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7/604)

누가 섣불리 먼저 나서진 않았다. 하지만 시종일관 불량한 자세를 하고 있던 가자니아 드라이어드의 여유 가득한 표정이 꼭 이쪽에 선공을 양보해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대방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태도였지만 데이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개의 단도를 고쳐 쥐었다. 그녀가 직접 스타트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벌처럼 날아오른 데이지가 허공에서 가자니아를 향해 칼끝을 세웠다. 부웅, 위협적인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거대한 낫이 데이지가 있던 곳을 향해 가로로 날아들었다. 가자니아는 거대한 무기를 한 손으로 다루면서도 전혀 거침이 없었다.

데이지가 가뿐하게 회피하며 몸을 틀었지만 가자니아의 낫은 일부러 데이지를 쫓진 않았다. 그저 위협만 준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낫은 가뿐하게 가자니아의 어깨로 돌아갔다.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데이지를 얕보고 있었다. 만약 데이지를 위협적인 적으로 간주했다면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탱커인 참옻나무가 나서야 했지만 애초에 그 드라이어드는 서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 무시하고 있네….”

그렇다면 상대가 완전히 방심한 사이 몰아붙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현재 파티의 메인은 데이지, 공격력이 잔뜩 상승한 상태에서 가막살나무도 무기를 들었다.

가막살나무는 검만 사용하는 만큼 방패를 든 다른 방어형 드라이어드보단 방어력이 낮아도 몸놀림이 좀 더 날렵하고 공격도 가능했다.

가막살나무가 앞서 나가 주의를 끌고 데이지가 적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결투가 처음인 것 치곤 둘은 합을 잘 맞추며 좋은 포메이션을 이뤘다.

드디어 가만히 서 있던 참옻나무 역시 더 이상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카가각!

귀가 찢어질 듯 쇠가 맞부딪혀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참옻나무의 건틀렛에서 날개처럼 펼쳐져 나온 반들거리는 방패가 가막살나무의 검을 막아 냈다. 가자니아는 머리 위로 큰 낫을 붕붕 돌려 사각지대로 접근한 데이지의 단도를 튕겨 냈다.

제자리에 멈춰 서는 순간은 짧았다. 드라이어드들은 쉴 새 없이 공방을 주고받으며 넓은 공터의 다져진 땅에 전투의 상흔 같은 발자국을 사방에 찍어 냈다. 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좀처럼 지지부진한 소모전만 이어졌다. 그렇다 할 유효타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가자니아의 낫은 독특했다. 큰 무기를 사용하는 만큼 데이지보다 자세를 잡고 공격을 하는 간격이 길었는데 한 번 휘두르면 큰 파괴력을 대변하듯 엄청난 바람 소리가 났지만, 느린 만큼 번번이 데이지를 놓쳤다.

하지만 허공을 가를 때마다 붉게 빛을 냈다. 붉은빛은 낫의 움직임을 따라 길게 궤도를 남겼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빛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꼭 허공에 길게 선을 그어 놓은 듯했다.

데이지를 놓치는 횟수가 늘수록 폰 액정에 난 스크래치처럼 허공에 난무한 빛의 잔상도 늘었다.

‘뭔가 수상하다.’

내 드라이어드들도 수상함을 눈치챘지만 사방에서 옥죄는 거미줄처럼 난자한 빛의 잔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필드를 종횡무진하며 날렵하게 움직이는 데이지는 공격을 피해 착지하려는 곳마다 시뻘겋게 독사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빛의 잔상이 남자 불가피하게 닿을 수밖에 없었다.

빛의 잔상에 닿자 사르륵, 칼에 찢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며 데이지의 부츠에 길게 자상이 생겼다. 데이지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어느새 데이지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반경에 닿기만 해도 대미지를 주는 함정이 즐비했다. 그녀가 활개 친 만큼 사방이 붉은빛의 잔상으로 가득했다.

남은 공간은 전부 가자니아의 낫의 사정권이었다. 붉은 함정은 데이지가 뻗어 낸 줄기도 단숨에 잘라 버릴 만큼 날카로웠다.

“데이지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시켰잖아…?”

슬쩍 본 그들의 주인인 더쉬맨의 표정은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마치 이럴 것을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눈치였다.

가자니아가 먹이를 낚아채는 사마귀처럼 데이지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멀리 갈 수 없게 된 데이지는 재빨리 가막살나무의 뒤로 숨었다. 그의 거대한 검이 데이지를 향해 쇄도한 낫을 막고 후려쳐 냈다.

그런데 어쩐지 가막살나무의 움직임도 묘하게 둔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장비가 가려 주지 못하는 얼굴과 맨살에서 동전만 한 크기의 붉은 반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가막살나무 역시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검을 힘겹게 휘두르며 데이지를 보호했다. 꼭 들고 있는 검의 무게가 천근만근 무거워져 다루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데이지는 결국 상대팀의 탱커부터 공략해 보려고 마음먹었는지 가막살나무와 합세하여 참옻나무에게 덤볐다. 가막살나무가 참옻나무의 방패를 막고 있는 사이, 데이지의 단검이 유려하게 흘러 들어가 참옻나무에게 유효타를 내었다.

