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604)

내 시선을 따라가 갑판을 바라본 애드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갑판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보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따라 나갔다.

“무슨 일이냐?”

“아, 선장님. 이 녀석들이 농땡이를 피우고 있어서 혼을 내고 있었습니다. 관리해야 할 놈은 어디 가서 처박혀 있는지….”

지적받고 있는 선원은 눈이 풀린 채로 밀걸레를 안고 갑판 벽에 기대어 있었다. 도저히 혼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누가 뭐라 하든 태평하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여유를 잔뜩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야, 이 자식아! 선장님께서 오셨는데도 그러고 있을 거야?”

“으흐…. 도저히 뭘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닌걸요. 온몸이 노곤노곤하고…. 선장님도 여기 기대셔서 잔잔한 파도 소리를 즐겨 보세요.”

“상태가 이상한데?”

그런데 이상 증상을 보이는 선원은 한둘이 아니었다. 다들 갑판에 널브러져 있거나 상자에 걸터앉아 딴짓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 같이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로웰라는 어디 갔지?

“무슨 냄새지? 향초를 피웠다기엔 과한데.”

애드너가 팔로 코를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바다의 짭조름한 냄새 안에 은은한 꽃향기가 섞여 갑판 가득히 풍겨 오고 있었다. 꼭 누가 향수라도 뿌린 것 같았다.

“향기 좋네요…. 갑자기 저도 좀 쉬고 싶어졌습니다. 나머진 선장님께서 알아서 하세요.”

방금 전까지 농땡이를 피우는 사람을 타박하던 선원도 갑자기 풀린 눈을 하고 갑판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뜬금없이 풍겨 오는 꽃향기와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

“모두 향기를 맡지 말거라! 코를 막든지 선원실로 들어가!”

애드너가 온 배가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선원은 많지 않아 보였다.

짧은 시간 안에 대부분의 선원들이 갑판에 널브러졌다. 다들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들처럼 주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무늘보처럼 늘어졌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향기를 맡지 마라. 드라이어드의 능력으로 보인다.”

시들링이 자신의 코와 입을 손으로 막으며 내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걸 받고 황급히 코를 막았다.

“로웰라! 로웰라, 어디 있어?”

로웰라도 다른 선원들처럼 갑판에 나와 있었다. 그녀 역시 이런 이상 현상에 피해를 입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까이에 있는 선원을 흔들어 깨우며 로웰라의 행방을 물었다.

“저기요, 로웰라 보셨어요?”

“하… 정말 기분 좋은 향이야.”

“혹시 저랑 같이 탄 여자애 보셨어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날 내버려 둬.”

애초에 선장인 애드너의 명령도 듣지 않는데 내 물음에 답해 줄 수 있을 리가 없지.

“로웰라를 찾았다.”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갔던 시들링이 소리쳤다. 그곳으로 향하니 엉겅퀴 드라이어드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 태평하게 하늘의 구름을 세고 있는 로웰라가 있었다.

“로웰라?”

“흐헤…. 언니 저기 나비 모양 구름 좀 봐. 진짜 예쁘지?”

매사에 의욕적이던 그녀마저 다른 선원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치거나 하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 버린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선원들을 홀리는 세이렌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홀려 바다로 뛰어들게 만들거나 소용돌이로 배를 몰게 해 난파를 시키는 괴물 세이렌.

비록 지금은 소리가 아닌 향기지만 이야기의 끝에 항상 선원들이 파국을 맞이했으니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네 말처럼 드라이어드의 능력이면 디버프 계열이겠지? 바곳의 힘으로 몰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시들링은 내 물음에 섣불리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당하지 않은 녀석들은 서둘러 동료들을 선원실로 옮겨라!”

애드너가 갑판에 널브러진 선원을 주워 어깨에 번쩍 둘러메며 외쳤다. 이미 그녀의 옆구리에도 선원 하나가 대롱대롱 끼어 있었다.

“헉… 피가….”

애드너는 선원들을 한꺼번에 두셋씩 옮기느라 향기를 막을 손이 부족했다. 하지만 비교적 오래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 피가 흥건하고 입가엔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설마 입 안 살을 씹어서 버티는 거야? 세상에.

놀랍게도 선원 중엔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는 걸로도 부족했는지 그녀를 따라 몸에 생채기를 내며 제정신을 유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저렇게 발악을 하며 버틸 정도인데 단순히 코를 막는 것만으로 버틸 수 있는 시들링과 내가 이상할 정도였다.

설마 일반인과 드루이드의 차이인 걸까? 이 배엔 드루이드가 우리 말고 한 명도 없단 말이야? 하지만 로웰라는 일찍이 당해서 저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데….

만약 애드너마저 쓰러진다면 정말 큰일이기에 바곳을 불러왔다. 짧은 시간에 수십여 명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력한 디버프이기도 하고 드라이어드도 아닌 사람에겐 영향을 잘 끼친 못하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 부름에 나타난 바곳은 배 전체에 산약초 향을 풍기며 광범위 디버프 해제 능력을 펼쳤다. 하지만 어쩐지 바곳의 능력이 평소보다 더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절반으로 감소된 것 같은데?

