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0/604)

로웰라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초보나 다름없는 아이의 호언장담을 대체 뭘 믿고 넘긴 거야.

그녀가 실망하더라도 곁에 붙잡아 두고 설득했어야 했어. 내 판단 때문에 로웰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라도 한다면…. 불안감에 꾹 다문 입가가 작게 떨렸다.

로웰라는 뉴비 시절부터 힘이 센 드라이어드들로 무장한 나와 출발점이 다른데. 이런 위험한 모험에 홀로 뛰어들기엔 아직….

“그만. 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아요.”

갑자기 메스키트의 묵직한 건틀릿이 어깨에 내려왔다. 무게와 다르게 더없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드루이드를 혼자 보낸 자신을 탓하고 있는 거죠? 그건 제이의 잘못이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드루이드가 다듬어지지 않은 여행길을 떠날 때 제이처럼 다정한 이에게 보호받지 않아요. 드루이드가 안락한 테라리움을 벗어나 길을 떠났다는 건 그걸 모두 감안했다는 거예요.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일이 생기게 한 진정한 원인을 탓해야지, 그 드루이드에게 믿음을 보여 준 제이의 태도를 탓해선 안 돼요.”

“그래, 메스키트의 말이 맞아. 네가 억지로 등 떠민 게 아니잖아. 이러지 말고 빨리 그녀를 찾으러 가자.”

단호함이 섞인 메스키트의 말 뒤로 엘더가 덧붙였다.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난 배처럼 불안감이 요동치던 마음속이 둘의 말에 천천히 진정되어 갔다.

“알았어. 일단 로웰라를 찾는 게 먼저지.”

서둘러 로웰라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갔을 때 보았던 사람들이 사는 석굴 같은 집들이 좀 더 밀집해 있었다. 앞서 보았던 장소보다 마을다운 모습이었다. 다만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우릴 보고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황급히 대피하는 것은 똑같았다.

이곳엔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로웰라에겐 과격한 무기를 사용하는 엉겅퀴가 있었다. 그 드라이어드가 전투를 할 땐 주위에 거대한 톱날이 훑고 지나간 흔적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 엉겅퀴가 능력을 펼쳤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웰라가 순순히 따랐거나 그 엉겅퀴를 단숨에 제압할 실력자가 있다거나….

아니, 꼭 그렇게만 보지 말자. 어쩌면 로웰라는 어디 숨어 있거나 너무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을 수도 있어. 아니면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어서….

“로웰라!”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자 내 드라이어드들이 따라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곳곳에 그녀의 이름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들리면 이젠 돌아와!

하지만 걸음을 옮기는 내내 그녀를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더 이상 예의를 차리거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일 필요가 없었다. 우리를 겁내는 사람들이기에 최대한 마주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주변에 보이는 아무 집이나 골라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보통 나무로 만든 문이 아닌지 내려치는 주먹이 아팠다.

“계세요? 저기요, 아까 사람 들어가는 거 봤어요! 말 좀 물을게요!”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지만 굳게 닫힌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여기에 여자애 하나 왔었죠? 머리는 단발에 가죽 장비를 입고 있는 애예요!”

반응이 없으니 바로 옆집에 가서 똑같이 문을 두드렸다.

“드라이어드 둘을 데리고 있어요. 외부인이니 바로 눈에 띄었을 거 아니에요? 이상한 짓 안 하고 그 애만 찾으면 갈게요!”

반응이 없으면 다음, 또 다음 집을…. 하지만 외부인에 대해 배척이 심한 사람들은 절대로 협조해 주지 않았다. 로웰라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간만 하릴없이 흘렀다. 그렇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억지로….

“안 돼, 앙코라! 돌아오렴!”

누군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동시에 우리의 앞에 왜소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마치 햇빛을 한 번도 못 보고 산 것처럼 파리했지만, 독특한 은색 눈은 밤에 확고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별빛처럼 빛났다.

아이의 뒤로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 아인…. 세계수의 축복을 품고 있군요.”

메스키트가 자신의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드루이드라고? 하지만 이 섬의 드루이드들은 모두….”

“신이 데려갔어요.”

아이는 날 올려다보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좀 더 자세히 말해 줄래?”

이 아이는 로웰라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다!

“드라이어드와 말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는 거죠? 신이 보낸 꽃들이 데려가는 걸 봤어요. 신은 자신의 제물을 다른 이가 뺏어 간 것 때문에 화가 났다고 했어요. 신이 보낸 꽃이 그 사람을 향해 무얼 뿌리자 그 사람은 바로 쓰러졌어요. 그래서 다들 들쳐 업고 가 버렸어요.”

아이에게서 우릴 두려워하던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이 본 것을 떨림 없이 우리에게 전했다.

“어디로 갔는데?”

아이는 거대한 공중 정원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엘더 야생종이 기거하고 있다는 곳이었다.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커다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우리와 아이 사이를 갈랐다.

“이리 와! 집 밖에 나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러다 너도… 너도 잡혀가게 되면….”

