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604)

18번째 테라리움의 상점가에서도 느꼈지만 이곳의 행정 관리원인 그는 다이아를 뽑아내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는 자였다. 그렇기에 나만큼 그를 상대하기에 최적화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18번째 테라리움 행정 관리원의 집무실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심플했다.

매우 넓은 공간이란 점만 빼면 1인 사무실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딱 업무에 필요한 물품들만 구비되어 있었다. 그 1인 사무실도 대표실이 아닌 정말 일반 사원의 사무실 같은 인상이었다.

카펫은커녕 누르스름한 돌바닥이 드러나 있고 얇게 저며 붙인 듯한 무늬 하나 없는 하얀 벽지가 심플을 넘어서 삭막한 느낌까지 주었다.

의자가 많다는 점만 빼면 오히려 전에 들렀던 회의실이 상상에 걸맞은 행정 관리원의 집무실의 모습에 더 가까울 정도였다. 이곳은 스케어크로우가 전에 쓰던 곳을 포함하여 여태 보았던 행정 관리원들의 집무실 중 가장 검소했다.

다이아를 밝히는 자이니 온갖 장식품이라든가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기다란 책상에 놓인 명패에 새겨진 이름은 [키르켄]. 18번째 테라리움 행정 관리원의 이름은 ‘키르켄’이었구나. 여태 그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드라이어드는 아티팩트로 보내 주시겠습니까? 앞으로의 이야기에 꽃들이 나설 자리는 없으니까요.”

그의 말대로 쪼르르 날 따르던 드라이어드들을 아티팩트로 돌려보냈다. 이 중 드라이어드들 줄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쪽으로. 편히 앉으시길.”

키르켄은 우릴 손님맞이용 테이블로 안내했다. 커피 테이블과 두 개의 길쭉한 가죽 소파는 이 방 안에 있는 가구 중 가장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외부에 보이는 부분들만 신경 쓰는구나.

“아직 시간이 이르지만 간편한 다과 정돈 괜찮겠지요? 보좌관을 시켜 내오라 할 건데 혹시 꺼리는 음식이 있으십니까?”

“아뇨, 딱히 없어요. 아무거나 주셔도 상관없어요.”

시들링도 전에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가리는 음식은 없다 했으니 상관없겠지.

잠시 뒤 키르켄의 보좌관이 3개의 찻잔과 한입 크기의 비스킷이 가지런하게 쌓인 접시를 들고 와 차례차례 내려놓았다. 보좌관은 마지막으로 갈색 잎이 잔뜩 가라앉아 있고 보리차 같은 액체가 가득 담긴, 옅은 김이 나는 투명한 유리 주전자를 놓고 방을 나갔다.

“단풍나무 잎 차입니다. 향이 은은하고 여운이 살짝 남는 고소한 뒷맛에 식사 전 입맛을 오염시키지 않기엔 좋은 차지요. 몸에도 좋으니 드셔 보시고 입에 맞으시다면 좀 챙겨 드리겠습니다. 주변 분들께도 홍보를 좀 해 주신다면… 아차, 오늘 이야기 주제는 이게 아니죠.”

그 잠깐을 이용해서 또 다이아를 벌기 위한 작업을 치다니. 아닌 척 연기하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단풍나무 잎으로도 차를 만들 수 있는 줄은 몰랐네요.”

꽃이나 허브, 곡물을 이용한 차는 많이 들어봤어도, 가로수로 흔히 볼 수 있는 단풍나무의 잎으로 만들어 낸 차는 처음 들어봤다. 상상도 못 했고.

“저희 18번째 테라리움의 특산물입니다. 세계수의 18번째 테라리움 하면 단풍나무, 유명하지 않습니까?”

동의를 구하는 눈치였지만 전혀 몰랐기에 입을 다물었다. 다만 시들링은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 농장에서 온갖 종류의 단풍나무를 재배하고 있죠. 시럽을 추출할 수 있는 사탕단풍부터 장식으로 수요가 큰 꽃단풍까지. 잎, 수액, 껍질, 뭐 하나 버릴 것이 없고 약과 식품, 자재 등 온갖 상품으로 제작할 수 있으니 단풍나무야말로 세계수가 내린 최고의 보물이라 생각합니다.”

보물이라 생각하는 이유가 너무 그다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곧 단풍 축제가 열릴 시기군요. 마치 석양이 지상에서부터 피어난 듯한 아름다운 붉은 단풍나무 숲은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서도 사람들이 보러 내려올 정도로 굉장한 장관이랍니다. 제이 님께서도 시간이 되신다면 꼭 방문해 보시지요.”

음, 또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이야기라…. 그냥 사람들이 많이 보러 온다고 하면 되지, 굳이 한 자릿수에서 내려온다고 할 것까지 있나?

“테라리움에 특산품이 있으니 좋긴 하네요. 콘셉트에 맞는 축제도 열 수 있고. 하지만 전 당분간 뒤 번대 테라리움에 볼일이 있어 내려갈 예정이라 아쉽지만 축제 구경은 못 하겠네요. 그것보다…. 다른 주제로 넘어가 볼까요?”