그때 찰나의 순간에 나는 보았다. 착각일지는 몰라도 참옻나무의 근처에 데이지가 다가갔을 때, 그녀가 물에 빠진 것처럼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을.

일단 그래도 유효타가 제대로 들어갔으니까! 이렇게 계속 밀어붙이면….

데이지도 내 기대에 호응하며 상대적으로 가자니아보다 움직임이 느린 참옻나무에게 여러 번 유효타를 냈다. 하지만 갈수록 이상했다. 그가 상처를 입을수록 데이지가 더욱 느려지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니었는지 처음엔 참옻나무의 지척 범위에서 그러했다면 갈수록 그와 멀리 떨어진 범위에서까지 데이지가 느려지고 있었다. 또한 그럴 때마다 데이지의 하얀 피부에 가막살나무에게 생긴 것과 같은 붉은 반점이 선명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빠른 몸놀림이 장기인 데이지가 공격 속도에 제약을 받는다면 너무 쉬운 먹잇감이 될 터였다.

공격 속도가 느린 가자니아라도 데이지가 미처 피할 새 없이 대미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결국 데이지가 낫에 크게 베이며 가막살나무의 서포트를 받아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데이지!”

크게 다친 것처럼 보였으나 데이지는 훌훌 털고 자세를 바로 했다. 다행히 하얀 데이지와의 일전처럼 살이 직접적으로 베이는 치명타는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기이한 능력을 사용하는 가자니아처럼 참옻나무에게도 특수한 능력이 있다. 범위 안에서 공격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건가?

잠깐, 옻나무잖아? 설마 내가 아는 그 옻나무라면 가까이 다가가면 옻이 올라 옻 중독을 일으키는 그 나무 아냐? …방어형이 아닌 회복형의 보조가 필요한 싸움이었나?

가까이 다가가면 공격 속도 저하를 받고 멀리 가기엔 가자니아가 사방에 깔아 둔 함정이 문제였다. 데이지가 가막살나무의 뒤에 서서 단검을 합쳐 부메랑으로 만들어 던졌다.

하지만 데이지의 손을 벗어난 단검도 참옻나무의 능력 범위에서 날아가는 속도가 느려져 누구라도 피할 수 있는 공격이 되어 버렸다.

상황이 정말 좋지 않지만 제발 힘내! 차라리 참옻나무를 빨리 쓰러뜨려 버려서 저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 버린다면….

일순 데이지의 몸 주변에서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금빛 스파크가 팍 튀었다가 사라졌다.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점멸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신경을 쏟기엔 당장 내 데이지가 돌파구를 마련하는 일이 여의치 않아 보였다. 공격 속도 저하와 원거리 이동 봉쇄의 협공은 너무나 시너지가 좋았다.

가막살나무가 번번이 데이지를 향해 터지려는 큰 유효타를 막아 내고 있지만 데이지가 피하면서 가자니아의 함정에 닿거나 직접적으로 낫에 베이는 건 어쩔 수 없어 상처가 크게 늘고 있었다.

종내 바크를 뚫고 투명한 피를 흘리는 실금 같은 상처도 생기고 말았다. 함정도 피하며 가자니아가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파괴적인 낫의 공격까지 피해야 하는 데이지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넌 할 수 있어….”

전투가 지속될수록 데이지의 주위에 금빛 스파크가 나타나는 빈도가 늘었다. 심지어 그녀가 눈을 깜박일 때도 눈가 주변에서 부싯돌을 튀기듯 반짝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어차피 내기를 위한 경기이기 때문에 서로가 목숨을 걸 정도로 극악한 상황까지 가진 않기로 했었다. 그렇기에 한눈에 보기에도 많이 다치고 지쳐 보이는 데이지를 이젠 그만 불러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엘더를 불러내 치료를 해 줘야겠지. 더 이상 승부를 질질 끄는 것은 내 욕심일 것이 분명했다.

이건 드루이드 간의 정보 싸움에서 지고 들어간 싸움이었다. 그는 레드 데이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난 그의 드라이어드에 대해 이름 빼고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데이지를 먼저 꺼낸 것이 실책이었던 것이다.

봐주느니 마니 하면서 대충 드라이어드를 둘 꺼낸 것처럼 보여도 철저하게 데이지의 능력을 카운터 칠 수 있는 패를 꺼냈다. 이건 결국 드루이드의 자질에서 먼저 내가 하위임을 증명해 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넓은 공간을 사용하는 데이지의 행동반경을 제약해서 날렵한 몸놀림과 회피 기술을 봉인했다. 근접 공격에 페널티를 주어 데이지가 힘을 실은 강력한 한 방이 나올 수 없도록 봉쇄했다.

그들에게 정보가 없는 가막살나무가 변수가 될 수 있을지언정 방어형인 드라이어드가 승패의 주도권을 잡기란 어려웠다. 가막살나무의 역할은 극적으로 경기가 터지는 것을 간신히 수습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노멀이 약해서 안 키우는 것도 있지만 왜 또 안 키우는 줄 알아요? 너무 능력이 뻔하잖아. 너무 자주 보여서 사람들이 대충이라도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는지 다 아는 겁니다.”

