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치지 않게 잘 들고 가야 해.”
좀 실전 경험이 모자란 드라이어드지만 얘한테 붙어 있는 게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안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잠자코 있던 시들링이 마거리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런 어리숙한 드라이어드가 하느니 차라리 내가 들겠다. 그녀는 위기 시 널 지킬 수 없다.”
그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안겨서 간다고? 난 지금 마거리트에게 안겨서 가는 것도 속으론 큰 결심을 한 건데? 내 떨어지는 체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기꺼이 최선의 방책을 선택한 건데 여기에 수치심까지 끼얹으라고?
“드라이어드에게 맞아 죽거나 계단에서 떨어져 죽는 걸 걱정하기도 전에 네 품에서 현타 와서 죽을 수도 있으니 됐어.”
내가 하는 말을 이해 못 한 시들링이 고개를 슬쩍 기울이다 답했다.
“널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런 뜻은 아냐. 여기 마거리트로 충분하고 너도 전투에 뛰어들 거 아냐? 차라리 빨리 쓸어 버리는 편이 낫지.”
그리고 나는 각오를 다잡고 마거리트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이런 일 눈만 감았다 뜨면 끝날 거다. 참는다. 마거리트가 더없이 환한 얼굴로 내 어깨를 둘러 안고 내 무릎 뒤로 다른 팔을 넣었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 들어 올렸다.
“나만 믿어!”
곧바로 후회가 되었다. 쪽팔림이 문제가 아니었다.
“꺄하하! 가자, 내 진리!”
“잠깐만! 야!”
날 홀랑 든 마거리트는 모두의 준비도 확인하지 않고 저 혼자 즉시 공중 정원을 향해 뛰었다. 땅을 박차는 그녀의 단화가 나비처럼 날랬다.
“너 혼자 가서 어쩌려고!”
열이 오른 엘더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런데…. 굳이 벌써부터 마거리트에게 안길 필요가 있었을까? 하도 흔들려서 마거리트의 어깨에 턱턱 머리를 부딪히다 보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
엘더 야생종이 있을 공중 정원의 꼭대기까지 오르는 데엔 예상대로 거친 반발이 있었다. 길을 지키는 드라이어드들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무기부터 꺼내고 덤벼들었다.
절대 자신들의 신 앞에 우리가 가도록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났다. 그중엔 모감주나무도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우릴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섬의 환경 덕에 제대로 여물지 못한 드라이어드들이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드루이드와 연결된 것도 아니니 더욱 그러했다.
개중에 가장 성장한 드라이어드들이라 해도 버틸 순 없었다.
그 어떤 드라이어드들보다 호전적이던 모감주나무조차 데이지가 가볍게 휘두르는 단도에 속수무책으로 꺾여 나갔다.
시들링은 벨라돈나까지 불러와 앞길을 트는 데에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녀의 등장에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이 건전지 빠진 장난감처럼 픽픽 쓰러졌다. 하지만 정작 벨라돈나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못마땅한 것처럼 보였다.
발레리안 아이들을 잡았을 때도 묘목 드라이어드들에게 힘을 쓴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 그녀는 강자에겐 한없이 강할 수 있고 약자에겐 약해질 수 있으나, 강력한 능력은 동등하게 자비가 없었다.
“시들링, 이런 일에까지 나를 부르지 말렴.”
벨라돈나는 아이를 어르듯 시들링에게 충고하곤 스태프를 품에 가까이 쥐었다. 그녀는 아마도 필드에 나와 그 자체로도 악영향을 뿌리는 것 외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은 내 드라이어드들과 어울려 전장을 미친 듯이 활개 치고 다녔다.
“차라리 상처 없이 강하게 제압해 의지를 꺾어 버리는 것이 저 드라이어드들에게도 더 나을 거랍니다.”
벨라돈나를 보며 찝찝해하고 있는 내게 메스키트가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드루이드가 조금이라도 생채기를 입는다면 돌변할 테죠. 이 모든 자비는 자신의 드루이드가 안전하다는 데에서 기인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아예 가능성이 싹트지도 못하게 제압해 버리는 것이 모두에게도 좋답니다.”
운 좋게 독에 내성이 있는 드라이어드가 벨라돈나의 힘을 이겨 내고 들어와도 메스키트가 내지르는 랜스나 시들링의 카돈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바람 앞 촛불처럼 스러져 갔다. 말 그대로 압도적으로 주변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여긴가…?”
압도적인 무위에도 상대들은 엘더 야생종을 신이라 강하게 믿고 따르는 만큼 좀처럼 포기할 줄 몰랐다. 오히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그렇기에 정상에 도착할 때까지 달려드는 드라이어드들을 쓰러뜨려야만 했다.
드디어 계단의 끝에 도착했을 때, 땅을 통째로 뜯어다가 하늘로 올려놓은 듯한 거대한 정원을 마주했다. 강한 꽃향기가 낭자하고 온갖 허브들이 규칙성 없이 잡초처럼 흐드러지게 핀 곳에 익숙한 꽃나무가 가로수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엘더 플라워. 정말 이곳에 엘더 야생종이 있다는 증거였다.
