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195/604)

세 남자는 물건을 도난당한 것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라 잠도 오지 않는다며 자신들이 나서서 경비를 서겠다고 했다.

나와 로웰라는 배를 채우고 일찌감치 침낭에 몸을 뉘었지만 시들링은 앉은 자리에 그대로 눈만 감고 있었다. 이따금 멀리서 파도 소리만 들리고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 흘러갔다.

그런데 좀처럼 잠에 들 수 없었다.

도난 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조금 불안한 정도였다. 내 드라이어드들의 반지는 구하기 힘든, 등급이 높은 반지들이었지만 아티팩트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문제가 없었고 그깟 다이아나 식량 좀 털린다고 내 무한 다이아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기에 철저히 남 일이었다.

하지만 식물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찝찝하게 계속 날 괴롭혔다. 마치 귓가를 왱왱거리는 모기처럼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졸려 죽겠는데도 쉽사리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10분 간격으로 뒤척이는 나 때문인지 시들링이 신경 쓰듯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가만히 누워 있자니 등이 간지러운 기분이라 일어났다.

“잠이 안 와?”

귀가 밝은 편인지 내 움직임에 선잠에 들었던 로웰라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날 따라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아까 들었던 이야기 때문에 불안해서 그런가 봐. 차라리 새벽까지 버텼다가 좀 밝아지면 테라리움으로 가는 게 어때? 사실 나도 불안했어.”

로웰라는 졸린 눈을 비비며 말했다. 목소리에 졸음이 가득했다. 나만 조용했다면 곤히 잤을 그녀이기에, 그 말에서 날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아냐, 그냥 드라이어드 없이 이렇게 여행하는 건 처음이라 적응이 안 됐나 봐. 난 여행 처음부터 항상 드라이어드와 같이 다녔거든.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조금 바람 좀 쐬다가 다시 누울 테니 넌 먼저 자.”

“에이, 나도 잠 다 깼어용. 파도 소리 좋다….”

그녀에게 선배 여행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선 나보다 그녀가 더 의젓한 기분이었다.

화가 나서 잠을 잘 수 없다던 세 남자는 정말이었는지,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 모닥불에 의지해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다 털렸다더니 카드는 안 뺏겼나 보네. 좀 끼워 달라고 해 볼까?

그들은 우리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렸는지 이쪽을 바라봤다.

“야외에서 취침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지요. 우린 언제까지 야외 취침을 계속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겨우 잊고 있었는데 자꾸 떠오르게 하네. 그만 좀 하면 안 되냐?”

다시 말다툼의 전조가 보인다. 새까맣던 하늘도 어느덧 푸르스름한 기운이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다. 차라리 로웰라의 말처럼 새벽까지 이대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자기들끼리 떠들던 세 사람은 말소리를 줄여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곤 무언가 결론이 났는지 대뜸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와 내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내기요?”

뜬금없이 웬 내기?

“정말 이대론 까딱없이 거지 생활을 하게 됐는데 당장 내일 의뢰를 구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처음 보는 분들께 이런 사정으로 대놓고 이 이상 구걸하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상금으로 당장 하루는 버틸 수 있는 약간의 다이아나 식량을 걸고 그쪽 분들과 내기를 하는 건 어떤지 싶습니다. 어차피 다들 잠도 안 오는 것 같고, 시간을 때울 무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꼭 어떤 내기를 걸지 모르겠지만 그쪽이 반드시 이겨서 다이아를 가져갈 거란 뜻으로 들리네요?”

“그렇게 불합리한 내기도 아닙니다. 드루이드들끼리 만나면 종종 친선 경기를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친선 경기의 승패로 내기를 하는 거죠. 3번째 테라리움에선 합법적으로 사설 투기장이 열리기도 하고요. 서로 전투 능력도 확인하고 대처법도 연구하고.”

친선 경기? 오밤중에 대체 뭘 하자는 거야?

“밤이라 드루이드는 나설 수 없지만 드라이어드들은 밤이라도 시야 제약을 받지 않으니 괜찮을 듯합니다만. 캠핑장이라 저쪽은 넓은 공터도 있고.”

“어… 드라이어드끼리 대결을 해 보자는 건가요?”

로웰라가 슬그머니 물었다. 드라이어드끼리 대결이라고?

“보아하니 실력도 꽤 괜찮은 드루이드분들로 보이는데 좀 도와주십쇼.”

“이쪽은 다이아나 식량을 건다 하더라도 그쪽을 뭘 거실 건데요? 다 털리셨다면서요.”

아까부터 우리가 내걸어야 할 것만 이야기하고 저쪽은 질 경우 무엇을 제시할 건지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드라이어드끼리 붙어 싸우면 반드시 우릴 이길 거라고 자신하고 있는 듯했다.

“뭐… 당장 사활이 걸린 만큼 최선을 다할 거라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저희가 만약 진다면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죽으라는 것 외에 뭐든 따르지요. 남은 것이 몸뿐이라 말씀대로 뭘 걸 것이 없지 말입니다.”

