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은 엘더의 나비가 날갯짓하는 곳. 아침 일찍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출발하는 황금 호박 상회의 마차를 얻어 타고 길을 떠났다. 엘더의 나비는 뒤 번대 중에서도 끝자리가 1~3번대인 테라리움들을 향하고 있었다.
세계수를 제일 상단에 두는 세계 지도는 개미굴처럼 뻗어 나가, 테라리움들을 번호 순서대로 선으로 잇는다면 지그재그 모양으로 보였다. 지도상에서 18번째와 28번째 테라리움은 서쪽에 있다면 우리는 정반대편인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메스키트의 당부를 들었는지, 그녀를 포함한 바곳과 데이지는 28번째 테라리움에 남았다. 나비의 안내가 필요한 엘더는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가야 하지만 세계수를 협박한 전적이 있는 만큼 울며불며 옆에 붙어 다닐 거라고 졸라 댄 마거리트 역시 함께하게 되었다.
하지만 출발 전, 그녀에게 절대 엘더와 다투지 않기로 약속은 받아 냈다. 덕분에 마차 안이 우려했던 것보다는 조용했다.
내 양옆엔 덩치 큰 하얀 드라이어드들이 덩치만큼 부피도 큰 옷을 입고 더울 정도로 찰싹 붙어 있었다.
둘 중 어느 하나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말을 거는 순간 파국으로 가는 헬 게이트가 열릴 것을 알기에 묵묵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로웰라는 내 속도 모르고 내 드라이어드들이 화려하고 멋있어 보인다며 연신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내 드라이어드들을 진심을 다해 칭찬해 주는 건 정말 고마웠지만 제발 그 칭찬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엘더와 마거리트는 음유시인처럼 노래라도 부를 기세로 자신들을 찬양해 주는 로웰라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가 될 때까지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내리 마차 안에서만 보내서 온몸이 쑤셔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마차가 멈췄다.
“드루이드님들, 여기서 내리셔야겠습니다.”
일단 31번째 테라리움을 향해 쭉 내려가는 우리와, 얻어 타게 된 마차의 목적지는 달랐다. 길이 불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잘 정비된 앞 번대 테라리움 라인과 다르게 뒤로 갈수록 민간 마차는 잘 다니지 않고 그나마 상회 정도는 되는 곳에서 운용하는 마차만 다닌다고 했다.
마침 황금 호박 상회의 마차가 뒤 번대 테라리움으로 내려가기에 겸사겸사 얻어 탄 것이었다. 비록 중간에 내려야 했지만 그래도 꽤 긴 거리를 편안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30번대 테라리움에 방문하시게 된다면 그 테라리움의 저희 황금 호박 상회 분점을 찾아 주세요. 제이 님께선 저희 상회의 중요 고객이시니 더 뒤 번대로 내려가는 마차가 있다면 기꺼이 동승시켜 줄 겁니다.”
“네, 참고할게요. 감사해요.”
그래도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서 그런지 길이 잘 닦여 있었다. 길만 쭉 따라가면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테라리움에 잘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가시기 전! 최근 가시려는 방향에 있는 테라리움들에서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도둑질이 성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귀금속들을 도난당하는 사례가 많다고 하니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 벌처럼 빠르게 소지품들을 털어 간다고 하니 귀중품들은 주머니 밖으로 꺼내 놓지 않는 것을 조언드립니다.”
“헐, 도둑질이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조심해야겠네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도둑질이라…. 우리들은 인벤토리 기능을 하는 주머니가 있는 장비를 입고 있으니 조언처럼 중요한 물건을 주머니 밖으로만 꺼내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엘더의 나비는 34번째 테라리움을 지날 때도 이곳에는 볼일 없다는 듯 여전히 동쪽을 향해 치우쳐져 있어서 예정대로 31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여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가는 길에 제법 주변을 돌아다니는 불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나나 시들링이 나설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서 덕분에 로웰라만 열심히 엉겅퀴 드라이어드와 함께 뛰어다녔다.
그녀는 정말 열렙을 해야겠다는 일념 하나에 사로잡힌 것처럼 불을 쫓아다녔다. 한창 전투를 치르고 꼬질꼬질해진 엉겅퀴 드라이어드는 엘더가 툴툴거리면서도 잘 치료해 주었다.
중간중간 우리와 방향이 같은 마차를 발견하면 짧게 얻어 타기도 했다. 드루이드 승객은 불로부터 마차를 지켜 줄 수 있기 때문에 운행 도중 만나면 운이 좋은 거라며 우릴 태운 이들이 모두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도 마차를 호위할 용병을 고용한 상태로 길에 나왔기 때문에 실상 우리가 전투를 치러야 할 일은 많지 않았다.
31번째 테라리움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의 세기가 거세지고 공기 중에 짭조름한 냄새가 퍼져 있었다. 높다란 산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하늘엔 하얗고 큰 새들이 떠다녔다.
저지대로 내려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 같은, 깎아 낸 듯한 절벽 위에서 비로소 나를 기다리는 새로운 무대가 어딘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시원한 파도 소리, 피부에 와 닿는 소금기 가득한 바람, 코끝을 스치는 약한 해초 냄새.
어두운 밤하늘이 녹아들어 묵빛으로 흔들리는 거대한 바다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쿵 떨릴 정도로 나를 압도했다.
반딧불이처럼 바다를 떠다니는 주홍색 불빛들이 나를 환영하는 것처럼 좌우로 일렁거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바다 생물처럼 떠다니는 배의 윤곽도 보였다.
