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했을 땐 어느덧 날이 많이 어둑해져 있었다. 테라리움에 도착하자마자 멀리서부터 마거리트가 우는 얼굴을 하고 뛰어와 날 반겼다. 기다란 양 갈래 머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흔들렸다.
“나의 진리! 어떻게 나만 두고 갈 수가 있어?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만 버려두는 거야?”
혼자만 두고 간 것은 아니었다. 메스키트도 그녀의 교육을 책임지겠다며 모처럼 테라리움에 남았다. 어차피 28번째 테라리움 또한 내 아티팩트나 다름없으니 유사시 언제든지 아티팩트를 통해 내 곁으로 올 수 있으니까.
각오는 했지만 황소처럼 돌진해 안기는 마거리트 때문에 잠깐 눈앞이 하얘졌다. 그 와중에 좋아진 장비로 타격 고통이 많이 줄어든 것이 놀라웠다.
“나의 진리는 내가 안 보고 싶었던 거야? 어떻게 저 엘더 플라워만 데려갈 수 있어? 다음부터는 나만 데려가 줘. 쟤랑 단둘이 웃음꽃을 피웠을 걸 생각하니까 햇빛을 봐도 본 것 같지 않게 우울했어.”
“엘더랑 단둘이 간 건 아니야.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다음부터는 나만 데려가! 우리 둘만 가!”
나보다 키도 크면서 품에 안기려 드니 마거리트의 모자챙이 퍽퍽, 하고 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마거리트.”
느린 걸음으로 이곳을 향해 다가오던 메스키트가 낮은 목소리로 마거리트를 불렀다. 마거리트는 흠칫 어깨를 떨더니 날 질식시켜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메스키트도 너무해! 왜 자꾸 나의 진리랑 떨어뜨려 놓으려는 거야?”
“헬프….”
“난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가 되었어! 세계수도 그걸 알고 보내 준 거라니까? 그렇게 팍팍하게 날 가르치지 않아도 난 언제든지 나의 진리와 여행을 떠날 수 있다구!”
“헬프…. 숨 막혀 죽어….”
“앗! 내 진리가 죽어 가!”
마거리트가 팔에 힘을 푼 것과 동시에 메스키트가 그녀의 팔뚝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데이지를 대할 때보다 거칠었다.
마거리트는 인형처럼 덜렁 들어 올려지다가 메스키트의 어깨를 다른 손으로 짚곤 묘기를 부리듯 훌쩍 텀블링을 해서 넘어갔다. 불편한 옷차림을 하고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누누이 네가 내 주인을 대하는 태도가 과하다고 가르쳤지 않니?”
메스키트는 마거리트가 자신을 뜀틀 삼아 넘어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녀를 내게 떼어 놓으면 됐다는 듯 마거리트를 향해 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날 두고 떠난 내 진리를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그랬어!”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내가 못해도 일주일은 28번째 테라리움에 두고 어딜 다녀왔다면 이해라도 돼. 마거리트 논리대로라면 영혼의 연결을 맺은 후부터 28번째 테라리움에 붙박인 데이지2는 날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해야 했다.
“그거 줘 봐.”
“뭘?”
마거리트가 메스키트를 향해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 동안, 엘더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 둘이 만든 거.”
“그냥 총알이나 탄환을 달라고 하면 되지.”
둘이서만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힘을 합쳐 만들었던 것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웠나 보다. 메스키트와 마거리트에게 자랑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무 생각 없이 탄환을 넘기다 퍼뜩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하지만 이미 탄환은 내 손을 떠났고 엘더를 말리기엔 늦었다.
엘더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마거리트에게 걸어갔다.
“야! 안 그래도 심통 난 애, 자극하지 마!”
“뭔데?”
마거리트가 한 불퉁한 얼굴로 엘더에게 톡 쏘아 말했다.
“나와 제이가 힘을 합쳐 만든 거. 내 힘이 담겨 있어, 여기에.”
“뭐?”
엘더는 제 손바닥 위의 탄환을 굴리며 비웃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마거리트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성이라도 낼 줄 알았던 그녀는 의외로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을 했다.
“제이의 영혼이 내 힘을 불러와 여기에 담았다고. 둘이 같이 이걸 만들었어. 부럽지?”
