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9/604)

“앗, 알았어. 도와줄게. 그러니까 일단 이건 좀 놓고….”

로웰라가 입고 있는 초보자 장비는 셔츠 위에 가죽 베스트를 입는 형식이었는데, 레몬밤의 손아귀에 빳빳한 가죽이 주름질 정도로 접혔다. 역시 어려 보여도 드라이어드는 드라이어드였다.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니다.

짤짤 흔들리던 로웰라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레몬밤을 말렸다.

“섬에 큰일이 난다니 무슨 일이야? 전부 떠나야 한다니?”

“제…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건가요?”

레몬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절박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누가 위기의식을 못 느끼겠니?

“어떤 연유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려 줄래? 이곳엔 드라이어드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살고 있어. 큰일이 난다면 얼른 그들을 대피시켜야 하는 것이 맞지.”

“저… 저는 봤어요. 섬에 큰 재앙이 닥칠 거란 걸 봤어요.”

설마… 레몬밤이 마거리트와 같은 과인가?

“예언을 했다는 거야?”

“아… 아뇨. 그런 대단한 건 못 해요. 그림? 아니 문자?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돌에 새겨진 무언가를 봤는데… 그게 섬에 엄청난 해일이 덮쳐서 모든 것을 쓸어 버릴 거라고 했어요.”

“해일…? 그 말이 사실이야?”

그럼 단순히 이 섬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섬의 모든 것을 쓸어 버릴 정도라면 근처에 있는 31번째 테라리움도 위험했다. 아니 어쩌면 해변가에 있는 모든 테라리움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메스키트가 매서운 눈으로 레몬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봤다는 무언가가 새겨진 돌은 어디에 있죠? 그런 대재앙을 예언하는 기록이 정말 있다는 건가요? 직접 보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그게….”

레몬밤이 쉽게 말을 못 하고 주춤거렸다.

“그게…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전 그때 너무 맞아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고…. 시야가 흐릿했고….”

아이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로웰라도 놀라서 입을 가리며 숨을 크게 삼켰다.

세상에…. 이 섬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대체 얼마나 학대를 당하고 있었던 거야?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라고. 섬 밖의 드라이어드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데!

“그때 봤는데 하늘에 커다란 돌이 떠 있었고… 그 돌에 금빛으로 빛나는 그림이 있었는데… 거기에 분명….”

레몬밤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모두들 그녀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환각이 아니었어요! 전 분명 봤어요! 그건… 제가 반드시 섬에 있는 모두를 대피시켜야 한다는 계시 같은 거였을 거예요!”

메스키트는 물론 로웰라까지 나를 바라보았다. 레몬밤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처럼 보였다.

레몬밤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정말로 엄청난 해일이 올 예정이라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너무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했다. 적어도 레몬밤이 봤다는 금빛으로 빛나는 그림이 새겨진 돌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모를까.

잠깐…. 금빛과 돌? 이 섬에 왔을 때 비슷한 걸 본 적 있지 않나? 반사적으로 공중 정원을 올려다보았다. 둥근 층 벽면마다 금을 부어 만든 화려한 문양. 하지만 규칙성이 없는 문양이 눈에 띄었다. 우연일까? 단순히 어마어마한 돈지랄일까? 아니면….

문양을 좀 더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천천히 뒷걸음질 쳐 공중 정원에서 멀어졌다. 너무 커서 웬만큼 거리를 벌리지 않고는 무리일 듯싶었다.

훌쩍 뒤로 물러나 양 손바닥을 펴 주위의 풍경을 가리고 문양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레몬밤이 저 문양을 통해 무언가를 읽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고대 문자 같은 걸까?

그러고 보니 중앙의 커다란 공중 정원 외에도 양옆의 작은 공중 정원 두 개의 둥근 층 벽면에도 문양이 있었지?

“뭐 하는 거야?”

내가 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며 엘더가 물었다.