여자는 부리나케 자신의 아이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우리가 봤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아이는 마치 자신이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것처럼 반항 없이 여자의 품에 안겼다. 엄마의 뿌리침을 피해 돌발 행동을 벌였던 것과는 상반된 태도였다.

“제발… 제발 이 아이에게서 들은 걸 비밀로 해 주세요. 아니 아예 보지 않았다고 생각해 주세요. 제발….”

아이와 똑같은 은색 눈엔 공포가 가득했다. 그녀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우리에게 애원했다. 드루이드를 저주받은 자라 칭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모두 사냥당한다고 했지. 아이의 엄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요.”

내 말을 들은 아이의 엄마가 황급히 그녀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집 밖에 나온 유일한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드루이드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사는 건가?

하지만 그 앙코라라는 아이는 밖으로 노출되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로웰라를 찾고 나면 그 아이의 성의를 봐서라도 이 섬을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단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든….

“가자. 본때를 보여 줘야지. 이젠 신 노릇도 끝이야. 엘더, 단숨에 무릎 꿇려 버려.”

감히 로웰라를 건들다니. 어차피 엘더의 포레스트에 영입시켜야 했지만 곱게는 못 올 줄 알아라. 대체 이 섬에 얼마나 일을 벌여 놓은 거야.

수백, 아니 수천 개는 되어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공중 정원의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이 섬의 신이 있는 곳이니 가는 길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단숨에 돌파해야 했다.

아티팩트에서 데이지를 불러왔다. 몇이나 되는 드라이어드를 상대하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내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시들링까지 가세한다면 분명 어렵지 않은 일일 거라 자신한다.

그런데 흩날리는 붉은 꽃잎에 눈치 없이 하얀 꽃잎이 섞여 있었다.

“나만 두고 가지 마!”

잊고 있었던 마거리트가 데이지의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조용하다 싶었더니…. 마거리트를 바라보는 메스키트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너무해! 메스키트는 더 너무해! 나 혼자 테라리움의 모든 건물의 먼지를 어떻게 다 닦아? 이게 어떻게 수련이 될 수 있어? 그리고 그걸 다 하기 전까진 내 진리를 보러 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니! 난 진리를 하루도 못 보면 말라 죽는 병에 걸렸단 말이야!”

세계수에 있을 땐 안 보고 잘 살았잖아.

마거리트는 안고 있던 데이지의 허리를 홱 놓아 버리고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난 반사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흉기나 다름없는 모자챙이 내 목을 꾹꾹 눌렀다.

마거리트는 그러곤 우는 소리를 내며 자신이 어떤 부당함을 겪고 있는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마치 동화 속 가련한 신데렐라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메스키트 쪽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제가 밖으로 나오면 더 이상 감시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없어서….”

데이지가 메스키트를 보며 난처하단 얼굴을 했다.

마거리트가 아티팩트에서 조용히 잘 있는다 싶었더니…. 메스키트가 있을 땐 무서워서 못 나오고 데이지가 있을 땐 힘으로 이길 수가 없으니 못 나왔나 보다. 그동안 메스키트가 시킨 수련을 하며 굴려지고 있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가막살나무는…. 진작 그녀에게 두 손 다 들었으니. 최후까지 쓰러지지 않는 강인한 방어형 드라이어드지만 쉴 새 없이 정신을 뒤흔드는 그녀의 징징거림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는 어린 드라이어드에게 너무 유해서 문제랍니다.”

칭찬이 아닌데도 마거리트가 얼굴을 붉히며 헤헤 웃는다.

“다시 데려가 묶어 놓을 드라이어드가 없으니 별수는 없지만… 이곳에서까지 멋대로 행동할 거라면 기절시켜서라도 돌려보낼 테니 주의하렴. 아예 쓰러진다면 묶어 놓을 필요도 없겠지.”

메스키트가 마거리트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말이 가지는 위력은 대단해서 마거리트가 바짝 얼어붙었다. 메스키트라면…. 정말 말 안 듣는다고 쥐어 패서 아티팩트로 돌려보낼지도 몰라….

마거리트는 목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날 더 끌어안았다. 그 가공할 힘에 내 숨소리가 스타카토로 끊길 정도였다.

아무리 이 중에서 가장 약한 드라이어드라고 해도 드라이어드는 드라이어드니까….

“마거리트가 전투에 나서거나 허튼짓할 일은 없을 거야.”

“역시! 내 진리는 날 믿는 거지?”

마거리트가 화색을 띠며 날 바라보았다.

“다른 일을 시킬 거거든.”

“다른 일?”

그녀는 물론 다른 이들도 궁금증을 가득 담은 눈을 했다. 이 사고뭉치를 어떻게 할 거냐고?

“들어.”

마거리트를 보며 메스키트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응? 들으라고?”

그녀는 귀에 손을 대고 내게 바짝 붙었다.

“아니 날 들라고. 내가 저 계단을 제 발로 어떻게 올라가겠니. 중간에 힘이 다해 굴러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마침 잘됐어. 마거리트가 힘이 세니까 잘 들고 가면 되겠다. 이 중에서 마거리트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잘할 수 있지?”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전투를 하느라 바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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