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604)

“절 위한 전용 장비요?”

“이제 슬슬 그런 장비를 준비하지 않으실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앞으로의 여정이 새겨질 제이 님의 첫 전용 장비만큼은 제가 제작하고 싶단 마음이 들었어요. 제 장비들을… 가치들을 알아주신 분이니까요. 그리고 부모님께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써 주셨으니까요. 꼭 보답하고 싶었어요.”

앞으로의 여정이 새겨질 장비라니. 대체 어떤 장비이길래 이토록 내 심금을 울리는 걸까?

“처음엔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지만… 만들수록 좀 더 욕심을 내긴 했어요. 제이 님을 처음 만났을 때 모습을 생각하며 앞으로의 여행을 상상하니 영감이 자꾸 떠올라서….”

“다른 장비 상점엔 갈 필요도 없네요. 어서 보여 주세요!”

“마음에 안 드실지도 몰라요…. 누군가를 위한 전용 장비는 처음이라….”

종종걸음으로 앞서가는 그녀를 따라갔다. 처음 방문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 이리스 파티와 이야기를 나눴던 진열대를 지나 팸플릿을 건넸던 계산대 앞까지 도착했다.

장비를 갈아입었던 곳 옆에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 앞에서 그녀는 양손을 매만지며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여기까지 날 데려온 것을 조금 후회하는 듯한 눈치였다.

“저를 생각해서 제작한 장비라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전 보기도 전에 벌써 마음에 드는데요.”

내 말에 그녀는 심호흡을 하곤 커튼을 걷었다. 나와 체형이 비슷한 마네킹에 제복을 연상케 하는 올 블랙의 장비 세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계속 검은 로브를 입고 다니시길래 검은색을 선호하시는 것 같아서… 전부 검은색으로 맞춰 봤어요. 롱 코트는 여기 뒤에 후드도 있어서….”

그녀가 마네킹을 빙글 돌려 뒷모습도 보여 주었다.

“로브 대신 입고 다니시기에도 좋아요….”

저 장비를 입게 되면 바로 로브는 버린다. 비로소 초보자 장비를 벗고 성능과 멋짐을 모두 챙긴 완벽한 룩템을 갖게 되었다.

겉옷은 앞이 골반을 겨우 덮을 정도로 짧지만 뒤는 직각으로 떨어져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언밸런스 롱 코트였다. 지퍼를 내리니 파충류의 비늘처럼 짜여진 특이한 옷감의 나시가 보였다.

하의는 주머니가 많은 반바지인 반면에 롱부츠가 허벅지까지 올라와서 맨살을 전부 가리는 구조였다. 검은 가죽 장갑의 손가락 마디에는 작게 징들이 박혀 있었고 모자는 무려 고글이었다.

특이한 점은 팔뚝, 소매, 가슴 부분은 물론 허리, 심지어 부츠에도 모두 가죽 벨트가 있다는 것과 검은 보석이 군데군데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보석은 장식인가?

장비를 유심히 살피는 날 보며 그녀는 부위들을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앞으로 물이나 늪에 들어가실 때 젖거나 오염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바지는 짧게 부츠는 길게 고안해 봤어요…. 여행 도중엔 세탁을 자주 할 수 없으니까요. 부츠의 소재는 신중하게 골라 만들었으니 물 묻힌 헝겊으로 닦아 내는 것만으로 오염을 지울 수 있어요. 또 보온성도 좋고 땀이 차는 게 방지돼요.”

발목 위로 올라오는 신발은 신어 본 적이 없는데 난생처음으로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신발이라니. 게임이나 만화 속 캐릭터들이 신던 걸 이젠 내가 직접 신게 되니 두근거렸다. 진짜 판타지 속 장비를 보는 기분이다. 저거 내 다리에 들어가겠지?

“벨트가 많네요?”

“만약 바크 강화까지 하게 된다면 평생을 입게 될 수도 있는 장비다 보니… 근육이 붙거나 체형이 달라지면 벨트를 조이거나 풀어서 조절할 수 있도록 했어요.”

“우와… 평생 장비…!”

장비 곳곳에 나를 배려한 세심함이 엿보인다. 거기다 슬쩍 만져 보니 장비를 이룬 모든 소재가 아주 고급스럽다는 것이 촉감으로 바로 느껴진다.

“바로 입어 봐도 돼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전에 장비를 맞출 땐 그녀가 거들어서 피팅을 도와주었는데 나 홀로 덩그러니 탈의실로 들여보내는 것을 보아하니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장비인 듯싶었다.

입고 있던 로브와 장비를 훌훌 벗어 버리고 새 장비로 갈아입었다. 정말로 날 위해 제작된 장비라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벨트를 조절할 필요 없이 처음부터 한 몸인 것처럼 딱 맞고 편했다.

