내가 살아야 할 수 있는 일이지.”

“정말 저런 녀석들을 구해 주고 싶어?”

모감주나무의 말을 들은 엘더가 레몬밤을 향해 비아냥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레몬밤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움츠러든 어깨가 아이를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다.

“제가 무슨 신도 아니고…. 어떻게 개개인의 선악을 판단해서 목숨에 우선순위를 두겠어요…? 저들은 절 괴롭혔지만… 이 섬을 위해선 아주 많이 헌신했어요. 제가… 제가… 정말 저주를 받은 나쁜 드라이어드였다면… 섬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절….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 더 대단할 따름인걸요….”

레몬밤은 그렇게 말하곤 눈에 힘을 주고 모감주나무를 바라보았다.

“만약… 제가 그런 드라이어드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저도 다를 바 없었을지도 몰라요. 저와 같은 처지의 드라이어드를 보고 저도 똑같이 행동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선악을 판단하겠어요….”

“그런 말 하지 마. 넌 이미 괴롭힘을 받은 상태이고 이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야. 네가 만약 모감주나무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달랐을 거라고? 그거야말로 모를 일이잖아. 신전에서 모두를 살리기 위해 겁먹지 않고 도망 나와 도움을 구한 너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봐서, 어쩌면 다른 드라이어드가 괴롭힘 받는 걸 두고만 보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내 말에 레몬밤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일단 목숨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아야 한다는 말엔 동의해. 정당한 벌을 받아야지, 레몬밤을 괴롭혔다고 꼭 죽어야만 하는 건 아니야. 물론 환경이 그런 잘못된 행동을 만들었다는 레몬밤의 말은 인정하긴 하지만.”

이번엔 레몬밤이 아닌 엘더를 향해 말했다.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데이지를 괴롭혔던 무리가 메스키트와 엘더에 의해 심판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들이 데이지를 괴롭힌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날 공격했기에 결국 죽음으로 심판을 받았지.

어쩌면 내겐 그 일이 이 세상으로 온 후 간접적으로나마 첫 살인이 된 셈이었다. 그들은 다른 심판을 받아야 했을 수도 있다.

레몬밤과 나를 비롯한 데이지의 차이점은 결국 같은 처지에서 상황을 무마할 수 있는 힘의 유무에 따른 약자냐 강자냐에 있었다. 데이지에겐 내가 있었기에 강자로서 악당을 처벌하는 그림이 되었지만, 레몬밤은 홀로 버텼기에 환경에 순응하는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가 레몬밤에게 첨언을 하기엔 떳떳한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레몬밤이 돌이켜 보았을 때 스스로에게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내가 배를 빌려줄게.”

조용히 있던 모감주나무가 입을 열었다.

“도움을 구하러 가야 한다고 했지? 어떻게 갈 건데? 헤엄을 쳐서 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모감주나무는 배를 소환해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드라이어드였다. 그녀가 돕는다면 레몬밤이 말한 식물 좀비들이 살고 있다는 섬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방법이라곤 레몬밤이 말한 그 방법뿐인 듯하니 모감주나무의 배를 타고….”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창창하여 밝은 낮 시간인데도 시간이 빨리 흐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삽시간에 주변이 약한 어둠에 물들었다.

이상 현상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저게 무슨 일이야?”

“해가… 해가 사라지고 있어.”

“일식…?”

노란 태양이 검게 파 먹히고 있었다. 태양이 달에 의해서 가려지는 현상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묘했다. 갑자기 이런 때에 일식이?

“온다… 온다… 다 죽을 거야….”

레몬밤이 온몸을 덜덜 떨며 어깨를 붙잡았다.

“너무 늦었나 봐요. 재앙이 오고 있어요. 곧 엄청난 해일이 올 거예요!”

“해일이 온다니? 그건 대체 무슨 소리야?”

모감주나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게 오늘이라고? 무슨 이런 개 같은 일이?

다급히 세 장의 종이를 꺼냈다. 나와 시들링, 로웰라가 공중 정원의 벽화를 옮겨 그린 종이였다. 그 세 장의 1층 부분의 벽화를 남기고 접어 겹쳤다.

은둔자의 정원을 나타내는 듯한 섬의 그림, 그리고 그 섬을 덮치는 거대한 파도, 하늘엔 여러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파도가 일어나는 시점 위엔 동그라미가 검게 칠해져 있었다. 개기 일식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한 그림이었다.

