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604)

“18번째 테라리움의 마크가 있군.”

“응?”

소식지를 읽던 시들링이 제일 하단의 녹색으로 반짝이는 나무 마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게 왜?”

18번째 연금탑에서 발행한 소식지니까 당연히 18번째 테라리움의 마크가 있는 거 아냐?

“1번째 테라리움이 공식적으로 발행한 기사가 아니란 뜻이다. 마크의 종류로 정보의 신빙성이 달라진다.”

“그럼 이 기사를 18번째 테라리움에서 멋대로 작성했다는 뜻이야?”

“그건 아니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 참고 공문은 전달했을 것이다. 다만 18번째에서 공문 그대로 작성할지 달리할지 결정하는 것일 뿐이다.”

시들링은 갑자기 왜 내게 이런 정보를 알려 주는 걸까? 아무 말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이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덩달아 뚝 굳어 버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라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오, 이젠 내 표정도 읽을 줄 알아?”

전엔 내가 대놓고 표정을 굳혀도 제 할 말 툭툭 다했으면서. 평상시에 상대방의 표정을 읽고 적절히 대처하는 것은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다. 사회성 꽝인 시들링이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발전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갑자기 왜?

“널 계속 보고 있었으니 알 수 있었다. 내 드라이어드들이 날 말릴 때마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날 계속 보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같이 다니는 것과 같이 다니면서 나만 쳐다보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친구와 함께 다니더라도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핸드폰에도 가끔 시선을 준다. 절대 친구의 얼굴을 계속 보진 않는다. 오해받기도 딱 좋은 상황이잖아.

집중해서 자길 쳐다보면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걱정하거나 아니면… 너 나 좋아하니? 친구끼린 웃어넘길 장난이지만 보통은 그렇게 오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론 얘가 그런 의미로 날 계속 본 건 아니겠지. 아마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뭔가 또 이상하게 가르쳐 놨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 날 보통 사람의 표본으로 삼고 날 따라 하기 위해 계속 본 걸 수도 있지.

“계속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대놓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눈치다. 아… 뭐, 날 계속 쳐다본다고 내가 닳는 것도 아니고 불법적인 일도 아니니 딱 집어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거기에 오히려 크게 반응하면 내가 너무 신경 쓰는 느낌이고.

그런데 시들링이 계속 쳐다봤다고 이야기하는데도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점이 좀 당혹스럽긴 하다.

“해선 안 될 일이라면 앞으로 하지 않겠다.”

“아냐, 뭐… 그냥 봐. 보고 잘 따라 해. 그냥 그게 낫겠다. 어쨌든 18번째 테라리움의 입장으로 발행한 기사라면 여기에 양념을 좀 추가해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알려 줘서 고마워.”

“네게 도움이 되었나?”

“응. 여기 행정 관리원 좀 만나 봐야겠네. 그런데 드라이어드들이 내게 잘 알려 주라고 시키기라도 했어?”

마지막 질문은 장난삼아 한 것이었다. 하나하나 다 간섭하는 드라이어드들이니까.

“아니다.”

왠지 그렇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파필리온이 알려 준 것이다.”

“야, 그 나비 새….”

나도 모르게 어닝의 말버릇을 따라 할 뻔했다.

“그렇게 당하고 그놈 말을 듣는 거야? 걔 완전 사기꾼이야. 이번엔 얼마 달래? 설마 달라는 대로 또 다 줬어? 이상한 말이나 또 배워 온 거 아냐?”

“다이아를 대가로 알려 준 것은 아니다. 다만 안타까운 마음에 진심으로 하는 충고라고 했다. 너의 곁에 오래 남고 싶다면 드라이어드들이 아닌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했다.”

내 곁에 오래 남고 싶다고? 아니 그것보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어디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팔짱을 끼고 시들링을 바라보았다.

“너는 드라이어드에겐 자비로우나 인간으로선 쓸모 있는 자들만 곁에 두는 것 같으니 내 쓸모를 인식시켜야 한다고 했다.”

“아니 그놈은 대체 나에 대한 평가가 왜 그래? 내가 무슨 사람을 가려서 곁에 둔다는 거야? ...또 뭐래?”

정말 이상한 놈이다. 내가 언제 사람의 쓸모를 따져서 곁에 뒀다는 거야? 내가 인복이 넘쳐서 이리스 파티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길드도 만들고 그런 거지. 루프도 정말 좋은 인재고.

별안간 어닝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건 복잡한 마음만 잔뜩 들게 할 뿐이었다.

“외모로 너의 흥미를 끄는 것은 자신이 실패했을뿐더러 애초에 드라이어드들의 미모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포기하고, 재력은 널 이길 자가 없을뿐더러 권력도 이미 쥐고 있으니 파고들 곳이 없다고 했다.”

취향에 저격한 파필리온의 외모에 잠시나마 홀렸던 적이 있어서 뜨끔했다.