메스키트의 태양의 신전 가구에 비하면 신전이라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구색은 갖추려고 했던 듯 제법 하얀 돌기둥 두 개가 입구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지붕이라 하기에도 뭐하게 덩굴 식물이 얼기설기 얽혀 간신히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내려 달라고 어깨를 툭툭 쳐도 마거리트가 나를 끝까지 안고 있길래 보란 듯이 메스키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거리트는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며 못마땅한 얼굴로 내가 땅을 디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승차 거부는 봤어도 하차 거부는 처음 봤단 말이지.
“여기가 엘더 야생종이 있는 곳이자 로웰라가 잡혀 온 곳….”
안을 지켰어야 할 드라이어드들까지 죄다 우리의 행차를 막기 위해 동원됐는지 신전 주변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됐으면 우리가 왔다는 것도 알았을 거 아냐? 이제 슬슬 나오시지?”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어차피 이 넓은 정원에 건물이라고 해 봤자 조악한 신전 하나뿐이었다. 안이 미로처럼 복잡해 보였지만 벽이 보여도 뚫고 가는 식으로 다 밀어 버리면 끝까지 도달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무례하고… 천박하구나.”
그때였다. 안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박사박 천이 부드럽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새하얀 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엘더의 어깨를 맴돌던 나비가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미줄에 걸렸다가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익숙한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새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긴 백발이 베일처럼 흔들렸다. 금테와 흰 꽃을 두른 후드. 웨딩드레스처럼 새하얀 로브가 발끝부터 어둠 속에서 천천히 드러났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녹음을 담은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증오를 가득 내비치며 날 바라보았다. 저 눈이 저런 식으로 날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자연 발생 여성형 엘더 플라워. 그녀는 내가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찬양하는 엘더의 미모만큼 아름다웠다. 정말로 신이 강림한 것처럼 눈부신 후광도 보였다. 엘더를 열매에서 개화시킬 때처럼 기절할 만큼 강렬한 아름다움이었다.
다만 봄을 맞이하며 녹아 가는 늦겨울의 따뜻한 눈과 같은 우리 엘더와 다르게, 저쪽은 서리가 내린 한겨울의 차가운 호수처럼 냉랭한 아름다움이었다.
빠드득.
엘더가 스태프를 부러질 정도로 힘있게 쥐었다. 그가 쥐고 있는, 하얀 꽃이 눈덩이처럼 소복이 모여 있는 스태프를 다른 엘더도 똑같이 들고 있었다.
두 엘더 플라워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눈에 드러난 감정은 분명했다. 동족 혐오.
거만한 눈과 경멸이 담긴 눈이 허공에 스파크를 일으킬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동족끼리 마주쳐서 저렇게 극심하게 반발하는 건 처음이었다. 우리 데이지를 보자마자 냅다 절이라도 할 것처럼 굴었던 데이지2와 판이하게 달랐다. 엘더 플라워들은 전생에 서로가 원수였니? 아무리 적으로 만났다지만 정도가 과한 것처럼 보였다.
“정말 똑같죠?”
이 상황에서도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메스키트가 내게 물었다. 그녀는 단순히 서로의 생김새가 같다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었다. 성격도 아주 똑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날 처음 만났을 때의 엘더를 생각하면…. 그녀의 말에 일말의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아마 상황만 달리 놓고 내가 저 여성형 엘더를 처음 만났다 하더라도, 우리 엘더의 반응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감히 더러운 흙발로 내 신전에 들어오다니. 당장 여기서 꺼져.”
목소리마저 엘더와 톤이 다른 것 외에 흡사했다.
“지금 바로 조용히 섬을 떠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네가 자비를 논할 상황이야? 넌 곧 나한테 죽었어. 아니 죽이면 안 되지. 끔찍하지만 내 포레스트로 들여와 내 발밑에 둬 주마.”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털 세운 고양이처럼 굴던 엘더가 평정심을 찾더니 본래의 싹수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너 따위가 내 왕이 되겠다고?”
짭신 엘더가 가소롭다는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당장 전투라도 벌어질 듯한데 이쪽은 긴장이 팽배한 것과 다르게 저쪽은 아무런 태세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며 거룩한 사제처럼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 여기서 다들 떠나지 못해? 다 나가라고!”
그리고 우리를 쫓아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단순히 우리가 쳐들어왔기 때문이라기보단 뭔가 강박에 가까웠다.
“로웰라를 내놔.”
그녀를 바라보며 우리가 여기 오게 된 최선의 목적을 내뱉었다. 너희가 납치한 로웰라는 어딨어?
“그 드루이드를 말하나 보군. 너희가 원하는 것이 그 저주받은 인간이라면 섬을 떠나는 즉시 돌려주겠다. 바다에 던져 놓을 테니 알아서 건져 가거라.”
“저게 진짜….”
“말로 해선 안 되겠는데?”
“당장 떠나.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걸어온 방향을 힐끔 바라보았다. 거만함에 뒤덮여 있던 얼굴에 일순 불안감이 어렸다. 이 섬의 최정점에 군림하고 있다는 신이 보일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