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604)

로브를 휘날리며 등장한 바곳은 날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짓다가 벨라돈나를 보곤 흠칫 몸을 굳혔다.

“어린 묘목들을 공격한 것이 마음에 걸리니 꼭 내 독을 몰아내 줬으면 좋겠구나.”

바곳은 쩔쩔매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돈나는 그런 바곳을 유심히 보다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명을 결정하는 꽃이라…. 죽음으로 운명의 종지부를 끊는 것이 아닌, 삶의 기회를 주어 운명의 연장선을 이을 수 있는 꽃이 되었구나. 너의 자생 필드인 스왐프 필드의 역사도, 생명이 살 수 없을 거라 여겼던 터전에 선두로 피어나 삶의 신호탄을 올렸던 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장차 위대한 꽃이 되기 위해 노력해 보려무나.”

벨라돈나는 바곳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가 시들링의 아티팩트로 홀연히 돌아가 버렸다.

“으어어….”

훈훈한 광경은 괴물 같은 소리를 내는 묘목 드라이어드들 때문에 깨졌다.

“제이 님, 영혼의 연결로 묶인 꽃들이 아니라 제 힘이 온전히 작용하지 않을 거예요….”

바곳은 조금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그는 두 묘목 드라이어드를 향해 스태프를 뻗었다. 산약초 향이 주변을 가득 메울 정도로 과하게 힘을 사용하며, 드라이어드들이 중독된 벨라돈나의 독을 몰아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바곳이 부정적으로 판단하긴 했어도 흰 거품을 물 정도로 악화되던 묘목 드라이어드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정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단순 조언이라 여기기엔 뜻이 깊어 보였던 벨라돈나의 이야기가 마치 결국 바곳이 독을 몰아내는 데 성공할 거라고 예견한 듯 느껴졌다.

전투에서 팀원들의 디버프는 순식간에 해제할 수 있었지만 두 어린 묘목들의 독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아이들은 기진맥진해 보이긴 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바곳은 자상하게도 제 미약한 회복의 힘도 불어넣어 주며 아이들이 완전히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어? 살았다!”

“하마터면 세계수의 품으로 갈 뻔했어. 정말 엄청난 독이야.”

“역시 신님이 우릴 지켜 주셨나 봐”

둘 다 남성형으로 보이는 어린 드라이어드들은 솜사탕 같은 붕붕 뜨는 연분홍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연분홍색과 하얀색이 한가운데로 휘몰아 섞여 들어가는 듯한 특이한 눈이 달콤한 딸기우유 맛 사탕을 연상케 했다.

드라이어드임을 나타내는 꽃들이 양 손등에 토끼 꼬리처럼 앙증맞게 피어 있었는데,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작고 귀여운 연분홍색 꽃망울과 별사탕을 닮은 하얀 꽃들이었다.

“어머, 너무 귀엽다.”

나도 모르게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탄이 입 밖으로 나왔다. 정말 디저트를 형상화해 놓은 것처럼 색 조합이 기가 막힌 드라이어드들이었다.

기운을 차린 아이들은 주변을 돌아보며 두 눈을 쉴 새 없이 굴리더니 대뜸 도망가려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재빠른 데이지와 눈치 빠른 로웰라가 하나씩 붙잡았다.

“이거 놓아줘!”

“우릴 괴롭히는 걸 알면 우리의 신님께서 너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맞아! 너희들이 엄청난 불행을 겪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드실 거야!”

힘껏 발버둥을 치는 것을 데이지는 태연히 붙들고 있는 반면에 로웰라는 온몸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엉겅퀴가 대신 넘겨받으려는 과정에서 묘목 드라이어드가 토끼처럼 날렵하게 빠져나와 순식간에 멀리까지 도망갔다.

“그 애를 놓아줘!”

하지만 제 친구가 아직 붙잡혀 있어서인지 뛰는 걸 멈추고 이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데이지에게 잡힌 아이가 몸부림을 칠수록 코를 찌르는 독특한 향기가 산발적으로 풍겼다.

“그럼 너희가 훔쳐 간 물건들을 먼저 내놔! 우리가 꼭 죄 없는 드라이어드들을 핍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

로웰라가 큰 소리로 멀리 뛰어간 묘목 드라이어드에게 외쳤다.