“아니 레몬밤의 말을 듣고 뭔가 떠올라서.”

엘더가 정신 놓고 바라봤던 금빛 문양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걸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공중에 떠 있고 돌과 금빛 문양이라고 하니 혹시나 해서….”

다들 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문자라 하기엔 너무 조잡하고 그림이라 하기엔 딱히 뭘 나타내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좀 더 멀리 가 볼까?

공중 정원과 멀어지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다들 잠자코 나를 따라왔다. 아마 다들 내가 하는 의심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마을을 가로지르고 한참을 걸어 거대한 유리 돔의 출입구까지 왔다. 레몬밤이 있긴 하지만 유리 돔 밖으로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멈춰 섰다. 이번엔 세 개의 공중 정원을 한눈에 담아 보려고 노력하며 열심히 살폈다.

“어?”

집중하다 초점이 살짝 몰렸는데 무언가 기묘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레몬밤이 말하길 시야가 흐릿했다고 했지? 설마 저 세 개의 공중 정원을 겹치면?

각각의 공중 정원 맨 아래층의 벽면을 왼쪽, 중앙, 오른쪽 순으로 아래서 위로 블록 쌓는 것처럼 하나로 모으니 어떤 그림이 완성되는 듯했다.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위에서 아래로 한 층씩 대충 문양을 베껴 그려 보았다.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개발새발로 그렸지만 언뜻 그럴싸한 그림이 되어 있었다. 옮긴 문양을 합치니 섬을 표현하는 듯한 그림이 나왔다.

‘이거다!’

나는 내가 그림을 그린 종이를 모두에게 보여 주며 아무래도 레몬밤이 봤다는 벽화가 공중 정원의 층에 새겨진 그림을 말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단순히 부를 자랑하기 위해 금으로 장식을 한 것이 아니라…. 저게 전부 벽화였다고?”

“저 거대한 건축물에 새길 정도면 엄청 중요한 내용이 아닐까? 어쩌면 레몬밤의 말처럼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어.”

갑자기 엄청난 중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대체 누가, 어떻게, 무슨 생각으로 저 거대한 벽화를 남긴 거지?

“그런데 문제가 있어. 여기서 보이는 건 한 면일 뿐만 아니라 층마다 벽화가 있어. 1층은 1층끼리, 2층은 2층끼리, 3층은 3층끼리 이어지는 것 같아. 그러니까 벽화가 담고 있는 모든 내용을 살피려면 각 층에 새겨진 모든 문양과 보이지 않는 면에 새겨진 문양을 옮겨 와야 해.”

중간층의 문양을 대충 옮겨 그리니 사람을 나타내는 듯한 그림이 나왔다. 어쩌면 벽화는 레몬밤이 말하는 섬에 닥칠 대재앙에 대한 것 외에도 다른 무언가를 나타내고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언니, 종이랑 펜 더 있어? 내가 오른쪽으로 쭉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문양을 옮겨 올게.”

“혼자 가려고? 그럼 너무 위험한데.”

“에이, 아까 언니네 드라이어드가 모두 사라지래서 다들 도망갔잖아. 내가 가려는 곳은 게네들이 도망간 곳과 반대 방향인데다가 우리에겐 하루밖에 시간이 없으니 각자 나눠서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 나 손 빠르니까 금방 옮겨 올 수 있어. 이거 봐 봐.”

내가 애를 먹었던 것과 달리 로웰라는 순식간에 벽화를 옮겨 그렸다. 솜씨도 제법 좋았다.

“봤지? 순식간에 완수하고 올게!”

그래도 어쩐지 혼자 보내기엔 찝찝하단 생각이 들었다.

“엉겅퀴도 있으니까 정말 괜찮아.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 엄청 크게 지를게. 나 목청도 좋아. 아마 저 반대편에서도 내가 소리 지르는 거 다 들릴 거야.”