“와… 바다가 있었네….”
꼬박 하루를 달려 도착한 곳엔 예상치도 못했던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와, 바다는 처음 봐…. 26번째 테라리움에서 이렇게까지 멀리 와 보는 것도 처음인데.”
로웰라가 두 손을 이마에 처마처럼 대고 허리를 쭉 빼 멀리 펼쳐진 광경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절벽 끝에서 위험하게 서 있는 것도 잊고 집중한 나머지 결국 엉겅퀴 드라이어드가 양팔로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떨어지지 않게 지키고 있었다.
“나 바다가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도 못 했어.”
그래, 생각해 보면 필드 분류 중에 분명 오션 필드가 있었으니 바다가 없을 리가.
“얼른 내려가자. 빨리 가까이서 바다를 보고 싶어.”
바다를 보는 것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을 따져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로 바쁘기도 하고 차도 없으니 바다가 있는 먼 지역으로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저렇게 내게 얼른 오란 듯이 잔잔하게 흔들리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 꼭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기분이 잔뜩 들뜨고 설렜다.
“이곳은 지형이 험하다. 더구나 어두우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시들링이 먼저 앞장서며 말했다.
절벽으로 내려가는 길엔 돌을 덧대 만든 울퉁불퉁한 계단과 계단을 따라 양옆으로 늘어진 두 줄의 밧줄이 전부였다. 더구나 밧줄은 중간중간 탄 흔적과 함께 끊어져 있어서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에 높낮이도 제각각인 계단을 이 어두운 밤에 단출한 조명에 의지해서 내려가는 건 나 같은 운동치에겐 자살 행위가 아닐까?
일부러 빨리 가기 위해 마차도 다니지 못하는 험준한 지름길을 택하긴 했는데 결국 그 선택으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제이 언니! 여기 안내판이 있어. 근처에 여행객들을 위한 캠핑 장소가 있나 봐.”
우리는 서로 얼굴을 가까이 마주 볼 수 있는 마차라는 좁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있었다. 마차 안에선 딱히 할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말도 트고 나이도 트고 친해질 기회가 생겼다.
로웰라는 나보다 딱 네 살 어렸다. 드라이어드들을 칭찬해 주며 내게 많은 환심을 사는 것에 성공한 로웰라였기에 어리다는 걸 안 순간부터 후배도 아닌 정말 사촌 동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스 파티와 함께할 때와는 무언가 달랐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를 내가 보호하고 보살펴 줘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받아들였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로웰라가 먼저 내게 언니라고 불러도 될지 물었고 나는 흔쾌히 그래도 된다고 했다. 내 세계로 치면 그녀는 고등학생이었다.
한창 학교에서 수능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할 나이지만 씩씩하게 위험한 여행길에 오르는 드루이드의 길을 택한 그녀의 모습이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쉬어갈 만한 캠핑장을 가리키는 낡아빠진 이정표는 내려가는 길과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변에 불이 없군. 누군가 퇴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우리가 가려는 캠핑 장소에 다른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네? 아마 드루이드들이겠지?”
나는 엘더와 마거리트를 바라보았다. 날이 어두워서 어차피 나비를 더 쫓을 필요 없으니 드루이드들을 만나기 전 애들을 아티팩트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캠핑 장소에서 마주칠 드루이드들이 내게 호의적일지 적대적일지 알 수 없으니 메스키트가 누누이 강조한 드루이드들의 방식을 따라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티팩트로 돌려보내려고 하니 엘더도 그렇지만 마거리트가 곁에 있고 싶다며 강짜를 부렸다.
“내 진리, 불안해? 내가 예언해 줄까? 앞으로 만날 사람들이 우리 진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할지 점을 봐줄 수 있어. 기껏해 봐야 좋을까 나쁠까를 보는 정도니까 나도 할 수 있어!”
“우리 사랑스러운 마거리트.”
내 말에 마거리트가 비상하는 새처럼 파드득 놀라며 해사하게 웃었다.
“내 앞날은 뭐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재밌는 거야. 이전부터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마거리트에게 이런 일로 점을 보는 일은 없을 거야. 그만 투정 부리고 아티팩트로 돌아가서 쉬자, 응? 그래야 내일도 내 곁에서 열심히 날 지켜 줄 거 아냐?”
“내 진리는 어떻게 말하는 것도 이렇게 나처럼 사랑스러워? 나의 소중한 진리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그 전엔 잘도 떼썼으면서. 마거리트가 아쉽다는 마음을 풀풀 풍기며 날 껴안았다. 난 그녀의 모자에 턱이 치이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 진리가 갑자기 사랑스러운 내가 보고 싶어질 수 있으니 아티팩트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을게. 바로 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도록 계속 하늘을 보고 있을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메스키트가 벼르고 있다.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억지로 날 따라가려 할 때, 야단칠 기세를 태양을 닮은 두 눈 안에 가득 담아 놓고 마거리트의 등 뒤에서 무시무시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티팩트로 돌아가는 즉시 마거리트는 메스키트에게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거리트는 좀처럼 내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기에 결국 엘더가 목덜미를 붙잡아 아티팩트로 끌고 돌아갔다.
나를 따라 로웰라도 엉겅퀴 드라이어드를 아티팩트로 돌려보낸 후 우린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캠핑장에 가까워질수록 불만에 가득 찬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우리가 마주할 사람들이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은 상태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