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2/604)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황금 호박 상회의 사람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붉은 두건 아래로 드러난 짧은 백발에 검은 머리가 드문드문 섞이고 눈가의 주름에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노인이었다.

기름때가 묻은 얇은 셔츠 위로 입은 갈색 베스트가 족쇄처럼 보일 정도로 꽉 조이고 있었다. 시들링에 비견할 만큼 우락부락한 근육과 햇빛에 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커피색 피부가 위압감을 자랑하는 여성이었다. 혹시 이 분이 배를 모는 선장인 걸까?

“아, 안녕하세요. 황금 호박 상회에서 오셨다고요?”

“네, 배를 찾는다는 분이 제이 님이란 걸 알고 급하게 저를 파견했답니다. 제일 먼저 황금 호박 상회를 찾아 주시지 않는 것이 서운하다며 지점장님께서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지요. 전 ‘애드너’라고 합니다. 제이 님을 모실 배의 선장입니다.”

뱃고동 같은 호탕한 목소리를 억눌러 일부러 정중한 말투를 흉내 내는 듯했다.

“음… 마차는 생각했지만 배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또 도움을 받게 되네요. 황금 호박 상회에서 배를 태워 준다면 믿을 만하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린 여관 외부에 마련된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모여 앉았다. 애드너에게 지도에 표시된 부분을 가리키며 근방에 있는 섬을 찾아 데려다줄 수 있는지 물었다.

“흠… 제이 님께선 보물찾기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보물이요? 아뇨.”

갑자기 웬 보물찾기? 만약 그곳에 엘더 플라워 야생종이 있다면 보물이 맞긴 하지.

“음, 모르시는 눈치군요. 전 지도를 보고 제이 님께서 ‘은둔자의 정원’에 대한 소문을 입수하고 행동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은둔자의 정원이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네, 세상의 모든 허브들이 그곳에 있다 하여 허브들의 지상 낙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하지만 소문은 과장되는 법이니 아직까지 진실을 확인한 사람은 없답니다. 그 섬을 실제로 찾은 사람도 없거니와 찾으러 갔다가 행방불명된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저희 황금 호박 상회에서도 여러 번 은둔자의 정원을 찾으러 출항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음, 대략적인 방향만 확인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낭패네. 역시 발레리안 아이들이라도 붙잡아 놨어야 했나?

“그런데 왜 섬 이름이 은둔자의 정원인가요?”

“그 섬은 원래 어떤 부자의 개인 소유였답니다.”

애드너는 섬 이름의 유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허브를 좋아하는 이름 모를 대부호가 큰 섬을 통째로 사들여 온갖 허브를 심어 정원을 가꾸고 세상과 단절한 채 섬에서 은둔하며 살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가족을 만들지 않고 혼자 살아온 대부호의 전재산이 그 섬에 있을뿐더러 온갖 희귀하고 비싼 허브들이 자라고 있을 거라 생각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그 섬을 찾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 그대로 보물섬의 전설이었다.

“이러한 이야기 때문에 31번째 테라리움은 보물찾기를 하려는 여행자들로 인기가 많았지요. 그래서 이곳 행정 관리원이 작정하고 꾸며낸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도난 사건에 그 인기가 많이 시들긴 했습니다.”

“아, 그 도난 사건은 저도 들었어요. 주위에서 짐을 털린 사람도 보기도 했고.”

“제이 님께서도 모쪼록 조심하십시오. 문전성시를 이루던 테라리움이 도난 사건 때문에 한산해지는 바람에 행정 관리원이 골머리를 앓으며 도둑을 잡으려고 사방팔방으로 노력했는데 머리카락도 못 잡았을 정도로 비범한 자이니 말입니다.”

어쩌면 도난 사건의 실마리를 그 섬에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실 건가요? 언제든 배를 띄울 준비는 되어 있답니다.”

“네! 바로 갈게요.”

31번째 테라리움엔 큰 볼일이 없으니 지체 없이 애드너를 따라나섰다.

그녀를 따라 한참을 걸어 테라리움의 외곽에 위치한 또 다른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곳엔 커다란 범선이 한 척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푸하핫! 선장, 그 우스꽝스러운 베스트는 뭐야? 귀하신 분을 만나러 간다더니 멋이라도 낸 거야? 그럴 거면 셔츠라도 좀 깨끗한 걸 입든가!”

“시끄럽다!”

애드너는 방정맞은 청년이 건넨 모자를 두건 위에 쓰고 크게 헛기침을 했다.

“큼큼, 항해를 할 거면 좀 편한 옷이 필요해서….”

“아, 편하신 대로 하셔도 돼요. 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내 말에 그녀는 주저 없이 베스트를 벗었다. 흩날리는 바람이 살짝 들춘 셔츠 안으로 말로만 듣던 빨래판 복근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우와…. 나이에 비해 엄청 정정한 몸을 보니 게으른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질 정도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제이 님께서 일러 주신 방향으로 가겠지만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찾지 못한 섬을 찾는 일이니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발판을 타고 배에 오르니 분주하게 배를 뛰어다니는 선원들이 보였다.