자신하는 것이 재수 없긴 했지만 목소리엔 꽤 절박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정말 뜬금없긴 한데 드라이어드 결투라…. 저쪽 말처럼 시간 때우기엔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이쪽이 진다 하더라도 다이아 좀 잃는 건 손해가 아니긴 한데. 저렇게 나오니 만약 한다면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저쪽은 지면 뭐든 하겠다고 했지만 딱히 그들을 데리고 뭐로 부려 먹을지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자신하는 걸 보면 혹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엄청 고렙인 걸까? 시들링은 한눈에 느낌이 왔지만 이리스 파티도 어느 정도 고렙 티가 났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느낌이 없었다. 끽해야 나보다 레벨이 조금 더 높은 것 같이 느껴지는 정도였다.

단번에 승낙할 만큼 마땅치 않아서 대답을 미루고 오래 생각했다. 시들링은 처음부터 아무 말도 없었고 로웰라는 내 눈치를 보며 입술만 달싹거렸다.

일방적으로 저쪽이 아쉬운 입장이니 우리가 거절하면 내기는 시작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저쪽은 애가 탔는지 좀 더 다급해진 말투로 조건을 붙였다.

“아… 혹시 알아보셨나요? 저희도 그렇게 몰염치하게 굴진 않을 겁니다. 저놈이 아닌 저나 얘의 드라이어드가 경기에 나올 거예요.”

그는 멀리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고개를 젓다가 자신과 바로 옆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뭘 알아봐요?”

“아, 저기 저놈이 저번 달 3번째 테라리움의 사설 투기장에서 무려 최종 2위를 기록한 걸 알고 계신 것 아니셨습니까?”

2위를 했다는 사람은 우리 자리에 와서 식량을 얻어먹을 때도 가장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역시 보기보다 다들 고렙이었나 보네.

“상금이 꽤나 크게 걸렸던 경기라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투기장 망나니 아이언비스트 이외로 2연속 1위를 거머쥔 드루이드가 나와서 꽤 유명했던 경기지요. 대진운이 안 좋았지, 그거만 아니면 저 녀석이 1위를 했을 수도 있어요. 상당한 실력자들이 많이 나와서 예선전부터 시끄러웠지요.”

“아, 네….”

그는 마치 그 업적이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풍당당했다. 그때의 투기장 분위기가 어땠는지 쉬지 않고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나는 슬쩍 시들링을 바라보았다. 네 이야기 하는데? 하지만 시들링은 좀 전부터 저들에게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투기장 이야기를 하면서 투기장으로 제일 유명한 놈인 얘는 못 알아보시나요? 얜 하도 1위를 독식해서 투기장에서 출전 금지당했다면서요?

어쩌면 그들이 처음부터 시들링을 알아보았다면 드라이어드 결투 내기 이야기 따윈 꺼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평범한 드루이드분들과의 경기엔 저 녀석은 나서지 않을 겁니다. 어떠십니까? 그저 가볍게 실력을 겨뤄 보는 자리라 생각하시고….”

시들링이 나서면 가볍게 이기려나? 이기는 걸 확신하고 있으니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고 싶긴 하네.

“한번 해 볼까?”

“드라이어드 결투는 해 본 적 없어서 나도 해 보고 싶긴 한데… 난 너무 약해서 아예 승부도 안 되겠지.”

내 말에 그들의 얼굴은 화색이 되었다. 또한 은근히 참가하고 싶다는 기색을 비추는 로웰라를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도 로웰라가 단번에 이기기 쉬운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로웰라가 이 결투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하더라도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 내가 나서야지.

“세 명 분량의 3일 치 비상식량과 다이아 조금을 걸게요.”

앉을 때 썼던 평평한 바위에 비상식량과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다이아를 한 움큼 꺼내 올려 두었다. 그걸 보는 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드라이어드는 둘씩 꺼내 2:2로 겨루는 걸로 합시다. 특성은 상관하지 않고 서로가 크게 다치기 전에 승패가 보이면 그만두도록 하죠.”

이런 결투에 메스키트급의 드라이어드를 보일 생각은 없었다. 꼭 이기고 싶긴 해도 메스키트, 바곳 그리고 엘더는 최후까지 숨겨야 하는 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거리트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고.

역시 데이지겠지? 둘이라면 공격형인 데이지와 다른 하나는 누구를 할까? 방어형인 가막살나무를 불러 볼까?

저쪽에서 드라이어드를 먼저 불러냈다.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는 빛 무리와 함께 화려한 두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꽃의 이름도 모르고 등급도 모르는 드라이어드들.

나 역시도 일단 데이지를 불러냈다. 이 시간에 자신을 불러낼지 전혀 몰랐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의 데이지가 붉은 꽃잎을 흩날리며 나타났다. 제일 먼저 날 살피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제이 님, 위험한 상황인가요?”

“그런 건 아니고 드라이어드들끼리 잠깐 대결을 할 건데….”

내 말에 주위를 둘러보던 데이지가 저쪽을 바라보더니 별안간 흠칫 어깨를 떨었다.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니 두 눈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무언가에 심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기… 저 드루이드….”

밝은 데이지와 어울리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 그녀가 저쪽의 세 남자 중 누군가를 알아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셋은 나와 오늘 만난 초면인데?

“레드 데이지로 보이지 않아? 노멀 등급을 꺼냈네?”

“그러게. 노멀 등급 드라이어드네요? 제 드라이어드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일러둘 건데, 노멀 등급으로 괜찮겠어요?”

데이지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등급에 얽매이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저들의 무례한 발언에 그녀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의 작고 여렸던 데이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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