“엘더! 애, 그만 놀려!”
다 컸다며! 묘목이랑 자기랑 비교하지 말라며! 왜 마거리트처럼 너도 몸만 훌쩍 큰 애같이 구는 거니?
“내 진리! 정말 엘더 플라워와 둘이서 씨앗을 만들었단 말야? 너무해! 나랑도 만들어!”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마거리트가 거칠게 엘더를 밀치고 내게로 달려왔다. 내 양 어깨를 붙들고 탈탈 털어 대니 드라이어드의 힘에 못 이겨 휘청휘청 흔들렸다.
“씨앗이라니? 저건 그냥 엘더의 힘이 담긴 탄환이야. 총에 넣어 쓰는 거야.”
“하지만 쟤 말하는 것 좀 봐! 저거 생긴 것도 그렇고, 어떤 꽃이 들어도 씨앗을 만든 건데?”
어딜 봐서 저게 씨앗인데? 아니, 드라이어드 열매도 투명한 공처럼 생겼으니 힘을 담기 전 투명한 구슬처럼 생긴 탄환도 씨앗처럼 볼 수 있는 건가?
“그만. 제이는 드라이어드가 아니라 드루이드예요. 엘더가 당신을 놀리기 위해 오해하게끔 말했다는 사실 정돈 깨달아야죠.”
메스키트가 피곤하다는 얼굴로 마거리트를 달랬다. 어떤 상황이 와도 끄떡없던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봐서 신선했다.
“오해라니…. 그럼 진짜 씨앗을 그렇게 만들어?”
탄환을 만드는 방식이 씨앗을 만드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것에 놀라웠다.
“그렇지만…. 그럼 저거 다음엔 나랑 만들어! 쟤 힘이 담긴 것처럼 흐리멍덩한 흰색이 아니라 최고로 화사한 흰색을 만들어 줄게.”
“제이는 다음에도 나랑 만들기로 했어. 네 차례는 없어.”
“그만 좀 싸워. 이젠 같이 여행해야 하는데 둘이 만날 때마다 싸우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앞으로의 여정이 매 순간마다 이렇게 시끄럽다면 활기차긴 해도 진짜 피곤할 것 같은데. 내가 뭐라 하든 서열 싸움하는 고양이처럼 시끄럽게 왁왁 싸워 대는 둘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치 페리윙클과 카돈이 처음 만났을 때를 보는 것 같네요. 그렇지, 시들링?”
어느새 홀연히 시들링의 아티팩트에서 나타난 칼미아가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시들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카돈이 저 어린 마거리트처럼 의욕은 넘치는데 주체가 안 되는 말썽쟁이였어요. 카돈은 벨라돈나가 혼내도 그때뿐이었고 페리윙클을 제외한 우린 모두 카돈을 상대하는 것을 귀찮아했거든요.”
갑자기 육묘의 고통을 나누는 집사들의 모임이 된 기분이다. 칼미아는 팔짱을 끼고 추억에 잠긴 듯한 아련한 눈이 되어 마거리트와 엘더를 바라보았다.
“페리윙클이 매번 나서서 카돈을 제압하려 했는데 워낙 힘이 넘치는 둘이니 매번 싸움이 났어요. 저 둘은 저렇게 말로 싸우지만 우리 쪽은 무기를 들었어요. 드루이드인 시들링조차 방관을 하니 열 걸음 걸을 때마다 주변이 엉망진창이 되는 싸움이 벌어졌지요.”
만약 저들처럼 엘더와 마거리트의 상황이 악화되어 매번 무기를 들고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미래가 암울해졌다. 오랜만에 드라이어드 하나를 더 영입해서 활기 넘치는 팀을 기대했는데.
“진짜 장난 아니었겠네. 지금 둘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 싸우는 모습은 못 본 것 같은데.”
“함께 싸우고 위기를 겪으면 된다.”
시들링이 덤덤하게 말했다.
“맞아요. 지금은 저 마거리트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주변이 보이지 않아서 그래요. 주인인 드루이드가 안전한 상황이니 신경을 쓰지 않는 거예요.”
“마거리트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기보단 너무 과하게 나를 신경 쓰는 것 같은데….”