로웰라는 진심으로 자신이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 조급함도 느껴졌다.

만약 섬을 떠나게 된다면 30번대 테라리움에서의 여행은 끝이 날 터였다. 그렇다면 로웰라와의 동행도 끝이 난다. 그녀는 아마 그 전에 자신이 짐이 아니라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듯했다. 그 의지는 우리와 더 여행을 하고 싶다는 소망에서 피어나는 것이겠지.

“그래, 알았어. 하지만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난 시들링에게도 로웰라에게 준 것처럼 종이와 펜을 넘겼다.

“그럼 시들링이 저 반대편에 가서 그려 오는 걸로 하자. 내가 여기서부터 왼쪽으로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문양을 옮기고. 그러니까 넌 딱 오른쪽에 있는 벽화만 베껴 오는 거야.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응!”

로웰라가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좋을까?

그녀는 레몬밤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오른쪽 벽화를 옮기러 떠났다. 레몬밤을 챙기는 것이 꼭 자신의 드라이어드를 챙기는 것처럼 보였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로웰라에게 내가 가진 설익은 열매를 나눠 줄까? 어쩌면 레몬밤은 로웰라의 곁에 있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시들링도 종이와 펜을 들고 중앙을 가로질러 갔다. 사실 시들링이 향하는 곳은 드라이어드들이 도망간 곳이었다. 쟨 강하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늦지 않게 벽화를 모두 옮길 수 있도록 자리에 주저앉아 허벅지에 종이를 대고 바삐 손을 놀렸다.

“너 그림 진짜 못 그린다.”

내 옆에 따라 쭈그려 앉은 엘더가 웃음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수업 받을 때도 교수님이 칠판에 그린 그래프나 도형을 그대로 필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이게 뭔가 싶을 때가 많았다. 결국 폰을 꺼내 칠판을 그대로 사진 찍는 방법을 택하긴 했지만. 확실히 난 뭘 그리는 데엔 소질이 없어. 없어도 너무 없지.

“저거랑 이거랑 정말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엘더가 벽화와 내 그림을 번갈아 가리키며 웃었다. 좋은 놀림거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수시로 쫑알댄다.

“네가 내 그림 실력에 보태 준 거 있어? 내가 그림을 잘 그렸으면 네 예쁜 얼굴을 제일 먼저 그림으로 박제해 놨을 거다. 어디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어야지.”

연예인 포토 카드 품고 다니듯 품고 다닐 거야. 힘들 때 부적처럼 꺼내 보고.

“그럴 필요가 있어?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건데. 그냥 옆에 있는 날 직접 보면 되잖아.”

“그건 그렇지….”

요놈 잔망 떠는 것 좀 보게. 확실히 그림보단 실물이 백배 천배 훨씬 낫지.

자리를 조금씩 옮겨 가며 한참을 끙끙대고 벽화를 옮기고 있는데, 어느새 반대편으로 넘어갔던 시들링이 돌아왔다.

“뭐야, 벌써 왔어? 대충 그려 온 거 아냐? 내용을 해석하려면 적어도 알아보게….”

시들링이 아무 말 없이 그림이 가득 그려진 종이를 건넸다.

어이가 없네? 넌 나와 같은 수준이어야 하는 거 아냐?

벽화를 그대로 찍어 왔다고 믿을 만큼 뛰어난 솜씨였다. 온몸에 진득한 패배감이 가득 찼다.

“넌 안 그렇게 생겨서 왜 이렇게 잘 그려?”

“…원한다면 다시 그려 오겠다.”

내 울분 섞인 물음에 시들링이 주춤하더니 종이를 다시 받아 가려고 했다.

“됐거든? 그런데 반대편까지 넘어간 너도 돌아왔는데 왜 로웰라는 안 오지?”

손이 빠르다고 했는데?

로웰라는 내가 그림을 다 그리고 한참 기다릴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 불길했다. 역시 혼자 보내면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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