경기의 치우쳐진 주도권을 대변하듯 여유로움이 철철 넘쳐흐르는 얼굴로 더쉬맨이 말했다.

난 이 세계의 드라이어드 등급이 무엇을 기준으로 나뉘게 되었는지 진실을 안다. 열매든 자연발생이든 세계수 밖에서 많이 태어날수록 등급이 낮아진다. 즉, 노멀은 그만큼 세계 곳곳에 퍼져 있고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꽃이란 뜻이었다.

언젠가 단델리온이 그랬다. 메스키트와 엘더는 내 작은 영혼의 크기에 맞추느라 뿌리를 못다 뻗고 있으니 내 영혼의 크기가 커질수록 뿌리를 맘껏 펼쳐 쓸 수 있는 능력도 많아진다고.

하지만 데이지와 같은 노멀 등급은 내 영혼의 크기로 제한된 능력이 없다고 했다. 성장할수록 강해지긴 하나 변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포레스트의 왕이 되는 것. 최대한 많은 동종의 꽃들을 섭렵하여 작은 뿌리가 모이고 모여 큰 뿌리로 보이게 하는 것.

하지만 아직 데이지는 왕이 되지 못했다. 섭렵한 동종의 꽃도 데이지2, 오직 한 송이뿐이었다.

당신이 내다 버린 내 꽃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 얼마나 강해졌는지, 거대한 불에 겁먹지 않고 맞설 수 있고 숱한 전투도 이겨 낸 얼마나 대단한 꽃인지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데이지를 등 떠민 것은 치기 어린 내 욕심이었던 걸까? 강짜를 부려도 될 정도로 시기가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틀렸던 걸까?

“내 주인, 제이. 당신의 불안감은 굳게 연결된 영혼을 통해 데이지 아이에게 전염돼요.”

문득 아티팩트에 있을 메스키트가 바로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책하려는 날 꾸짖는 것처럼 과거의 경험에서 태어난 그녀가 다정하지만 굳은 어조로 내게 말했다.

내 작은 아이가 비로소 나의 꽃이 되어 처음으로 전투에 나섰던 그날, 다칠 것이 두려워 되돌아오라고 할지 전전긍긍했었던 그때,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데이지에게 믿음을 보여 주었지만 주인으로서 하찮은 모습만 보여 줬던 그 순간.

내가 여기서 틀렸다고 인정하면 날 믿고 전투에 나선 데이지의 모든 순간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어.

드라이어드는 열매에서 개화한 순간부터 자신이 충성할 드루이드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자체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드라이어드를 개화시켜 진정한 드루이드가 된 후, 과수원의 안내원으로부터 들은 충고였다. 그리고 데이지는 드루이드인 내게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 주었다.

드라이어드가 날 믿는 만큼 나도 믿어 주어야 한다. 데이지는 이 전투에 내가 기대하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굳센 의지를 보이며 전투에 나섰다.

내 드루이드의 자질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 드루이드로서 가장 근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질, 드라이어드에게 온전하게 믿음을 주는 것!

“바로 그거예요.”

순간 메스키트가 내게 자상하게 말하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그녀가 내 곁에 없어도 항상 내게 의지가 되어 주는 것이 느껴졌다.

“아냐, 데이지는 여기서 실력을 전부 보여 준 게 아냐. 노멀이라고 다 같은 노멀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곱게 키운 노멀이에요. 당신이 봤던 노멀과 내가 키워 낸 노멀은 다를 거예요.”

어떤 환경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주는 꽃이라고 했다. 피어난 곳이 단단한 콘크리트라고 할지라도 작은 틈을 뚫고 자라나는 굳건한 꽃이라고.

내 말에 데이지가 지친 모습과 상반되는 올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난 달라요. 당신이 버린 그 노멀 등급의 레드 데이지 꽃이 아니에요. 내가 경애하는 제이 님이 피워 낸 그저 레드 데이지일 뿐이에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끝이 아니란 걸 이젠 알 수 있어요.”

데이지를 주변에 나타나던 금빛 스파크가 일시에 사라졌다. 동시에 내 손목에 채워진 아티팩트가 진동했다.

쩌적!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데이지의 주변이 둔탁한 것을 맞은 유리창처럼 금빛으로 수천 갈래의 금이 가는 형상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갈라진다니, 도무지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갈라진 것들은 산산이 조각난 금빛의 반투명한 조각들의 형상이 되어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데이지를 감싸는 형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조각들은 둥글게 군집을 이루고 알의 형태가 되었다.

동시에 데이지의 발밑에서부터 그녀의 모체인 레드 데이지 꽃이 피어나 호수에 일은 파문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람에 흔들려 서로 부딪히는 꽃잎들이 사르르 소리를 내는데 그것이 꼭 오르골의 음악처럼 들렸다. 마치 꽃들이 한데 모여 목놓아 성가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핏 보면 가상 아티팩트 공간이 구현될 때와 비슷했지만 차원이 달랐다. 데이지가 서 있는 장소에서 엄청난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일어난 변화에 모두가 놀라 움직임을 멈추고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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