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환에 힘을 담는 일도 끝났으니 아직 유리관 안에서 뚱한 표정으로 있는 엘더에게 손짓했다. 엘더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관 안에서 걸어 나왔다.
“내 힘이 담긴 탄환은 어딨어?”
롬가토의 손으로 넘어간 탄환을 가리켰다.
“정확도가 낮아서 완전히 응축시키지 못했어. 겨우 안개 같은 것이 일렁일 정도로만 담겨서 그렇게 큰 효과를 볼 순 없을 거래.”
“말도 안 돼. 너와 내가 함께 만들었는데 부족할 리 없잖아?”
“너는 잘했겠지만 내 쪽에 문제가 있어서 그럴걸. 내가 연구원 신분이 아니라 제대로 네 힘을 유도하지 못했나 봐.”
“네가 문제라고? 그럴 리 없어. 그래프트를 쓰자. 그럼 힘이 제대로 담길 거야.”
“그래프트를 쓴 뒤 힘을 담는다고요? 놀라운 발상이군요.”
롬가토가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끼어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야, 괜찮아. 나중에 저분들이 연구를 더 하면 온전히 힘을 담는 결과를 낼 수 있겠지. 겨우 그런 걸로 그래프트를 낭비하기엔 너무 아깝잖아.”
대체 뭐가 널 자극했길래 그러니? 뭐가 그렇게 분한지 콧김이라도 씩씩 나올 태세다.
혹시 선명한 색을 발하는 다른 구슬들이 예뻐서 부러웠던 걸까? 그래서 제 힘이 담긴 예쁜 구슬을 하나 갖고 싶었던 건가?
주머니에서 주체 못 할 정도로 굴러다니는 다이아를 하나 꺼내 엘더에게 쥐여 주었다. 이걸로 좀 진정하라는 의미였는데 엘더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고른 하얀 치열로 아랫입술을 짓누르더니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손은 그래도 미적미적 착실하게 다이아를 챙겼지만, 주기만 하면 좋다고 웃던 녀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한 개론 모자라서 그래? 네가 그러니까 나 방금 심장 멈추는 줄 알았어.”
엘더의 고개를 바로잡아 장갑을 벗고 이마에 손을 대었다. 드라이어드도 열이 나나? 좀 뜨거운 것 같기도 한데. 엘더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혹시 마거리트의 저주… 때문에 어디 이상해진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엘더가 투정 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이마에 올려진 내 손을 치우려다 반대로 힘주어 제 이마를 꾹 눌렀다.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길 순 없으니 덕분에 엘더에게 바짝 붙은 채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 엘더의 달큼한 향이 코끝에서 맴돌았다.
“그냥… 너랑 나랑 둘이서 만든 건데 제대로 안 됐다고 하니까….”
정확히는 옆에서 롬가토와 연구원들이 보조했기 때문에 둘이 만든 건 아니었지만.
“에이, 다음에 또 시도해 보면 되지. 오늘은 빈 탄환이 저거 하나뿐인 듯하니까 아쉽더라도 시도에 성공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아, 엘더가 무슨 심정인지 대충 이해했다. 엄마랑 같이 숙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최고로 잘 그린 그림으로 안 뽑혀서 교실 뒤에 걸리지 못했을 때의 아이의 심정과 같은 거지?
정말 애 같긴. 그거 가지고 토라져서. 어디 아픈 줄 알고 진짜 걱정했잖아.
“그럼….”
엘더가 이마에 있는 내 손을 옮겨 제 볼로 가져갔다.
“다음에도 나랑 해야 돼.”
“그래, 그래. 내겐 유니크 등급 드라이어드는 너뿐이니까 다음에도 너랑 해야지.”
내 대답이 만족스러워서 기분이 좀 풀렸는지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엘더의 힘이 빠졌다. 그 덕에 무리 없이 손을 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쪽 손이 붙잡혔다. 시들링이 가볍게 내 왼쪽 손목을 잡은 것에 비해 꽤나 거침없이 아티팩트에서 고리를 뜯어내고 있었다.
“어어…! 그거 그렇게 다루면 부러져요! 그러면 큰일 나요!”
식겁한 연구원이 뛰어와서 시들링을 말렸다. 그 소란에 모든 시선이 시들링에게 집중되었다. 하나같이 꽁꽁 얼어 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아티팩트에 채워진 고리 장치가 정말 비싼 장치인가 보다.
“아티팩트에 영향을 주는 것을 오랫동안 하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제가! 제가 풀게요! 제발 그렇게 힘주면 진짜 부러져요. 똑 부러져 버린단 말입니다! 그럼 저희 한 달 노력도 똑 부러져 버려요!”
내 왼팔이 시들링에게 덜렁 잡혀 있는 채로 연구원이 덜덜 떨면서 고리를 벗겨 내기 시작했다. 장착하는 것은 금방인데 벗기는 것은 꽤 까다로운가 보다.
