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604)

“빌어먹을! 그러니까 잘 간수하라고 했잖아!”

“그렇게 못마땅하면 직접 관리하지 그러셨어? 나라고 짐에서 눈을 떼고 싶었는 줄 알아?”

“그만 좀 해! 이러다 새 의뢰를 맡기 전까지 여관 숙박은 꿈도 못 꾸게 생겼는데 언제까지 싸울 거야?”

각기 다른 남자 셋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되어 우리가 근처에 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지 아니면 좀 가라앉을 때까지 대기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저 자식이 당장 몫을 배분하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네놈이 자꾸 재촉했잖아. 혹시라도 내가 빼돌릴까 봐!”

“대체 무슨 수로 깡그리 털어 간 거야? 그렇게 허술하게 둔 것도 아닌데.”

최근 이 근방 테라리움들에서 도난 사건이 빈번하다고 하더니 저들 역시 피해 가지 못했나 보다.

“언니, 어떡하지?”

내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로웰라가 캠핑장 쪽을 바라보며 내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언제까지 이곳에 서 있을 수는 없지.

일부러 인기척을 크게 내며 다가갔다. 셋은 대화를 뚝 끊고 우리가 오는 쪽으로 일제히 돌아보았다.

우릴 살피는 눈에 경계가 가득했다. 도난 사건을 겪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흰 이제 막 도착했어요. 캠핑장이 꽤 잘되어 있네요. 모닥불 터도 있고”

로웰라가 쾌활하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뭐 굳이 서로 인사를 하고 가까워질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오늘 밤만 지나면 다신 안 볼 사이일 수도 있고. 생판 모르는 남을 엿들은 이야기로 위로할 생각은 없었다.

“저쪽으로 가자.”

나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로웰라가 쏜살같이 튀어 나가 우리가 머물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같이 해.”

그녀는 여행을 함께하는 동안 최선을 다하겠다더니 혼자 일거리를 다 차지하려는 것처럼 다급하게 움직였다.

로웰라 옆에 쭈그려 앉아 누울 자리에 깔린 돌들을 밖으로 던졌다. 그동안 시들링은 바로 근처에 부러져 쓰러진 나무를 치웠다.

우리가 분주하게 움직일 동안 상대 쪽은 입을 꾹 다물고 우리를 곁눈질로 지켜보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그들이 피운 모닥불 장작 타는 소리를 제외하면 정적이 가득했다.

이따금 멀리서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 소리가 미약한 졸음도 함께 몰고 왔다. 하루 꼬박 쉬지 않고 이동했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자리 정리가 모두 끝나자 로웰라는 시들링이 치워 버린 나무에서 모닥불 장작으로 쓸 나뭇가지들을 꺾어 왔다.

바닷가 근처다 보니 해가 떨어지자 맨살에 닿는 해풍이 꽤 쌀쌀했다.

“난 불 피울 도구는 안 들고 다니는데, 넌 혹시 있어?”

“없다.”

“그럼 주변에서 불 좀 잡아 올까? 아, 아까 주변에 불이 없다 했지. 좀 멀리 나가야 될 것 같은데.”

“배고프당. 그럼 내가 엉겅퀴랑 얼른 둘러보고 올까? 난 불보다 빨리 뭐 좀 먹고 싶은데….”

“혼자 보낼 순 없고. 그냥 밥부터 먹고 같이 갔다 오자.”

의자로 쓸 만한 평평한 바위에 앉아 주머니에서 비상식량들을 꺼냈다. 막 물통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려는데 상대 쪽에서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아깐 미처 인사를 못 드렸네요. 저희가 큰일을 당해서 좀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부러 등지고 앉은 시들링을 향해 인사를 했다. 시들링이 우리 파티의 리더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시들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무시했다.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든 말이라도 한번 섞어 보려던 그의 모습과는 달라서 의아했다.

주변은 어두웠고 모닥불은 반대 방향에 있었기에 인사를 건넨 사람의 얼굴은 역광으로 완전히 가려져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로웰라처럼 완전히 무시당했으니 난처하단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오, 설마 로웰라가 무시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해 준 건가? 그 시들링이?

우리 전체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 시들링만 콕 집어서 한 인사이니 내가 나서서 받아 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묵묵히 물을 마신 후 내가 가지고 있는 비상식량을 시들링과 로웰라에게 나눠 주었다.

“혹시 불이 필요하시다면 저희 모닥불에서 불을 좀 옮겨 드릴까요?”

그는 그제야 시들링이 아닌 나와 로웰라를 향해 대화를 걸었다.

“그래 주면 감사하죠.”

“그… 염치없는 부탁일 수도 있지만 불을 옮겨 드리는 대신 식량을 좀 나눠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오던 길에 식량은 물론 다이아까지 전부 도둑맞아서 하루 내내 굶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도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장담이 없어서…. 모쪼록 같은 여행자끼리 불쌍히 여기셔서 배려를 좀 부탁드립니다.”

“음….”

비상식량은 대량 사재기를 했기 때문에 주머니 속에 나 혼자 세 끼 다 챙겨 먹으면 어림잡아 1년은 버틸 정도로 넉넉했다. 나눠 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들이 보여 준 태도가 너무 미묘해서 조금 거슬렸다.

