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201/604)

31번째 테라리움의 구역은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게가 기어 다니는 갯벌과 배를 띄우기 위한 선착장, 방파제, 높이 위용을 자랑하는 등대까지.

이 모든 것이 한 테라리움에 포함되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태 내륙에 위치한 테라리움들만 봐 와서 그런지, 육지의 비율은 적으나 한 조각이 바다를 차지하는 테라리움은 아주 신선했다. 이런 테라리움을 운영하는 것도 꾸미는 맛이 제법이겠지…. 이미 둘을 가지고 있어도 욕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발레리안 아이들은 테라리움의 구역을 벗어나 바닷가를 따라 남쪽으로 계속 내려갔다. 따개비가 붙은 거친 바위가 두더지처럼 머리를 내밀고, 모래사장은 끝나 자갈이 깔리기 시작했다. 인적이 끊기고 사람 손을 타지 않은 환경들이 계속되었다.

이대로 쭉 내려가 몇 개 테라리움을 지나칠 정도의 거리가 되면 41번째 테라리움이 나올 터였다. 이쯤에서 엘더를 불러와 나비의 방향을 다시 확인해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발레리안 아이들이 커다란 동굴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저깄다!”

파도가 도미노처럼 몰아치고 하얀 포말이 커튼처럼 떨어지는 곳이었다. 안이 어둠으로 새카만 작은 동굴은 포효하는 거대한 짐승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모감주나무, 우리 왔어!”

“늦지 않게 왔어! 설마 우릴 두고 가 버린 건 아니지?”

동굴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발레리안 아이들은 입구 옆의 거대한 바위로 올라가 안을 향해 소리쳤다.

“너무 늦었잖아. 정말 두고 가려고 했어.”

동굴 안에서 책망이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모감주나무 드라이어드가 부름을 받고 폴짝 뛰어나왔다. 그녀는 해적 선장이 쓰는 것과 같은 챙이 접힌 검은 모자에 금장이 장식된 진녹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오는 긴 장화로 철벅철벅 바닷물을 해치고 오던 그녀는 우릴 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멈춰 섰다.

“뭐야, 저 녀석들은?”

그리고 순식간에 옆구리에서 기다란 칼을 꺼내더니 우릴 향해 겨누고 경계 태세를 보였다.

“신님을 만나고 싶대!”

“신도가 되고 싶어서 신님이 좋아하시는 반짝거리는 다이아도 잔뜩 바칠 거래! 이것 좀 봐.”

아이 중 하나가 훔친 다이아를 두 손에 잔뜩 꺼내 모감주나무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 저 드루이드가 잔뜩 가지고 있대. 신님이 엄청 기뻐하실 거야!”

“저 녀석들은 외부인들이야. 신께서 정한 규칙을 어길 생각이야?”

그녀는 노한 표정과 목소리로 야차같이 발레리안 아이들을 다그쳤다. 아이들은 그 기세에 고양이를 만난 생쥐처럼 깜짝 놀라 어깨를 덜덜 떨었다.

“하지만… 요즘 제물이 시원찮아서 신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며…. 다이아를 잔뜩 가져다 드리면 화가 풀리지 않으실까 해서….”

“맞아…. 그러다 신님께서 더 이상 우릴 보살펴 주지 않으시면 어떡해? 더 제물을 많이 바치는 곳으로 신님이 떠나 버리시면 어떡해? 신님이 없으면 그 ‘괴물’로부터 누가 우릴 지켜 주는데….”

“신님이 우릴 버리시면 안 돼….”

“조용히 해! 외부인들 앞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모감주나무의 다그침에 발레리안 아이들은 울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괴물? 불을 말하는 걸까? 혹시 아이들이 말하는 신 노릇을 하고 있는 드라이어드가 민들레 군락지의 단델리온처럼 불을 막아 주는 강한 드라이어드인 걸까?

“너흰 그저 제물을 많이 바쳐서 신님을 곁에서 모시는 꽃으로 선택받고 싶어 한다는 걸 누가 모를 줄 알아? 저렇게 외부인들에게 들키고도 신께서 용서해 줄 거라 생각해?”

“그렇지만….”

“당장 저 녀석들을 치워 버리든지 죽여 버려! 저 녀석들을 달고 내 배를 태워 줄 것 같아? 저 녀석들이 여길 떠나지 않으면 너희들도 내 배에 못 탈 줄 알아!”

속이기 쉬웠던 아이들에 비해 모감주나무는 뚫을 수 없는 철옹성과도 같았다. 그녀는 입 좀 놀린다고 우리의 동행을 허락해 주진 않을 것 같았다.

난 최대한 싸울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피력하며 차분하게 모감주나무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약간의 다이아를 건네주었다. 이건 밑 작업이었다.

“어쩔 수 없지. 우린 정말 그 위대한 신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감화되어 직접 뵙고 제물을 바치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너희들의 규칙이 그렇다고 하니 신을 노하게 할 순 없지. 여기서 물러날게. 자, 이것도 전해 드리렴.”

여기서 따라가고 싶다고 강짜를 부렸다간 저 모감주나무와의 전투를 피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발레리안 아이들이 우릴 데려가려던 곳이 섬이었고 저 모감주나무가 조종하는 배가 섬으로 갈 수 있는 운송 수단인가 본데, 그녀와 전투를 벌여 봤자 이득은 없었다.

그녀를 협박해 배를 몰게 해도 곱게 섬으로 데려다줄지도 모를 일이고. 육지에선 우리가 대비할 수 있지만 바다 위는 하늘을 날 수 없는 한 방비 불가능이었다.

“이것 봐. 이렇게 다이아도 그냥 주는데…?”