장갑을 끼고 마지막으로 고글도 이마에 쓰고 탈의실 안에 있는 거울로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살펴보았다.

룩이 바뀌자 쪼렙 제이는 온데간데없고 노련한 모습의 제이가 함박웃음을 짓다 못해 광대가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드라이어드의 장비처럼 화려하게 금장이나 문양이 있는 건 아니지만, 특이하게 손등이며 어깨, 팔뚝, 가슴, 등 장비 곳곳에 눈에 띄게 검은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검은 보석들을 손으로 쓸어 보며 하나하나 찾는데 꽤 많았다. 혹시 장비 이름이 뭐 ‘검은 보석의 장비 세트’ 이런 건가? 단순 장식품인 걸까? 룩도 괜찮지만 꽤 실용성을 중시하는 것 같던데, 보석도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원래 입던 로브에서 핸드폰과 아이템들을 꺼내 코트의 주머니로 옮겼다. 다이아가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핸드폰에 다이아를 다시 주워 담고 있으니 난쟁이들의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물건들을 옮기는 것을 끝내고 갈아입은 옷의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검은 잉크로 ‘포르타’라고 멋들어지게 적힌 명함 사이즈의 카드가 나왔다. 이건 뭐지?

탈의실을 나가자 내 모습을 본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쩐지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주머니에서 ‘포르타’라고 적힌 종이가 나왔는데 이게 뭘까요?”

“아… 포르타는 제 이름이에요.”

장비 제작자를 표시해 둔 거였구나. 장인이 공들여 제작한 장비엔 네임이 붙어야지, 그래야 제작 장비지, 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너무 멋있어요. 불편한 곳 하나 없이 완벽하네요.”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시들링을 향해 이마의 고글도 내려 써 보이며 자랑했다. 네 갑옷만큼 내 장비도 꽤 멋지지 않니? 물론 그가 칭찬을 한다거나 하는 반응은 없었다. 재미없는 놈. 아직 이 정도까지 바라는 건 무리란 말인가.

“투구를 선호하시는 것 같진 않아서… 데저트 필드나 스노우 필드의 폭풍을 방지할 수 있는 고글로 준비해 봤어요…. 먼지로부터 눈을 보호할 수도 있지만 거기 버튼을 누르면 렌즈가 바뀌는데.”

포르타의 안내를 받아 고글 옆에 있는 작은 버튼을 딸깍 누르니 순식간에 눈앞이 어둡게 변했다.

“강한 햇빛이나 설산의 설광으로부터도 눈을 보호할 수 있어요.”

“최고다….”

그러고 보니 고글에도 장식된 검은 보석이 만져졌다.

“이 검은 보석들은 뭐예요?”

“흑요석이에요. 구하긴 어려워도 어떤 태양의 가호도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특별히 연금탑에 요청해서 상등품의 흑요석들을 구해 왔어요…. 보통은 가성비 좋게 개화 시기를 많이 차지하는 4월의 다이아몬드나 5월의 에메랄드를 장착하지만 어떤 바크 강화를 선호하실지 모르니….”

네? 여기서 그 보석들이 왜 나오는 거죠?

“어… 보석들을 드라이어드가 아닌 장비에 쓰기도 하나요?”

보석은 드라이어드의 악세사리처럼 전투 보너스를 받기 위해 착용하는 것이 아니었어?

“…바크 강화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갓 초보 드루이드에서 벗어나신 것으로 보이니 그러실 수도 있어요.”

“그녀는 묘목과 같은 수준이다.”

계속 조용히 있던 시들링이 툭 말을 내뱉었다. 하, 이제 좀 쪼렙 티 좀 벗어나나 싶었는데, 아직도 묘목을 운운하다니.

“드루이드의 장비에 사용하는 보석은 드라이어드의 태양의 보석과는 달라요. 태양의 보석은 말 그대로 태양의 힘이 세계수의 가지에 맺혀 열리는 보석이지만, 드루이드의 장비에 사용하는 보석은 땅에서 캐낸 태양의 힘이 담기지 않은 텅 빈 보석이에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태양의 가호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돼요. 그리고 그 가호를 담는 행위를 바크 강화라고 불러요.”

그럼 내 장비에 박힌 흑요석은 몇 월의 보석이지? 어떤 태양의 가호도 담을 수 있다고 했는데… 달은 상관이 없는 건가?

“앞으로 여행을 하시면 운 좋게 태초의 군락지를 방문하게 되실 수도 있어요. 어쩌면 직접 찾아다니시기도 하겠죠.”

“태초의 군락지요?”

