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4화 (204/604)

배를 혼란에 빠뜨린 향기가 완전히 물러간 것을 느꼈다. 그래프트의 여파로 배를 감싼 안개와 더불어 하얀 꽃송이가 갑판 위에 내리다 만 눈처럼 쌓여 있었다.

무릎에 손을 짚고 버티던 애드너는 완전히 기운을 차렸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몸을 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바닥에 흩뿌려진 꽃을 신발 앞 코로 툭툭 치워 냈다. 마치 쓰레기를 치우는 듯한 행동이었다.

애드너는 피가 굳은 입술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상한 향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이젠 달콤한 향기가 가득하군. 나쁘지 않은 느낌이야.”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갑판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난 청소 중이었는데.”

“아니 세상에! 언제 여기까지 나오게 된 거야?”

로웰라도 엉겅퀴의 무릎에서 머리를 떼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미니 주춤거리며 맞잡았다.

“어… 난 낚시하는 걸 구경시켜 준대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왜 이러고 있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혹시 내가 뭘 했어? 난 아라트 씨를 따라서 걷다가…. 이렇게 갑자기 누워 있고… 언니가 내 눈앞에 나타났어.”

그새 선원들과 이름까지 텄다니…. 참 대단한 친화력이다.

“그럼 배 안에 이상한 꽃향기가 퍼졌던 건 기억나?”

“향기? 글쎄… 지금 맡아지는 달콤한 향기밖엔….”

로웰라는 물론 다른 선원들의 반응이 모두 똑같았다. 다들 이상한 향기에 홀렸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기억 필름의 그 부분만 뚝 잘라 낸 것처럼.

선원실로 옮겨졌던 사람들도 굴속에서 빠져나오는 토끼처럼 엉거주춤 양손을 모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갑판으로 걸어 나왔다.

난 애드너에게 다가가 우리가 파악한 상황과 엘더의 능력으로 몰아낸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일은 처음 겪는군요. 드라이어드의 능력일 수도 있단 말입니까? 이런… 배에 드루이드 한 명쯤은 고용했어야 했었나 싶군요. 하지만 장기간 배를 타려는 드루이드를 과연 구할 수 있을지…. 어쨌든 저희 선원들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드너가 모자를 벗어 들고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너무 정중해서 어쩐지 낯이 뜨거워졌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옆에서 엘더가 알짱대며 칭찬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며 우쭐댔다. 반면 바곳은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어서 자꾸 신경 쓰여 곁눈질해야만 했다. 스태프에 핀 민들레꽃마저도 바곳을 따라 축 처져 있었다.

“상황이 반대였다면 바곳, 너의 능력이 충분히 도움이 됐을 거야. 힘써 줘서 고마워.”

“난? 조잡한 능력을 걷어 낸 건 나잖아.”

“그래그래, 너도 얼굴만큼 참 잘했어.”

바곳을 불러온 김에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이대로 주눅든 바곳을 돌려보내기엔 마음이 아팠다. 물론 엘더는 필수였다. 그 이상한 향기가 다시금 배를 노릴 수 있으니 방비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엘더가 가진 나비의 목적지에 곧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목소리들이 이곳에서 신을 찾았지? 무슨 연유일까?

“선장님! 전방에 섬이 보입니다! 지도엔 표시되지 않은 섬입니다.”

“이곳에 섬이라고?”

멀리 내다보기 위해 망원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두 눈으로도 확연히 보이는 거대한 섬이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저 정도 크기의 섬을 왜 이제야 발견할 수 있었지?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였는데?

“그런데 정말 처음일까요?”

“네?”

“방금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고 하셨잖아요. 정말 처음일지 아니면 겪고도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싶어서요. 보시다시피 마지막까지 정신을 유지하던 몇을 제외하고 다들 방금 전까지의 혼란을 아무도 기억 못 하잖아요.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섬도 그렇고….”

“그렇다면 바로 저곳이 은둔자의 정원이군요. 어쩌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가 드라이어드의 간섭 때문이었나 봅니다. 강한 해류가 섬 주위를 휘감고 지나가니, 통제를 벗어난 배가 섬의 주변에 들어서도 해류를 따라 섬을 빗겨 갔을 법도 합니다.”

단델리온이 군락지를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안개로 감싼다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섬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이곳에 이렇게 거대한 섬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드라이어드는 하나가 아닐지도 몰라요.”

들렸던 목소리는 여럿…. 어쩌면 저 섬에 사는 드라이어드들이 조직적으로 섬 주변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향기를 내뿜어 발견하지 못하게 만들었나 보다.

엄청난 보물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 세상의 모든 허브들이 자라고 있어 허브들의 지상 낙원이라고 불리는 섬. 그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를 모르는 미지의 섬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흰 드루이드님들을 섬에 내려드리고 멀리 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영향을 받아 배가 혼란에 빠졌는데 섬에 오래 정박할 순 없는 노릇이지요. 드루이드분들이 배에 계시지 않는다면 이전처럼 분명 드라이어드의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을 대비해 정박지에 말뚝을 박아 밧줄을 고정하고 부표를 띄워 이정표를 남길 테니 먼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신호를 보낸다면 그때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아,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신호라…. 뭐가 좋을까나…?”