느리게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그가 설명한 차의 고소한 뒷맛을 느껴 보려 애쓸 때까지 다시 단풍나무와 관련된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내가 찻잔을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테라리움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행정 관리원 집무실입니다. 엄중한 보안을 요구하는 자료들이 전부 이곳에 있죠. 그런 곳에 길드 수배범의 방문을 용인한 것은 오로지 존중하는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신 제이 님의 얼굴을 봐서입니다.”

“음….”

테라리움 숫자를 계급처럼 여기며 한 자릿수 테라리움을 거의 숭배하는 듯한 태도인데 한참 뒤 번대인 내겐 깍듯하다라…. 그렇다면 다이아로 얻을 이득 외에도 아직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

“저자는 이미 여러 테라리움에서 추방 및 접근 금지 조치가 내려진 자입니다.”

‘때에 따라선 우리 테라리움도 언제든지 그를 추방 조치할 수 있죠.’ 그의 시들링을 향한 배타적인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시들링, 사방에 적을 너무 많이 둔 거 아니니?

“키르켄 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18번째 테라리움이 저의 두 개의 테라리움에 보여 준 우호에 기꺼이 보답하고 싶네요.”

“두 개의 테라리움 말입니까?”

그가 시들링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어 내고 강렬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맹렬히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네, 아직 대외적으론 알려지지 않았지만 28번째 테라리움에 이어 16번째 테라리움까지 행정 관리원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최근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보스는 제가 행정 관리원직을 맡길 원하셨어요.”

28번째 테라리움의 경매가 있었던 날, 다이아의 출처를 숨기기 위해 있지도 않은 보스를 들먹였었지. 아직 내 뒤에 거대한 조직이 있다고 믿을 거야.

“테라리움 내의 연금탑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명색이 행정 관리원이면서 외부로 일이 드러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이래서 고만고만한 아랫것들에게 일을 맡겨 두고 잘하리라 믿어선 안 된다니까요.”

“16번째… 말입니까?”

키르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원, 기껏 쌓아 놓은 이미지가 연금탑이 단독으로 저지른 일 때문에 엉망이 되어 버렸지 뭐예요? 한창 큰 사업을 준비 중이었는데 이로 인해 손해가 막심해요. 결국 보스께서 가장 신임하는 제가 1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직을 맡길 명령하셨어요. 그래서 현재 전 두 개의 테라리움을 관리하고 있어요.”

나도 놀랄 정도로 이야기가 술술 잘 나온다.

“한 명이 두 개의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을 겸한다는 이야기는 난생처음이군요. 이거…. 정말 대단한 사람을 만나 뵙고 있었군요.”

날 똑바로 바라보던 시선이 땅으로 떨어졌다가 힘겹게 올라오기를 반복한다. 말끝을 흐리고 연신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차를 들이켜고 허벅지의 바지 천을 쥐어짜듯 움켜쥔다. 상황이 내가 원하던 대로 유리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한 자릿수 테라리움과 두 개의 테라리움을 동시에 관리하는 나 사이의 저울질. 그 두 개의 숫자도 하나는 18번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10번대였다.

“보스께선 이번에 연금탑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주동자 무리의 배후를 저희의 경쟁 조직으로 의심하고 계세요. 죄 없는 선량한 우리 조직 산하 테라리움 이미지만 덕분에 오해를 받고 나빠졌으니까요.”

“만약 노리고 저지른 일이라면 아주 영악한 짓을 벌였군요. 연금탑이 단독으로 벌인 일에 테라리움 전체가 싸잡아 매도되어선 안 될 일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여기 테라리움의 연금탑에 들렀다가 소식지를 봤는데….”

주머니에서 소식지를 꺼내 기사가 난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곤 18번째 테라리움의 마크가 찍힌 곳 옆을 엄지로 쥐고 보란 듯이 문질렀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참 많은 곳에 오해가 퍼진 것 같더라고요. 1번째 테라리움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이미 그들과 이야기는 전부 잘 마무리되었는데 이렇게 오해하기 좋게 정확한 사정은 생략된 공문을 내려 버리다니. 저희는 분명 성심성의껏 협조해 드렸는데 말이죠.”

키르켄의 눈이 매섭게 소식지를 바라보았다.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슬쩍 소식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하, 그 소식지의 기사는 단지 1번째 테라리움에서 전달한 공문을 그대로 실었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과수원에서 소식지까지 관리하기엔 일이 많다 보니 전적으로 인쇄소에 위임하고 있지요.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제가 소식지의 기사를 터치하는 일은 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그 특수 상황인 것 같군요. 제이 님께서 16번째 테라리움까지 맡고 계시는 줄 미리 알았다면 필히 발행 전 제 손을 거쳤을 겁니다.”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해를 풀기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요?”

“현재 거기에 찍혀 있는 공공 마크보다 제가 전용으로 사용하는 행정 관리원 직인이 더 효력이 크답니다. 소식지를 수정하여 과수원에서 재배포하면 오해 정돈 금방 정정할 수 있지요.”

그러곤 말이 뚝 끊겼다. 끝까지 지금 당장이라도 수정해서 재배포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키르켄이 금방 평정심을 찾고 자신의 패를 보이며 날 떠본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해 줄 수 있어, 하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뭐야?’ 내게 그렇게 묻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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