“의지할 곳을 찾는다 해도 무조건 너의 메스키트가 우선시될 것이고 지금의 나로선 절대 그 역할은 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것도 아니라 큰일을 겪고도 금방 털어 내고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걸로 보아 곁에 있는 드라이어드들과의 정서적 유대감이 굳건히 너를 지키고 있다고, 그러니 더욱 내가 낄 곳이 없다고 했다. 네가 불편한 낌새를 보이면 오히려 네가 아닌 드라이어드들이 날 먼저 배척할 것이라고 하더군.”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내가 그렇단 말이지? 곁에 두고 지낸 것도 아닌데 전문가 수준으로 날 판단하는 파필리온이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니 네가 날 곁에 계속 두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들려면 너에게 내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란 걸 알려 주라고 했다.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너보다 내가 더 먼저 그리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녔다는 것이고, 그런 여행들을 통해 얻은 정보들이야말로 내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네가 필요로 할 것이라 말하더군. 알려 주는 건 마다하지 않고 다 귀담아들으려 하는 눈치니 내가 내놓는 모든 정보가 나의 쓸모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 부족해 어떻게든 주워들으려고 했던 것이 이렇게 평가될 줄이야…. 상식이 없어서라는 평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될지, 참….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쉴 새 없이 정보를 뱉어 내는 건 내 가치가 금방 떨어질 뿐만 아니라 사람이 질리는 행동이라고 했다. 그러니 내가 정보를 말하는 타이밍에 대해선 딱 하나만 명심하라고 했다.”

“뭔데?”

“너의 표정이 평상시와 다를 때이다. 어차피 다른 건 말해도 이해를 못 할 테니 그것만 명심하라고 했다.”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 그래서 계속 쳐다봤구나. 파필리온의 조언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분명히 어처구니없는 느끼한 말투를 가르치는 것보단 나았다.

하지만 내가 시들링을 철저히 장기말로 생각한다는 가정하에 분석된 내 모습이니 씁쓸하긴 하다. 물론 시들링을 길드원으로 영입할 때까지만 해도 그를 내 패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땐 그에 대한 호감이 마이너스에 가까울 때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를 이용할 패라기보단 함께 여행하는 한 명의 동료로 인식하고 있었다. 게임 속 지인에 더 가깝지.

“그렇게 애쓸 필요 없어. 네가 나보다 드루이드 선배인 건 맞으니 그냥 모르는 게 있으면 내가 먼저 물어볼게. 그런데 정보를 주는 역할이라면 이리스라든가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너래?”

“느낌상 그들은 곧 따로 행동하게 될 것 같으니 단둘이 다니는 것이 내겐 기회가 될 것이란 말도 했다.”

무서운 새끼네, 그거. 길드원들과의 앞으로의 일정은 하나도 발설한 적 없는데 느낌만으로 맞혔다고? 행정 관리원 오래 한 짬밥은 좀 다르다 이건가?

파필리온을 대할 때 앞으로 좀 더 조심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시들링이 알려 준 정보를 써먹기 위해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을 만나러 갔다.

막상 과수원에 도착했지만 미리 일정을 약속하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와 면담을 신청하기 망설여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날 맞으러 왔다. 18번째 테라리움에서 적잖게 뿌리고 간 다이아가 그를 내게 인도한 것이다.

“아,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제이 님 아니십니까? 제 테라리움에 또 방문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얼굴 가득 인상 좋은 웃음을 지으며 우수 고객을 대하는 것처럼 날 반겼다.

“안녕하세요. 본래는 연금탑에 들르려고 다시 왔지만 그것 외에도 의논할 일이 있어서 만나 뵈려고 했어요.”

“행정 관리원 간에 의논이 필요한 일이면 없던 일정도 만들어 내야죠. 제 집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또 다이아를 잔뜩 벌 수 있는 기회일까 봐?

“하지만 그 전에….”

그가 시들링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옆에 계시는 분의 신원을 제대로 확인해야겠습니다. 제 눈이 이상하지 않다면 그는 길드 수배범 아이언비스트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으니까요.”

눈이 문제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얘가 테라리움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월렛으로 다 봤을 거면서 이러는 건 내가 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판단하겠다는 건가?

“제 테라리움 전속 길드원인 시들링이에요. 물론 그런 쪽으론 악명이 높지만 신원은 보증합니다. 이곳에서 문제는 일으키지 않아요.”

“하지만 무려 5번째 테라리움 소속 길드에서 내린 수배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이 님. 물론 제이 님의 28번째 테라리움이 보증하는 신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이를 빌미로 한 자릿수 테라리움과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한 자릿수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10번대 테라리움이 추가로 신원을 보증한다면 어떤가요?”

20번대 정도론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건가? 새삼 번호가 가지는 무게의 차이가 느껴져 입맛이 썼다. 누군가에겐 20번대는 꿈의 자리지만 더 앞 번대의 이들에겐 그저 낮은 번호일 뿐.

“10번대 테라리움 말씀이신가요?”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꽤 좋은 건수를 문 사업가의 눈처럼 느껴졌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다른 자리에서 하도록 할까요? 제가 이 18번째 테라리움에서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으로 확정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내 다이아가 다했지만.

“저와 인연이 깊은 이 18번째 테라리움에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제 다이아 씀씀이만큼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요?”

내 말에 그는 더 이상의 군말 없이 시들링도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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