하지만 듣자 하니 가진 짐을 대부분 털린 것 같고, 경황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행 도중 생명에 직결하는 식량도 다 털렸다고 하잖아? ‘같은 여행자끼리’라는 말에서 느껴진 미묘한 거슬림도 완화시킬 수 있는 측은함이 느껴졌다. 선심 좀 써주지 뭐.

“저런, 심려가 크시겠어요. 불도 옮겨 주신다고 하니 같은 여행자끼리 같이 돕고 살아야죠.”

“정말 감사합니다!”

주머니에서 비상식량과 물을 꺼내 그에게 주려는데 뒤에 남아 있던 두 남자도 이쪽으로 걸어왔다. 한 명은 불이 붙은 가지를 들고 있다지만 둘 다 올 필요가 있나?

그런데 말릴 새도 없이 세 사람은 천연덕스럽게 우리 자리에 끼어 앉았다. 누가 보면 처음부터 함께 여행한 동료라고 생각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아이고, 다행이네요. 오늘 하루 내내 쫄쫄 굶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쪽 분들도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다 털어 갔지 말입니다.”

술술 이야기를 풀어 놓는 걸 보아 우릴 향한 경계심은 모두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런 나쁜 도둑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셨어요?”

조금 불편함을 느끼는 나와 달리 로웰라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처음 인사를 무시당했다는 것도 잊고 그들과 대화를 이어 갔다. 참 밝은 애야.

“봤으면 신고라도 하겠지만 아무것도 못 봤지 말입니다. 감쪽같이 물건들만 사라졌어요.”

“귀금속만 가져간다고 들었는데 식량도 가져가나 보네요.”

“요즘 도난 사건 때문에 이 근방을 여행하는 사람들도 줄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은 여섯 일곱 명씩 몰려다니다 보니 도둑질도 힘들어졌는지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다 훔쳐 간대요.”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귀금속은 드라이어드 손에 끼인 가락지도 빼내 간다고 합디다.”

헐, 드라이어드의 액세서리까지 빼내 간다고? 그게 가능해? 반지를 끼고 있는 내 드라이어드들을 떠올리며 지레 걱정이 되었다.

“도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모두 이 근방을 여행할 정도면 실력이 나쁘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무방비하게 털렸을까? 그렇지 않아, 시들링? 넌 근처에 뭔가 다가오면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은데 너처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을 거 아냐. 더구나 저긴 사람이 셋이나 되는데….”

“정신이 멀쩡한 상태로 당하진 않았을 거다. 숙련된 드루이드들이라면 주변의 이상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럼 뭔가 정신 공격 같은 걸 당했다는 걸까?”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들링의 말을 듣고 뭐 눈치챈 건 없냐는 의미였다.

“물건들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까지도 모두 멀쩡했지요.”

“잠을 잘 땐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평범하게 움직일 때 도난당했지 말입니다. 하, 찾을 길이 막막한데 앞으로 어떡한담.”

“우리도 조심해야겠네.”

저들의 증언이 맞다면 정말 신출귀몰한 도둑이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들도 있으니 뭔가 물건을 훔치는 데에도 특화된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셋이 모여 다니는 저들도 당했으니 우리도 당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메스키트처럼 육감이 예민한 시들링을 믿고는 있지만 드라이어드 손에서 반지도 빼 간다는데 방비가 될까?

“도난 사건도 그렇고 갑자기 전멸한 근방 군락지 사건도 그렇고, 주변이 흉흉하니 조심들 하세요.”

“그건 무슨 소리예요? 전멸했다뇨?”

“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뭐, 우리도 들은 이야기긴 한데. 정말 이 근방에 여행 온 지 얼마 안 된 여행객들이구먼. 시기가 너무 좋지 않을 때 온 것 같은데 차라리 31번째 테라리움에 큰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예 지나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군락지가 불에 당했나요?”

“불에 당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되죠. 듣기론 군락지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작은 곳이긴 했지만 모두 말라비틀어져서 군락지 식물이나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나 가릴 것 없이 죽어 버렸다고 합디다.”

“설마 전염병인가요?”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있던 일들이 불쑥 떠올랐다. 세계수의 가지도 죽일 정도로 강력한 연금술로 태어난 최악의 병충해. 설마 이 근방도 연금술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전염병도 아닌 게, 군락지 근처의 식물들은 무사했다고 합니다.”

“공격을 당한 것처럼 보였다고 했지? 모두 체액을 쪽 빨려 버렸다고 했던가? 메말라 버린 것처럼 시들시들.”

“소름 돋기도 하지. 식물을 대상으로 한… 그래, 꼭 흡혈귀 같은 것이 돌아다니나 봅니다.”

식물을 대상으로 한 흡혈귀라니. 내가 지나온 모든 테라리움들이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았지만 뒤 번대로 갈수록 별 괴상한 일들이 다 일어나는구나.

“언니, 흡혈귀래. 장난 아니다. 그치?”

로웰라가 덩달아 음산한 목소리로 주변에 뭐가 있는 것처럼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식물 대상인 흡혈귀면 사람은 괜찮지 않을까?”

“우리도 작은 세계수라고 불리는 드루이드니까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작은 세계수는 그냥 표현일 뿐이고…. 그래도 드라이어드들은 조심해야겠네. 시들링, 뭐 아는 거 없어?”

“없다.”

저들은 우리에게 31번째 테라리움을 피해 가라고 했지만 엘더의 나비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31번째인지 41번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피해 가긴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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