시들링이 제 시선 높이에서 장치를 손보려 했기 때문에 연구원은 그 큰 높이에 맞춰 까치발을 딛고 고리를 손보고 있었다. 차마 내려 달라는 말도 못 하고.
성공적으로 안전하게 고리를 회수한 연구원은 식은땀을 닦았다. 그 표정에 지난 한 달간의 노력을 지켜 낸 자의 뿌듯함이 어려 있었다.
“왜 손을 덜덜 떨어?”
문득 내 팔을 받치고 있는 시들링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들링은 내 말에 제 손을 보다가 날 바라보았다. 자신이 손을 떨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힘을 주면 네 연약한 손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다.”
“네가 무슨 드라이어드도 아니고. 아, 아니다. 진짜 부러지면 내 손해지. 손 놓자.”
손을 확 빼서 아티팩트를 살폈다. 그렇게 부산 떤 것에 비해 흠집은 안 난 것 같으니 다행이다.
시들링은 한 박자 늦게 제 손을 회수했다. 그나저나 그렇게 조심해서 잡는다 싶었는데 진짜 내 손목이 부러질 걸 걱정했다고?
내가 무슨 막대기처럼 깡마른 팔목도 아닌데 사람 팔목이 그렇게 쉽게 부러지겠어? 나보다 훨씬 크고 두터운 시들링의 손이 눈에 띄었다.
저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미친, 얼마나 체력 스탯에 몰빵했길래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악당들 손목을 똑똑 부러뜨리는 상상을 해 보았다. 괜찮네, 이거.
롬가토와의 일을 끝내고 연금탑을 나가려는데 1층 데스크에서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드루이드님! 드루이드 제이 님 맞으시죠?”
팸플릿과 문서를 한가득 안고 있는 사람이었다.
“네, 제가 제이 맞는데 무슨 일이세요?”
그는 팸플릿과 신문처럼 접힌 종이를 하나씩 집어 내게 건네주었다.
“Tree 1단계 후원자이신 제이 님께 드리는 신제품 카탈로그와 연금탑 소식지입니다. 본래는 거주하시는 테라리움으로 발송해 드려야 하지만 제이 님께선 거주지가 불분명하셔서 다시 한번 방문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필라의 연구실을 방문하기 위해 겸사겸사 후원하여 Tree 단계를 달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땐 딱히 관심이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뭐 여러 혜택들이 있었던 것 같다.
“혹시 18번째 테라리움에 거주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어디로 발송해 드리면 될까요?”
“음… 28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으로 보내 주세요.”
“앗, 과수원 직원이셨나요? 다른 테라리움 주민이심에도 불구하고 저희 연금탑에 아낌없이 후원을 해 주시다니…. 훗날 28번째 테라리움에 연금탑이 생긴다면 좋은 교류 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쓰겠습니다. 다시 한번 후원에 감사 인사드립니다!”
28번째 테라리움엔 연금탑이 아닌 연구원들이 모인 비밀 단체가 설립될 것 같지만…. 고개를 끄덕이니 그는 다른 급한 용무가 있던 것인지 홀연히 사라졌다.
줬으니 봐 볼까 하는 마음으로 연금탑 소식지부터 펼쳤다. 주로 어떤 연금술사가 연구에 성공했다거나 어떤 연구원의 논문이 몇 번째 테라리움의 학술지에 대서특필 됐다거나 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바로 뒷장, 한 장을 전면으로 대문짝만하게 차지하는 소식지에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놀랐다.
충격!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 수년간 불법 인공 개량이 진행되다!
자애로운 세계수의 축복 아래 보호받는 테라리움에서 세계수를 위반하는 끔찍한 인공 개량이 비밀리에 진행되어 왔다고 1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최고 학장 ‘모노프’가 공식적으로 밝혔다.
식물의 탄생은 오로지 세계수와 세계수가 품은 자연의 관할임에도 불구하고 그 혜택을 누리는 인간으로서 파렴치한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마땅히 지탄받아야 한다.
이 인공 개량 정보를 입수한 1번째 테라리움은 빠르게 감사원들을 파견하여 주도자인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최고 학장인 ‘크레아시온’을 포함하여 관련인 7명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인공 개량에 대한 모든 자료들을 그 자리에서 전부 폐기하여 세계수와 지식을 수호하는 최고의 테라리움다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한편,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 소속된 모든 지식인들의 연구 자격을 박탈시키는 역대 가장 강한 처사에 과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불법적인 일에 대하여 앞으로의 1번째 테라리움의 확실한 처벌 의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견이 더욱 우세했다.
1번째 테라리움은 이번 일을 본보기로 삼아 세계수를 위반하는 모든 연구를 전문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이단 감찰단을 설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