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604)

그렇지. 어린 드라이어드들은 여기 있는 엘더가 자신들의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중앙의 공중 정원으로 향하던 드라이어드 무리에서 소란이 발생했다.

“어? 저기 싸움 난 것 같은데.”

로웰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싸움이라기보단 하나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에 가까웠다.

모감주나무가 그들을 구경하러 몰려든 드라이어드 중 하나를 향해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깨까지 오는 물빛에 가까운 하얀 머리를 반묶음 하여 커다란 녹색 리본을 달고 있는 드라이어드였다.

뒤이어 발레리안 아이들 뒤에 서 있던 드라이어드가 하얀 드라이어드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작은 드라이어드가 속수무책으로 맞아 넘어졌다.

“저 작은 애를 때리다니!”

내가 말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로웰라는 곧 튀어 나갈 것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엘더 찬스를 쓰긴 했으나 외부인에 대해 부정적인 드라이어드들 앞에 나서긴 조심스러워졌다. 더구나 저기엔 우릴 향해 강한 적대감을 숨김없이 뿜어 대던 모감주나무도 있었다.

무턱대고 내가 정의감을 내세웠다가 팀 전체가 위험해질 뻔했던 카나비스 사건을 떠올리니 행동하기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때 일을 전혀 후회하진 않지만.

“아, 레몬밤이네. 주제도 모르긴.”

우리의 곁에 있던 어린 드라이어드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주받은 꽃이 감히 신님께 진상하러 가는 신성한 꽃 무리에 다가가다니.”

“제물이 저주라도 받으면 어떡해.”

“평소처럼 숨어 있기나 하지. 모감주나무에게 걸려서 죽기 직전까지 맞겠네.”

“저주?”

내가 의문을 표하자 이야기를 주고받던 어린 드라이어드들이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드루이드를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저 하얀 애는 아무리 봐도 드라이어드인데?

“저 애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거든요….”

이 섬의 드라이어드들은 밖의 드라이어드들과 다르게 일반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저 레몬밤이란 하얀 꽃은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는다라….

드라이어드와 말이 통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반대의 경우도 저주를 받은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긴 전부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이니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유별난 꽃 하나가 배척받는 것이 이해가 갔다.

“저러다 큰일 나겠어!”

말릴 새도 없이 로웰라가 엉겅퀴와 함께 달려 나갔다.

땅에 쓰러진 레몬밤을 향해 무기를 꺼내던 드라이어드를 향해 로웰라가 소리쳤다.

“멈춰!”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이마를 짚었다. 로웰라가 엉겅퀴 하나로 저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녀를 뒤따라갔다.

엉겅퀴는 거친 톱을 꺼내 레몬밤을 둘러싼 드라이어드들 향해 가로로 휘둘렀다. 위협적인 공격에 모두가 훌쩍 물러났다. 로웰라는 쓰러진 레몬밤을 온몸으로 보호하며 소리쳤다.

“이렇게 작은 드라이어드에게 여럿이 무슨 짓이야!”

“넌 또 뭐야? 설마 드루이드야? 드루이드가 여기 왜 있어!”

“외부인인가?”

“넌! 섬 밖에서 만났던 드루이드 중 하나잖아?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로웰라를 알아본 모감주나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무기를 꺼냈다. 그녀는 우리에게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정말 죽여 없애 버릴 심상인 것으로 보였다.

모감주나무를 따라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금방이라도 큰 싸움이 날 것처럼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지만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신… 신님께서….”

그들이 나를 따라온 엘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물을 들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앞다투어 엘더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엘더를 향해 자신들이 든 것을 내밀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엘더는 본 주인이 따로 있는 물건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욕심이 아주 그득그득 담긴 손짓이었다.

상자와 주머니 안엔 온갖 반짝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다이아는 물론 각종 장신구와 유리 세공품 등 반짝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처럼 가격을 상관하지 않고 잡다한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엘더.”

내 부름에 엘더는 주춤하며 아주 느릿하게 손을 물렀다.

“신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번 출항에선 신님께서 좋아하시는 다이아를 많이 구할 수 있었습니다. 부디 이 제물들을 받으시고 저희를 안전하게 지켜 주세요.”

로웰라를 향해 칼을 들이밀던 모감주나무가 황급히 달려와 말했다. 그녀는 좀 전까지 전투를 벌이려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레몬밤이나 로웰라는 물론 엘더의 곁에 있는 우리도 무시하고 있었다.

엘더 야생종이 만들어 놓은 신이라는 이미지가 정말로 대단했나 보다.

엘더가 날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건네진 것들을 받으라는 식으로 눈짓했다. 엘더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레리안 아이들이 들고 있던 다이아가 가득 담긴 상자에 손을 뻗었다. 뇌물을 탐내는 탐관오리의 얼굴이 저러할까 싶었다.

“신님께서 이곳에 발걸음을 하셨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너희가 너무 늦었으니까.”

엘더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엘더는 다이아를 한 알 꺼내 만족스럽게 살펴보았다.

“그럼 신전까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됐어. 전부 여기다 두고 모두 사라져.”

모감주나무를 비롯한 몇몇 드라이어드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엘더의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신 노릇을 하고 있는 엘더 야생종은 공중 정원 꼭대기에 머물며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뭐 하고 있어?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야?”

어찌 저렇게 뻔뻔하게 연기를 잘할까? 아니, 행동이나 말투는 평소의 엘더 그 자체였다.

엘더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드라이어드들이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닙니다. 얼른 사라지겠습니다!”