“혹시 뱃멀미가 있으십니까?”

“어, 저는 없어요.”

시들링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로웰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난 배를 처음 타 봐서 모르겠어. 나 뱃멀미하면 어떡하지….”

“그럼 한숨 주무시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도움이 되는 드라이어드가 있다면 힘을 빌리는 것도 좋고요.”

“언니, 나 방해 안 되게 뱃멀미하는 것 같으면 쥐 죽은 듯이 잘게.”

로웰라는 애드너의 조언에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배가 출항하고 바다를 가르며 나아갈 때도 로웰라가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선수 쪽 갑판에서 엉겅퀴와 어깨동무를 하고 바다를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 보였다.

난 그런 로웰라를 조타실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다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마음 같아선 나도 나가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오두방정을 떨며 돌아다니는 로웰라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좀 진정되면 나가 보든지 해야지.

“보물찾기도 아니라면 은둔자의 정원에 가시려는 연유를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아, 제 드라이어드의 포레스트 영입을 위한 야생종을 찾고 있어요. 나비가 있는데 방향이 아무래도 그 섬을 가리키는 것 같거든요.”

겸사겸사 발레리안 아이들이 말하는 신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고.

“온갖 허브가 가득 피어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니 세계수의 축복이 닿아 드라이어드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애드너는 배의 키에서 손을 놓고 내가 앉은 테이블로 와 함께 앉았다.

잠시 뒤, 선원 중 하나가 우리 셋에게 차를 대접해 주었다. 플레이팅에 각별히 신경 쓴 듯한 과자를 집어 먹으며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비구름 한 점 없이 날씨가 맑고 파도도 잔잔했다. 배는 순조롭게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그러고 보니 근방에 전멸한 군락지가 있다던데 그 사건에 대해서도 아세요?”

“음, 해국밭이 모두 말라 죽은 일을 말씀하시나 보군요. 근방의 해안 절벽에서 소소하게 피어 뱃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꽃들이었는데 갑자기 모두 말라 죽어 안타까웠지요.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바다 근처는 워낙 날씨가 변덕스러우니 적응하지 못하고 변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듣기론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도 죽었다던데….”

“글쎄요. 절벽에 해국이 몰려 피긴 했지만 그곳을 보살피는 드라이어드는 없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도난 사건으로 근방이 흉흉하니 작은 사건도 한없이 부풀려지기 마련이지요.”

식물을 대상으로 한 흡혈귀 소문이 그저 단순한 루머였던 걸까? 꽤 무서웠는데 말이야….

그때 차를 대접하고 아직 조타실을 나가지 않고 있던 선원이 불쑥 우리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에이, 단순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선을 탔던 놈에게 들은 말이 있지 말입니다요.”

“상회의 귀하신 손님 앞이다. 방정맞게 굴지 말거라.”

“아이쿠… 선장님도 참….”

하지만 선원은 원래 그런 성격인 사람이었는지 애드너는 그의 태도를 크게 질책하지 않았다.

“뭔데요? 이야기해 주세요.”

내 말에 선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어선이 좀 멀리까지 나가게 됐는데 이름 없는 작은 섬에 잠시 배를 댔다고 합니다. 그곳에 빗물이 가득 고이는 움푹 파인 샘이 있어서 물을 보충하려고 했다는데, 섬을 오르니까 글쎄…!

“글쎄?”

“거기 있는 식물들이 죄다 말라 죽어 있었대요. 원래는 푸른 식물들이 가득했던 모습을 봤다고 했는데 가 보니까 죄다 바짝 말라서 구겨진 종이 뭉텅이처럼 쪼그라들어 죽어 있었대요. 심지어 시체처럼 보이는 쓰러진 드라이어드도 봤다고 그러고.”

“드라이어드였다면 죽을 때 열매가 되어 사라질 텐데…?”

알고 보니 애드너가 말한 해국밭이 아니라 그 섬이 소문의 근원이 아니었을까?

“뭐… 살아 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고 합니다. 주변에 으스스하게 죽음의 기운이 잔뜩 깔려서 부정이라도 탈까 봐 황급히 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요.”

“헐….”

정말 식물 흡혈귀가 있는 거 아냐?

“그런 일이 있다면 과수원에서 조치를 취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장님도 참, 그 섬이 뭐 쉽게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주변에 안개가 가득해서 특별한 날이 아니면 갈 수도 없는 곳 아닙니까? 과수원에서 별말 없는 걸 보면 아직 확인을 못했거나 정말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그 섬에 있거나 아니겠습니까?”

“정말 별일이 아니라 과수원에서 따로 공표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하여튼 방정맞은 놈, 썩 나가, 이놈아!”

애드너의 호통에 선원은 부리나케 조타실을 빠져나갔다.

“상회 소속이란 놈이… 테라리움이 타격을 받으면 가장 먼저 상회 분점들이 타격을 받을 것인데 저런 괴담을 앞장서서 퍼뜨리고 다니니 원. 쯧쯧.”

애드너는 마치 입을 헹구는 것처럼 차를 원샷 하곤 불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눈만 굴리고 있는데 문득 소란스러워 보이는 밖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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