“훔쳐 갔다니! 우린 바위 위에 있는 주인 없는 물건을 주웠을 뿐이야!”

“맞아! 주인이 있다면 잘 간수했어야지!”

아이들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맞았다. 내기 상품으로 올려 두고 다들 경기에 정신 팔려 있었으니까.

“뭐야, 너희들이 도둑들이라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더쉬맨 일행이 묘목들을 보고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시들링을 경계하는 것도 잊고 잔뜩 분노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당장 우리 물건을 내놓지 못해?”

그들도 짐을 도둑맞았기에 때마침 나타나 물건을 훔친 이 묘목 드라이어드들을 의심할 법했다.

“난 너희들은 몰라.”

“맞아, 우린 오늘 바위 위에서 물건을 주운 게 전부야.”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발뺌하는 거 아냐? 당장 혼쭐을 내 주면….”

“잠시만요. 정말 이 아이들이 당신들도 모르게 물건들을 훔쳤다고 생각되는 건가요? 금방 들켜서 이렇게 잡혀 왔는데?”

정말 이 수준의 묘목들에게 털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

그들은 묘목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려던 것을 내 말을 듣고 가까스로 멈춰 섰다. 드라이어드들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올리다니…. 정말 볼수록 평가가 떨어지는 사람들이네.

그런데 정말 진짜 도둑은 따로 있는 걸까? 아니면 여럿이 있는 게 아닐까?

난 물건에 대한 소유욕보단 묘목 아이들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더 궁금했다.

“대체 드라이어드인 너희들이 다이아와 사람들이 먹는 식량 따위가 어디에 필요한 건데?”

“우리의 신님께 바칠 제물이야.”

“신?”

드라이어드들에게 신이라면 세계수를 말하는 걸까? 그렇다면 세계수가 제물로 다이아를 받는 건 맞지만 비상식량은…?

“신이라면 세계수를 말하는 거야? 아니면 너희 군락지의 왕이니?”

“흥, 우리의 신님은 세계수보다 더 대단한 존재야. 죽은 식물도 살릴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고!”

그들은 꼭 광신도처럼 보였다. 세계수보다 더 대단하다고? 죽은 식물도 살리는 능력이 있다고? 죽다 스스로 살아나는 드라이어드인 데이지가 있긴 하지만 남을 부활시키는 능력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대체 저 아이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뭘까?

“어쨌든 그건 주인이 있는 물건이야. 돌려줘.”

“흥, 이젠 우리가 주인이야.”

“얘들 봐. 말로 해선 안 될 묘목들이네.”

로웰라가 데이지에게 잡힌 아이와 옥신각신 말다툼을 했다.

“흐음… 시들링, 이 묘목들은 무슨 꽃인지 알아?”

벨라돈나로 하여금 묘목들을 잡게 한 후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던 그는 내 물음에는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발레리안 꽃들이다.”

“발레리안? 역시 처음 듣는 꽃이네. 그럼 너희들이 이 주변에 활개 치고 있다는 도둑들이 아닌 게 맞니? 이렇게 남의 물건에 손댄 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내 질문에 묘목들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역시 이상했다. 이 일대를 도난 사건으로 떠들썩하게 만들기엔 묘목 아이들은 너무 허술했다. 나와 드라이어드 결투를 했던 저 남자들도 순식간에 당하기엔 아이들이 그만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어떤 힘이 있다면 지금 데이지에게 붙잡혀 있는 와중에 발휘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드라이어드의 손가락에 낀 반지까지 훔쳐 간다는데, 불멸의 다이아몬드 반지는 데이지의 손가락에 아무 탈 없이 곱게 끼워져 있었다.

“신이라고 했지? 정말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

“우리 신님은 사람 따위가 아냐! 우리와 같지만 더 대단한 드라이어드야.”

오호, 그럼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드라이어드가 신 노릇을 하고 있나 보네. 로웰라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 물건을 돌려받는 것은 내 목적이 아니었다.

가볍게 배후를 캐 볼까? 아이들이 신이라고 받드는 드라이어드에 대해 알게 되면, 31번째 테라리움을 벗어날 때까지 도둑질에 대해 크게 경계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너희들의 신을 만나 볼 수 있을까?”

“흥, 너희가 우리의 신님께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우리가 만나게 해 줄 것 같아?”