그들은 엘더의 발아래에 제물들을 내려놓고 황급히 멀어졌다. 우리 곁에 있던 어린 드라이어드들도 엉거주춤 움직이며 우리와 거리를 벌렸다.

그런데 드라이어드들이 가는 길에 로웰라가 보호하고 있는 레몬밤까지 끌고 가려고 했다. 놔주지 않으려는 로웰라와 데려가려는 드라이어드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거 놔! 얘를 데려가서 어쩌려고 그래? 또 때릴 거잖아!”

“감히 저주받은 꽃이 신님 곁에 있으려고 하다니!”

“그 녀석도 두고 가.”

하지만 이번 엘더의 명령은 너무나 맞지 않았나 보다. 흩어지려던 드라이어드들도 멈춰서 놀란 표정으로 엘더를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신님께선 저 저주받은 꽃이 신님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즉, 진짜 신이라면 그들에게 하지 않았을 명령이었던 것이다. 엘더가 곤란하단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렇다고 명령을 무르고 데려가라고 하기엔 레몬밤이 이후에 당할 일이 뻔했다.

로웰라가 중간에 구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크게 다쳤을 것이다. 저들은 아마 레몬밤을 데려가서 못다 한 구타를 마저 하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애를 보내겠어.

“직접 한다고 해…”

엘더에게 소곤소곤 작게 말하자 재빨리 엘더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처리한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불결하시다고….”

“내 명령을 무시하는 거야?”

반론을 내세우던 드라이어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보호받고 싶지 않나 봐?”

그 말이 가진 위력은 대단했다. 드라이어드들은 레몬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뒤도 보지 않고 우르르 사라졌다.

드라이어드들이 사라지자 구경 나왔던 사람들도 다시 우르르 집 안으로 숨어 버렸다.

다만 발레리안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를 오래 바라보다가 떠났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들, 자신들의 신에게 칭찬받을 생각으로 들떠 있었는데 거짓으로나마 적당히 치사를 해 줬어야 했던 걸까?

“괜찮아? 다친 곳은 아프지 않아?”

로웰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레몬밤을 살폈다. 드라이어드가 다쳤다면 엘더가 봐 줄 필요가 있기에 그쪽으로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포션도 꺼냈다.

“아… 언니…. 단독 행동해서 미안해. 나도 모르게…. 앞으론 조심할게. 정말이야.”

로웰라는 날 보고 깜짝 놀라며 죄지은 표정을 지었다. 뭐, 의논 없이 나선 것은 잘못했지만 위험에 빠진 어린 드라이어드를 구하러 간 행동이니 크게 혼낼 수도 없었다.

어쩌면 로웰라가 행동하기 전, 내가 먼저 나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레몬밤 드라이어드가 계속 맞고 있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거야. 괜찮다며 로웰라에게 포션을 건넸다. 네가 대신 뿌려 주렴.

로웰라의 품에 숨어 있던 레몬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로웰라의 옷깃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보였다.

“엘더, 다이아는 그만 챙기고 저 아이 상처 좀 봐 줘.”

“이것만 더….”

“내가 또 줄게.”

엘더가 그제야 제물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레몬밤에게 다가간다. 아니 네 주인이 마르지 않는 다이아 샘인데 왜 저런 얼마 안 되는 다이아에 집착하는 거니? 내가 널 없이 키웠니?

“어디 봐. 내가 이런 인연도 없는 꽃까지 치료해 줘야 하다니.”

엘더는 툴툴대며 손에서 하얀빛을 뿜으며 레몬밤을 치료해 주었다. 전투에서 입는 상처보단 약했지만 영혼의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드라이어드다 보니 치료가 오래 걸렸다.

“당신은… 신님이 아니시죠?”

그런데 레몬밤이 불쑥 엘더를 향해 물었다. 그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섬의 모든 드라이어드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엘더를 자신들이 따르는 신이라고 믿었는데?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 질문에 레몬밤은 어깨를 떨었다.

“사람과 대화를 해 보는 건 처음이에요….”

드루이드는 모두 드라이어드에 의해 사냥당했다고 했지…. 그 말은 정말 죽였다는 걸까?

“제가 아는 신님과 많이 다르게 생겼어요…. 저런 느낌이 아니라….”

레몬밤은 엘더와 바곳, 그리고 시들링을 순서대로 가리켰다.

“이런 느낌이에요”

뒤이어 나, 메스키트, 로웰라를 순서대로 가리켰다.

“응? 무슨 뜻이야? 나랑 언니처럼 생겼다고?”

“어? 설마…. 너희가 따르는 엘더 플라워가 여성형이란 거야?”

“여성형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많이 다르게 생겼어요.”

레몬밤이 가리켜 나눈 기준에서 차이점은 성별뿐이었다. 세상에! 엘더 야생종이 여성형이었다니. 빨리 보고 싶다! 우리 엘더처럼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니 그런데, 성별이 다른데 어떻게 다들 깜박 속은 거지?”

“드라이어드에게 본래 사람들이 나눈 성별이란 기준은 무의미하니까 그렇답니다. 아마 이 묘목 아이는 유일하게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드라이어드라고 하니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받았겠지요.”

메스키트가 내 말에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내 말이 통하는 사람…. 내 말을 들어주는 드라이어드…. 그렇다면 도와주세요! 곧 이 섬에 큰일이 일어나요! 모두 섬을 떠나야만 해요!”

레몬밤은 로웰라를 붙들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