“그것도 평온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에요. 저 마거리트 아직 전투 상황을 겪어 본 적 없죠? 주인이 위험한 상황에서야 자신의 적이 같은 부케의 드라이어드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될 거예요. 세상 물정 모르는 드라이어드라는 거죠. 카돈도 몇 번 전투 상황을 겪고 나서 그나마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거예요. 드루이드를 지키기 위해선 드라이어드들끼리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
답은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것뿐이구나.
제 이야기를 들은 카돈도 등장할 법한데, 벨라돈나를 제외한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차례로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방문한 28번째 테라리움에 반가움을 표할 동안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철없던 과거가 어지간히 부끄러웠나 보다.
부디 마거리트와 엘더의 관계가 카돈과 페리윙클처럼 먼 훗날엔 개선되길 빌었다.
***
그레이트 빈 연합에서 고용된 사람들 중엔 요리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황금 호박 상회의 식료품을 이용하여 매 식사 시간마다 급식소를 연다고 했고 나와 시들링은 늦은 저녁을 그곳에서 때웠다.
인부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로웰라가 제 몫의 식사를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합석을 했다.
자리에 앉은 로웰라는 숟가락을 들지 않고 내 쪽을 보며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합석한 이유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나 보다.
말을 꺼내길 기다리느라 고기를 오랫동안 씹고 있으니 겨우 그녀가 입을 뗐다.
“저… 제이 님. 데이지 드라이어드에게 들었는데 내일 떠나신다면서요.”
“아, 네. 전 테라리움에 오래 머무르는 행정 관리원은 아니거든요.”
“저기… 28번째보다 훨씬 숫자가 큰 뒤 번대 테라리움으로 가신다고….”
“음, 맞아요. 아무래도 50번보다 더 큰 숫자의 테라리움까지 내려갈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대화가 끊겼다. 그녀는 이젠 숟가락으로 그릇 안을 휘적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저… 저… 혹시 저도 같이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많이 약해도 절대 폐는 안 끼치도록 할게요. 원랜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다른 드루이드의 스톤헨지에 가입하고 싶었는데 다들 인원수가 다 찼다 그러고…. 노멀 등급 드라이어드 하나만 데리고 있어서 그런지 잘 껴 주려고 하지 않아서….”
저런, 파티 가입을 거절당했구나. 게임에서 파티를 맺을 때 스펙이 낮은 유저가 무시되는 것은 자주 봤다.
“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자취해서 요리도 잘하고 빨래도 잘해요. 틈틈이 운동도 해서 무거운 것도 잘 들어요. 오래 걷는 것도 잘하고 잠도 조금밖에 안 잘 자신 있어요! 아직 약하긴 해도 엉겅퀴랑 최선을 다해서 불과 싸울게요! 다쳐도 회복 능력 안 써 주셔도 되니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역시 제가 제이 님처럼 대단한 분들과 여행하기엔 많이 부족하죠….”
내가 거절했다고 생각했는지 로웰라는 금방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아니에요. 여행을 함께한다면 다 같이 동등하게 대우를 하지 누굴 부려 먹으려고 데려가진 않아요. 그런데 뒤 번대는 왜요? 앞 번대 테라리움이 여행하기엔 더 안전하지 않나요?”
“뒤 번대 테라리움으로 갈수록 더 강한 불이 많으니까요! 남들이 아직 가 보지 않은 100번대 테라리움까지 가 보는 게 제 꿈이에요.”
오, 포부는 좋다. 역시 위험한 곳일수록 모험하는 재미가 있지. 100번대 테라리움까지 노리다니, 야망 있는 뉴비였잖아?
“그리고… 사실 제 엉겅퀴가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 군락지에 절 초대하고 싶다고 해서요…. 노멀 등급 드라이어드는 다른 높은 등급들과 다르게 드물게 최초의 군락지라는 곳의 위치를 느낄 수 있대요. 전 처음 듣는데 엉겅퀴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니 꼭 가 보고 싶어서…. 그런데 엄청 번호가 큰 뒤 번대 테라리움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해서 혼자 가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어? 최초의 군락지요?”
“네, 제이 님은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장비의 바크 강화를 최초의 군락지에서 할 수 있다고 했지. 운이 좋아야 갈 수 있다는 그곳을 마침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다니. 이거 엘더의 힘이 담긴 탄환이 정말 행운의 부적이라도 되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