“언니, 뭘 하려고 그래? 정말 쟤들이 말하는 신을 만나려고?”

로웰라가 흥미가 가득하다는 목소리로 내게 소곤소곤 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난 주머니에서 또 난쟁이들이 잔뜩 던져 놓은 다이아 한 움큼을 꺼냈다.

“그러니? 난 너희들의 설명만 듣고도 정말 대단한 신인 것 같아서 나도 모시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걸. 그래서 이걸 제물로 바치려고 했지.”

내가 꺼낸 다이아를 묘목들은 물론 로웰라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럼 내게 줘. 내가 가서 바치면 돼.”

“그 신이라는 존재 알고 보니 가짜 아니야? 이렇게까지 숨기는 걸 보니까 알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허상인 거지.”

“우리 신님은 가짜가 아니야! 말 함부로 하지 마!”

“아니면 기꺼이 신도가 되어 제물도 바치겠다는데 왜 못 만나게 하는 거야? 난 이것보다 더 많은 다이아를 제물로 바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직접 만나고 대단한 신인 걸 확인해야 바치지.”

“더 많은 다이아….”

멀리 도망쳤던 묘목 아이가 주춤주춤 다시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하지? 신님을 만나게 해도 될까? 혼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외부에서 아무도 데리고 오지 말랬는데…. 사람은 절대 안 된다고….”

묘목 아이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불안한 목소리로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데이지에게 붙잡힌 것도 잊은 듯했다.

“자, 이걸 너희들에게 먼저 줄게. 신님께 잘 보이기 위해 부탁한다는 의미야. 이렇게 많은 양을 단숨에 그냥 너희들에게 줄 정돈데 진심이 안 느껴지니? 나 나쁜 드루이드 아니란다.”

“그런가…?”

“곧 모감주나무가 떠날 시간인데… 우릴 두고 가면 어떡해?”

“그럼 며칠은 못 돌아가는데…. 늦게 가면 혼날 텐데….”

모감주나무? 모감주나무가 신 행세를 하는 드라이어드일까? 아니, 좀 미묘했다.

“너희 신님도 많은 다이아를 가져가면 용서해 주지 않을까? 내가 꼭 다이아를 산더미만큼 바칠게.”

“산더미…. 이렇게 반짝거리는 다이아가 정말 산더미만큼 있어?”

“물론이지.”

“그렇게 많은 다이아를 가져가면 우리도 신님을 곁에서 모실 수 있는 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계속 불안해하던 아이들은 점점 눈을 빛내며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애들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아.”

“아, 비슷한 드라이어드가 떠올라서 똑같이 대해 줬을 뿐이야.”

연금탑에서 만났던, 속이기 쉬웠던 파피루스가 떠올랐다. 그 엉뚱한 드라이어드도 결국 주인 따라 1번째 테라리움으로 잡혀갔겠지. 적이긴 해도 너무 허술해서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드라이어드였는데.

“좋아, 우리 신님께 데려가 줄게. 하지만 만약 신님이 노하시면 넌 바로 돌아가야 해.”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

데이지가 내 눈짓에 아이를 붙잡고 있는 손을 풀었다. 바로 도망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신을 만나러 가려면 우선 바닷가로 가야 한다고 했다.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이 때마침 엘더의 나비가 마지막으로 향했던 곳이라 다행히 여로가 꼬이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언니, 저 사람들은 어쩔 거야?”

로웰라가 나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세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음, 계륵이네. 뭘 시킬지 딱히 떠오르진 않는데. 그래서 난 그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처분은 다음으로 기약하겠다고 했다. 빚을 달아 놓고 다음에 정말 쓸모를 찾으면 이용하겠다고.

“아이언비스트는 내 테라리움 직속 길드의 길드원이에요. 더구나 난 행정 관리원이지요. 내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마세요. 다음에 만나면 그 빚을 받을 테니.”

“그런 중요한 분들과 척을 질 생각은 없습니다…. 찾고자 하면 정말 수배를 내려서라도 찾아내시겠지요. 그럼 내기의 조건은 그때 수행하겠습니다.”

더쉬맨을 비롯한 나머지 둘의 정보를 받아 내고 나니 새벽이 다 되었는지 확연히 하늘이 밝아져 있었다. 자리를 금방 정리하고 발레리안 묘목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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