“또한… 만약 하루가 지나도록 신호가 없다면 3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구조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모쪼록 하루를 넘기지 않도록 해 주세요.”

하루는 조금 짧게 느껴지지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섬이니 애드너의 제안을 수락했다.

배가 섬에 정박했다. 섬 주변으로 강한 해류가 흐른다더니 멈춰 있는 배가 미친 듯이 흔들려서 내릴 때 바다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거의 손만 안 짚었지 발판 위를 네 발로 개처럼 기다시피 하여 섬에 발을 디뎠다.

엘더가 보기에 내 모습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는지 들어서 내려 주겠다고 했지만, 남들은 다 걸어 내려가는데 그럴 순 없다고 거절했다.

“와! 섬이다!”

하지만 내 고민이 무색하게 엉겅퀴에게 폭삭 안겨 단숨에 배에서 뛰어내리는 로웰라가 바로 옆으로 지나갔다.

“그냥 너도 저렇게 안겨서 내려가면 좋았잖아.”

“난 ‘으른’이니까 저런 거 안 해도 돼.”

“메스키트가 도와주겠다고 했으면 좋다고 안겼을 거잖아.”

“난 ‘으른’이다. 섣불리 판단하지 마.”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면 기꺼이 엘더에게 업힐 마음도 있었다.

“제이 님, 대단해요.”

나보다 훨씬 불편해 보이는, 발끝까지 덮는 긴 로브를 입고 있으면서도 본체가 드라이어드이기에 흔들림 없이 고고한 걸음으로 발판을 내려오던 바곳이 날 보며 눈을 빛냈다.

내가 어른이라고 뻗댄 것이 드라이어드에겐 성목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들린 게 아닐까?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좀 되다 만 어른인데.

그러고 보니… 바곳의 걸음걸이 하며 기운을 갈무리하고 표정을 숨기는 모습까지…. 그는 점점 벨라돈나를 닮아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발그레한 볼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미암아 아직 어린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해, 어울리지 않게 마냥 어른을 흉내 내려고 하기에 조금 어색한 모습이 보였지만.

“난 우리 바곳이 이대로만 쭉 자라 줬으면 좋겠어.”

누굴 따라 하려는 게 아니라 너에게 걸맞은 성장한 모습으로.

바곳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느라 옅게 불어오는 바람이 후드를 확 뒤집는 걸 막지 못했다. 보드라운 보랏빛 벨벳에 사파이어 가루를 뿌린 듯한 청보라색 머리칼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부디 이대로만 자라 줘.

섬엔 배 안에서 맡았던 그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의도를 담아 일부러 뿜어내는 향기의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소문처럼 섬에 가득 피어난 온갖 꽃들에서 풍기는 향이 바람을 타고 날아온 듯했다.

하지만 아직 주변에 꽃이 보이진 않았다. 신발 밑창을 겨우 넘는 낮은 키의 억센 풀만 사방에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우릴 내려 준 배는 빠른 속도로 섬에서 멀어졌다.

“은둔자의 정원이라더니…. 내 눈엔 그냥 텅 빈 섬인데?”

로웰라가 발에 불똥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주변을 크게 둘러보더니 내 말에 맞장구쳤다.

“나도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꽃밭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는걸.”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대부호가 섬을 통째로 사들여 가꿨으니 동화 속에 나오는 거대한 성도 있고 장미 덩굴로 만든 아치도 있고 백조나 말을 장식한 토피어리도 있을 줄 알았다. 어쩌면 정말 31번째 테라리움을 홍보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걸까?

“누구냐!”

갑자기 시들링이 휙 몸을 틀며 매섭게 소리쳤다. 깜짝 놀란 나와 로웰라가 그곳을 바라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왜 그래?”

“주변에 누군가 있다.”

“드라이어드일까?”

“한둘이 아니다.”

그 말에 바짝 긴장이 되었다. 심상치 않은 곳이라 전투는 피할 수 없을 거라 여겼지만…. 바곳을 동행시킨 것은 잘한 선택인 것 같았다. 수가 많다면 바곳의 광범위 디버프 공격을 바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우려했던 것처럼 나쁘게 흘러가진 않았다. 잔뜩 긴장한 것과 다르게 나무와 바위 뒤에 모습을 숨긴 정체불명의 자들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신님이….”

“왜 이곳에….”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아름다워.”

“우릴 보살피려고 오신 걸까?”

많은 수가 한꺼번에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시들링의 말처럼 적어도 대여섯 명은 되어 보였다.

“난 지금 가진 제물이 없는데 어떡하지….”

“반짝이는 걸 좋아하신댔어.”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상황에 로웰라가 옆으로 게걸음 쳐 내게 붙었다. 그러곤 시선은 정면을 고정한 채 말을 걸었다.

“언니, 우리 중 누군가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딱 하나만 콕 집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음… 그렇지 않아도 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 저들이 말하는 신이랑 비슷한 인물이 우리 중에 있나 봐.”

우리 드루이드 셋이나 로웰라의 엉겅퀴는 발레리안 아이들과 모감주나무와 먼저 만났으니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불러낸 바곳과 엘더 중에 신 노릇을 하는 드라이어드와 같은 종이….

아니, 잠깐. 엘더의 나비가 공교롭게도 이 섬을 향하고 있었고….

설마 신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이 엘더 플라워 야생종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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