“일식은 짧아…. 기껏해야 세 시간…. 해가 완전히 가려지면 그때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거야.”

섬 자체가 거대한 시한 폭탄이었다. 모든 사건이 경각에 달했다. 폭탄을 향해 달려가는 도화선이 점화되었다.

“애드너….”

레몬밤을 태운 모감주나무가 운 좋게 빠른 시간 내에 미지의 섬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다시 은둔자의 정원으로 드라이어드들을 태우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고려해야 했다.

또한 모감주나무의 배는 겨우 셋이 타도 꽉 찰 정도로 작았다. 레몬밤까지 태울 테니 기껏해야 가서 드라이어드 둘 정도를 데려올 텐데, 정말 그 드라이어드들이 섬의 모든 식물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

“애드너에게 연락해야 해! 큰 배를 준비해서 섬의 모든 인원을 태워야 해. 게다가 해일이 온다면 이 섬뿐만 아니라 해안가에 근접한 테라리움들도 위험할 수 있어.”

벽화에 그려진 예언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정말로 해일이 올까? 정말로 오늘일까? 어쩌면 개기 일식이 아니라 부분 일식일 수도….

“저런 광경을 본 적 있어?”

아직 극히 일부에 불과한 부분이 달에 잠식된 태양을 가리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세계의 일식이 내가 살던 세계의 일식과 같은 현상일지 알 순 없지만 운이 나쁘다면 더 빨리 진행될 수도 있었다.

불행히도 다들 처음 보는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부분 일식 정도는 그렇게 주기가 긴 편이 아니지 않아?

그런데 메스키트는 태양이 완전히 달에 가렸을 때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그녀가 전 주인과 함께 여행을 다녔던 아주 오래전에. 본 것도 아닌 들은 적이 있다고?

이러면… 결국 정말 운 나쁘게 오늘이 될 수도 있단 소리잖아? 왜 하필….

“그냥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방비하는 게 낫지. 배를 띄울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섬 밖을 오가는 드라이어드가 너와 발레리안 아이들뿐일 리가 없잖아.”

그들이 제물이랍시고 들고 왔던 수많은 재화들. 31번째 테라리움과 그 주변을 혼란에 빠뜨린 도난 사건이 짭신 엘더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벌인 드라이어드들의 소행이란 확신이 들었다.

섬에 축적된 향기를 옮겨 갈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뿌리는 것만으로도 로웰라를 단숨에 쓰러뜨렸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물, 진정 작용의 부작용으로 휘발되는 기억, 아무도 모르고 아무나 갈 수 없는 섬.

드라이어드들이 육지에서 도둑질을 벌이고 섬으로 피신해 버렸다면 행정 관리원의 감시망을 피해 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련의 단서들을 조합해 보면 결국 공중 정원을 향해 제물을 바치러 가던 드라이어드 무리가 육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인 도난 사건의 범인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허술해 보였던 발레리안 아이들이 아니라 다른 드라이어드들이라면 강한 드루이드들을 상대로도 충분히 행동할 수 있겠지.

“나 말고 바다를 건너는 능력을 가진 드라이어드가 더 있긴 해….”

“그럼 그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데려와. 해야 할 일이 있어. 다 죽기 싫으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라고 해.”

“…알았어.”

모감주나무는 황급히 어디론가 뛰어갔다.

“상황이 급박해 보이는데 가능하겠어요? 우리라도 섬을 떠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칼미아가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섬이 위험하다는 건, 섬에 있는 자신의 드루이드도 위험하단 뜻이었다. 드루이드를 아끼는 드라이어드들이 이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시들링.”

칼미아가 자신의 말에 동의해 달라는 눈빛으로 시들링을 바라보았다.

“남는다.”

“시들링, 자연 재해는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무리 강한 드라이어드와 좋은 장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해일에 맞설 수 있을 것 같아?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구니?”

하지만 시들링은 더 이상 칼미아의 질문에 답을 해 주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대신 내가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지. 벌써 포기하기엔 뒤에 남겨질 것들이 너무 크잖아.”

어쩌면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수많은 사람들과 아무것도 모른 채 섬과 운명을 같이할 수많은 생명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게임에선 그저 퀘스트 실패고 끽해야 배드 엔딩이지만…. 정말 단순히 그런 걸로 치부할 수 있을까?

얼마 후 모감주나무가 뛰어갔던 방향에서 드라이어드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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