“태초의 군락지는 어떠한 식물이 최초로 군락지를 이룬 곳을 일컬어요. 그곳은 또한 식물의 최초 모체가 이룩해 낸 신화의 근원지라고도 볼 수 있어요. 꽃들의 신화는 그 꽃들의 탄생 의의가 되기도 하고 일생의 목적이 되기도 하고 존재 가치가 되기도 해요. 선조로부터 신화를 이어받으며 꽃이 그 꽃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지표가 되어 주는 거죠. 그런 위대한 힘이 시작되고 축적된 곳이기에 아주 오랜 세월 태양의 가호가 머물고 있어요.”

“신화가 시작된 곳….”

“터를 잡아 수천, 수만 송이가 오랜 세월 같은 태양의 빛 아래 꽃잎을 틔워 낸 곳. 그곳에 드루이드가 간다면 땅이 빚어낸 보석에 개화기 태양의 가호를 담을 수 있어요. 그것이 바크 강화예요.”

“설명만 들어도 정말 멋있네요….”

지식을 설명할 때의 포르타는 조금도 말을 떨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숙련된 전문가가 보였다. 장비를 제작하는 기술적인 지식 외에도 저런 지식들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하는구나.

“시들링, 그럼 너도 바크 강화했어?”

너 정도 되는 고렙이라면 강화는 했겠지? 그는 내 말에 건틀렛을 낀 왼팔을 들어 팔뚝에 박힌 녹색 보석을 보여 주었다. 초록색이면 에메랄드? 보석이 단순 갑옷에 딸린 장식인 줄 알았는데 강화 소켓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설명을 듣고 나니 장비에 장식된 보석들이 다르게 보인다.

“카돈의 군락지에서 5월의 태양을 담았다. 개화 시기에 카돈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는 힘인 ‘버티기’ 능력이 담겨 있다.”

역시 5월의 에메랄드가 맞았구나. 우리 가막살나무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가 에메랄드 반지였지. 5월을 대표하는 보석이라 5월에 개화기 전투 보너스를 받는 힘을 담을 수 있다, 좋아, 이해했어. 그런데 가호만 담는 것이 아닌가 봐?

“저건 또 무슨 말이에요? 단순 태양의 가호를 담는 게 아니에요?”

시들링의 건틀렛을 가리키며 포르타에게 물었다. 시들링이 끼어든 후 포르타는 다시 소심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보석에 맞춰 개화기 태양의 힘을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식물의 군락지에서 힘을 담을지도 결정해야 해요…. 식물에 따라 능력이 달라지니까…. 보통은 장비의 내구도나 방어력을 높이는 방어형 특성 식물의 군락지를 찾는 것이 선호되지만… 일단 최초의 군락지를 찾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 보석만 맞다면 그냥 가호를 담는 경우도 있고….”

장비에 특수 능력을 붙이는 것이 강화였군. 내가 엘더 같은 회복형 특성 식물의 군락지를 발견해서 장갑에 강화를 한다면 뭐 회복 옵션 같은 것이 붙는 건가?

그리고 만약 엘더 플라워 군락지에서 강화를 하려면 내겐 엘더의 전투 보너스 달과 맞는 루비 보석이 장비에 박혀 있어야 하고.

단순 +1강, +2강의 느낌이 아니라 내 입맛대로 옵션을 커스텀해서 붙일 수 있는 것이었구나. 이야, 아이템 사용해서 랜덤으로 옵션 붙이는 것이 아닌 게 어디야? 모 게임처럼 대세 옵션 붙이자고 랜덤 강화 아이템을 억대로 꼬라박지 않아서 좋네.

“그럼 제 장비엔 쟤처럼 에메랄드가 아니라 흑요석을 사용한 이유가 어떤 달의 태양도 상관없이 담을 수 있기 때문인가요?”

포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그럼 저 장비 전체에 흑요석으로 도배해도 될 것 같은데!”

죄다 강화를 끼워 넣고 다닐게요! 강화만 제대로 한다면 연금탑에서 하얀 데이지에게 얻어맞고 기절할 뻔했던 불상사는 방비할 수 있다는 거 아냐? 보기 꼴사납더라도 다이아로 잔뜩 사들여서 아주 온몸에 흑요석으로 도배를….

“단순히 장비에 보석을 끼워 넣는다고…. 바크 강화를 할 순 없어요…. 보석이 장비에 뿌리내리게 해야 하는데 보석이 많게 되면 힘의 충돌이 일어나서 균형을 맞춰야 할 뿐만 아니라… 특히나 흑요석은 구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다루기도 까다로워서….”

모든 것이 내 생각처럼만 되면 세상 사는 게 얼마나 쉬워지겠냐만은. 역시나 이 세계도 여타 다른 게임처럼 모든 장비는 강화 제한이 있다는 공식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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