“바곳이 힘을 못 쓰는 것 같은데….”

“이곳은 육지가 아닌 바다 위다. 오션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온전히 힘을 낼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없다.”

“그렇다면 영역 선포를 한다면….”

시들링이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설마 바다 위에선 영역 선포도 안 돼?”

“육지는 영역 선포로 다른 필드를 불러올 순 있으나 바다 위는 그 어떤 영역 선포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사기네….”

여태 필드로 페널티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이런 상황이 너무 난처했다. 자생 필드에 따라 드라이어드들이 더 힘을 내는 건 겪었어도 아예 반감이 되는 경우라니….

“흐히히….”

나의 이런 복잡한 속도 모르고 로웰라는 세상 평온한 표정으로 웃으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어째서 엉겅퀴도 효과가 없지?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로웰라의 엉겅퀴는 나와 같이 길드에 묶여 있어서 디버프 해제에 바로 반응이 올 줄 알았는데?”

“이건… 아무래도 악영향을 끼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시들링이 처음으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눅이라도 든 것처럼 보였다.

“악영향을 끼치는 능력이 아니다…?”

“만약 악영향을 끼치는 능력이었다면 그 어떤 악의보다 우위에 선 벨라돈나가 부름 없이 이곳에 나타나 날 보호했을 것이다. 그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난 드라이어드의 어떠한 악영향도 받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시들링의 관점은 그가 확실한 답을 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달리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 디버프라 생각했는데 디버프가 아니다? 그럼 버프라는 건가…?

상대에게 혼란을 주는 계열의 디버프는 이리스 파티와 함께하며 많이 보았다. 그간의 전투를 돌이켜 보면 이 계열은 아군을 공격하게 만들거나 행동을 묶는 등 악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지금 이상 현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편히 쉬고 있을 뿐이었다.

“선장님! 이제 그만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갑판에 있는 한 놈도 포기하지 말거라!”

애드너를 도와 움직이던 선원들도 그 수가 확 줄어 있었다. 애드너 역시 힘이 많이 빠져 보였다. 그녀의 입을 타고 흐르는 피가 금방 멎어 있는 대신 다른 곳에 상처가 많이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생채기가 생기면 바로 딱지가 지고 빠르게 아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은 바곳의 있으나 마나 한 약한 힐링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디버프가 아니라 회복 능력 계열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악영향을 밀어내고 벗겨 내는 바곳의 능력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애초에 사람들이 뒤집어쓴 것은 악이 아닌 악으로 위장한 선이었다.

“차라리 더 강한 상위 회복 능력으로 지금의 회복 능력을 밀어내라.”

시들링이 바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그 어떤 악의보다 우위에 선 벨라돈나가 있다면 너에겐 그 어떤 선의보다 우위에 선 드라이어드가 있지 않나?”

“엘더….”

내가 가진 최강의 회복형 드라이어드 엘더. 상위 회복 능력으로 기를 눌러 버리라는 말 같은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여태 회복 능력은 중첩된다고 생각해 왔지, 덮어 버린다곤 생각 못 해 봤는데. 아니, 어떤 게임에선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동일 효능을 내는 버프는 중복을 방지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먼저 건 버프를 우선시하거나 더 강력한 버프가 약한 버프를 덮어쓰거나.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어 지체 없이 엘더를 불러왔다. 하얀 꽃잎이 소복이 내리며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처럼 엘더가 내려섰다. 순간 배를 어지럽히던 이질적인 향기들이 꺼져 가는 촛불처럼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불쾌한 냄새를 내 드루이드에게 묻히고 있네.”

엘더는 보란 듯이 내 옷을 툭툭 털며 어느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바다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비의 방향 역시 엘더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설마…?

“엘더, 네가….”

“그래, 내가 이런 조잡한 능력 따윈 부끄러워질 정도로 회복형 드라이어드의 진가를 보여 줄게.”

하지만 여긴 바다 위라서 바곳처럼 엘더도 힘이 반감됐을 확률이 크다. 그렇다면 남은 건 엘더의 힘을 최상으로 끌어내는 그래프트뿐.

내가 하려는 바를 알아챈 엘더가 스태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비를 뿌릴 정도는 못 되는 거 알지?”

“그럼 안개라도 자욱하게 펼쳐 봐.”

온몸에 폭발적인 생명력이 요동치는 동시에 내가 엘더와 함께 쥔 스태프에서 하얀 안개가 퍼져 나갔다. 넘치는 생명력을 가득 담은 신비로운 안개가 이질적인 향기를 밀어내곤 배 전체를 요람처럼 감쌌다.

“어… 신님?”

“신님이 왜 저기 계시는 거야?”

벌레가 우는 것처럼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꿈이나 환청이라고 착각할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동시에 안개의 틈을 비집고 새어 들어오려던 향기도 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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