“그래도 안 돼! 어서 너희들은 꺼져 버려!”

“갈게, 갈게.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막 가려던 참이었어.”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는 날 따라 로웰라와 시들링도 쫓아왔다. 로웰라는 모감주나무가 있는 곳을 힐끔거리며 내게 소곤거렸다.

“언니, 정말 갈 거야? 어딜 가는지 엄청 궁금한데.”

“배를 타고 가면 되는 것 같은데 꼭 저 모감주나무의 배를 이용할 필욘 없지 않을까 싶어서.”

어느 정도 걷다가 미리 봐 뒀던 수풀이 우거진 곳에 들어서자 거대한 바위 뒤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로웰라는 마치 자신이 자객이라도 된 것처럼 과장된 몸짓을 하며 내 옆에 철썩 붙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맘껏 즐기고 있는 듯했다.

“시들링, 좀 숙여 봐. 다 보이겠어.”

그 큰 덩치가 바위 밖으로 보일까 팔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힘을 줄 필요 없이 순조롭게 잘 끌려왔다.

다들 몸을 숨기자 바위에 살짝 얼굴만 내밀고 발레리안 아이들과 모감주나무가 있는 곳을 훔쳐보았다. 멀리서 아이들을 혼내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모감주나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두 팔을 바다를 향해 크게 벌렸다.

그러자 노란 꽃잎이 회오리치며 나룻배가 나타났다. 아래가 유선형으로 둥글고 나뭇잎을 닮은 갈색의 작은 배였다. 드라이어드 셋이 타자 꽉 차는 배에 어떻게 우리까지 데려갈 생각을 했는지, 발레리안 아이들은 참 황당했다.

돛도 노도 없는 배인데 파도의 반대 방향으로 배가 천천히 움직였다.

“우와… 배를 만들고 조종하는 드라이어드가 있다니. 진짜 신기하다.”

로웰라가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내 마음을 대변했다.

“그러게. 이 바다에 정말 어울리는 드라이어드네. 자 방향을 잘 봐 두자.”

날씨가 맑고 방해물이 없어서 배가 꽤 멀리까지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배가 보이지 않을 때 아티팩트에서 민들레 아이들을 불러왔다.

“와, 병아리 같은 드라이어드들이네. 아까 봤던 묘목들보다 더 어린 드라이어드들이잖아?”

로웰라가 민들레 아이들을 보며 마치 쓰다듬고 싶다는 것처럼 손을 꼼지락거렸다.

“애들아, 날 좀 도와줄 수 있지?”

“네, 작은 세계수님! 쟤보다 제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맡겨만 주세요.”

“작은 세계수님, 쟤는 필요도 없는데 아티팩트로 돌아가 버리라고 해 주세요.”

여전히 옥신각신하는 아이들은 애석하게도 둘이서 함께일 때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겐 민들레의 꽃씨를 이용해 배를 추적해 달라고 부탁했다. 제퍼의 도깨비바늘이 있다면 열매를 붙여 위치 추적기로 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아이들의 꽃씨는 이럴 때엔 도깨비바늘의 능력의 하위 호환인 느낌이었다.

거친 바닷바람에 솜털들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좀처럼 나아가진 못했지만, 그동안 특훈의 성과가 있었는지 아이들은 배의 겨우 꽁무니를 추적할 수 있었다.

들키면 안 되기에 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는데 두 손을 꼭 맞잡고 용케 잘 해내 주고 있었다. 역시 둘은 함께일 때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며 강해질 수 있었다.

모감주나무의 배가 아이들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면서 추적은 종료되었다. 민들레 아이들은 내가 꺼낸 지도에 배가 간 방향을 집어 주었다. 41번째 테라리움과 가까워지는 바다 어딘가에 목적지인 섬이 있는 듯했다.

아이들이 가리킨 지점에 우리가 찾는 섬은 없었으나 주변엔 바위섬이라고 불릴 만한 작은 크기의 섬들이 제법 많았다.

“음, 이제 이 방향으로 배를 태워 줄 사람을 구해 볼까?”

31번째 테라리움엔 선착장도 있고 크고 작은 배도 많이 있었다. 아마 뱃삯을 주면 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레리안 아이들이 향한 미지의 섬과 엘더의 나비가 향한 곳을 놓고 저울질하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겠지만, 엘더를 불러 확인했을 때 두 목적지가 비슷한 방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그 섬에 엘더 플라워 드라이어드가 있는 거 아냐? 방향만 생각했지, 설마 바다 위의 섬까지 고려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맞다면 자생지가 노멀 필드인 드라이어드가 왜 섬에 있는 거야?

배를 구할 생각으로 3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했지만 포근한 해안 마을로 들어서니 긴장이 풀렸는지 피로가 몰려왔다. 기껏 캠핑장을 이용했지만 잠은 한숨도 못 자고 드라이어드 결투를 벌였지. 졸릴 만도 했다.

테라리움에서 제일 좋은 여관에 방 두 개를 잡고 그곳 점원에게 배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많은 팁에 과하게 친절해진 점원은 수소문해서 알아볼 테니 푹 쉬고 있으라고 했다.

고급 요리로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짬을 이용해 눈을 붙였다. 아직 30번대 테라리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니 자신도 데려가 달라며 쫑알쫑알 조르던 로웰라가 가장 먼저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날 배려하며 잠이 깬 척하더니 역시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대로 몇 시간 눈 좀 붙였을까, 로웰라가 깨워서 일어나 보니 배를 태워 주겠다는 사람이 아래층에 와 있다는 안내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우릴 찾아온 사람은 놀랍게도 황금 호박 상회의 사람이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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