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의 소유권을 넘기게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연하게 고렙인 시들링에게 의지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었던 것에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그와 대등한 동료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그의 힘에 의해 버스(고렙이 저렙을 키워 주는 것) 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레벨이 낮은 드루이드라고 하면 슬프지만 딱 한 명 떠오른다.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을 로웰라.
지금 내가 받을 탄환을 사용하려면 로웰라나 그녀 같은 뉴비가 나와 동행해야 하는데 이젠 뒤 번대로 내려갈 여정에 뉴비가 함께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하지만 나도 뉴비였을 때 꽤 많은 일들을 해내기도 했고. 레벨 때문에 COST의 제약을 받을 뿐 저렙 유저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니까.
마침 내 길드의 특성 중에 뉴비 성장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성장 촉진’이 있으니 이참에 될성부른 뉴비를 하나 영입해서 키워 볼까…?
이미 강한 드루이드를 길드로 영입하는 것도 좋지만 초반부터 길드에 들어와 함께 성장한 길드원은 유대감도 좋을 뿐만 아니라 애착과 충성심도 높고… 어쩌면 점점 성장하면서 자만심에 빠질 수 있는 날 돌아보게 할 수 있는 좋은 거울이 될지도 몰라.
롬가토에게 총을 넘겼다. 꼬리겨우살이와 함께 옆방으로 간 그는 잠시 뒤 무척 화려하게 변신한 총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단순한 물총처럼 생겼던 것이 프레임에 금테를 두르고 상단에 작은 구슬이 달려 돌아왔다. 손잡이에는 작은 꽃이 알알이 핀 줄기가 휘감는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외형이 변하니 확실히 무기가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팍 들었다. 게임으로 치면 한 +5강 정도의 무기려나?
“사용하시는 탄환이 많으니 여기 구슬에서 빛이 나는 걸로 장착한 종류를 알 수 있습니다.”
시험 삼아 아왜나무의 탄환을 넣으니 구슬이 하얗게 변했다. 오호….
“그럼 꼬리겨우살이 탄환을 좀 더 제작할까요?”
“네, 그런데 아왜나무처럼 마구잡이로 쏠 수 있는 종류는 아닌 것 같으니 너무 무리해서 양을 늘릴 필요는 없고 당장 가능할 정도만 더 만들어 주세요.”
전에 내가 18번째 테라리움을 떠나기 전처럼 무리하게 양을 늘릴까 봐 걱정했던 건지 연구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아직 완성 전 단계의 탄환이 하나 더 남았는데 혹시 보시겠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없던 시간도 빼야죠. 어떤 건데요?”
연구원 한 명이 롬가토의 지시를 받아 옆방에서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 안엔 색깔이 없는 투명한 탄환이 하나 놓여 있었다.
“힘을 응축시킬 준비는 끝났지만 아직 드라이어드를 결정하지 못한 탄환입니다. 저와 영혼의 연결을 한 아왜나무 이외에 다른 드루이드의 드라이어드의 힘을 응축시키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며 성과를 보았기에 꼬리겨우살이의 힘을 담은 탄환을 만들 수 있었지요. 아크가 연구원 신분이기에 좀 더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지만, 원하신다면 제이 님의 드라이어드 중 하나를 골라 이 탄환에 힘을 싣는 시도를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헐, 정말요? 탄환에 힘이 담긴 드라이어드를 제가 데리고 있으면 효율이 더 높아진다고 했잖아요? 완전 좋은데. 누구의 힘을 담아 달라고 해 보지? 메스키트?”
메스키트의 힘이 담긴 탄환은 어떤 능력을 보일지 상상만 해도 설레는데 롬가토가 고개를 저었다.
“연구원이 아니신 제이 님은 오랫동안 이곳에 남아 저희와 함께 정확도를 높이는 연구를 진행해야 합니다. 그 스페셜 등급의 드라이어드 힘은 담는 시도 자체는 쉽게 할 수 있으나 탄환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파괴될 확률이 높습니다.”
“오랫동안이면 얼마나요?”
“적어도 2주일은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오래 있을 순 없는데… 그럼 유니크 등급 정도라면요?”
스페셜 등급인 메스키트가 반려 당했으니 특별한 등급인 오리지널 등급의 바곳은 더욱 안 되려나? 또한 남들에게 오리지널 등급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수도 있는데 섣불리 드러낼 수도 없고.
엘더를 슬쩍 바라보니 눈을 빛내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해 보고 싶다는 거구나.
“엘더 플라워 정도면 어떨까요?”
“내 힘을 이상한 물건에 담는다니 썩 내키지는 않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상자에 담긴 투명한 총알을 힐끔힐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아, 그래. 저것도 나름대로 예쁘게 반짝거리는 보석처럼 보이긴 하구나.
“일단 시도는 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더 플라워의 어떤 능력이 탄환에 담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와 영혼의 연결을 한 상태라면 원하는 능력을 뽑아낼 수 있지만 남의 드라이어드는 그게 어렵지요.”
“회복 능력이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나도 작게나마 뒤에서 지원해 줄 수 있을 것 같고….”
“또한 정확도가 낮기 때문에 힘이 온전히 응축되지 않아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음에도 성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탄환을 꽝으로 낭비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참고해 주시지요.”
“뭐, 탄환은 또 만들면 되는 거니까요.”
내 말에 연구원들이 잔뜩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 양심이 찔린다.
롬가토의 안내를 받아 거대한 유리관이 있는 이상한 기계 앞으로 갔다. 유리관 바닥엔 흙이 잔뜩 깔려 있고 따뜻한 오렌지색 조명도 은은하게 안을 비추고 있었다.
“엘더 플라워 드라이어드는 이쪽으로….”
롬가토가 유리관 문을 열고 손짓했다. 내가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자 엘더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느릿느릿하게 유리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롬가토는 유리관의 문을 닫으며 연구원을 불렀다.
“엘더, 그러고 있으니 꼭 화분에 심어진 것 같아.”
놀림조로 말하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지 엘더는 아무 반응 없이 팔짱을 꼈다. 빨리 끝내 달라고 투정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연구원은 기계의 중앙, 드라이어드 포트를 닮은 곳에 빈 탄환을 놓았다.
“투명한 탄환도 그렇고 기계의 전체적인 모습도 그렇고. 꼭 온실을 보는 것 같네요.”
“그 원리를 이용한 것은 맞습니다. 아티팩트를 찬 손을 이쪽으로 주십시오.”
롬가토가 내민 손에 왼손을 올리려고 할 때, 시들링이 가볍게 내 팔목을 잡으며 제지했다.
“아티팩트는 함부로 무방비하게 남에게 건네선 안 된다.”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군요. 혹시 저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
어쩐지 시들링을 보고도 다들 조용하다 싶었더니 이제야 알아본 걸까?
“해는 안 끼친다니까 괜찮아.”
황급히 시들링의 손을 떼고 롬가토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시들링의 손은 저지는 했지만 내가 손을 떼자 가볍게 떨어졌다.
롬가토는 이상한 고리를 내 아티팩트에 씌웠다. 예전에 카나비스의 건으로 비슷한 것을 아티팩트에 강제로 채운 적이 있어서 살짝 당혹스러웠다.
“타인의 드라이어드를 이용하기 위해 제작된 물건입니다. 정확도를 그나마 높여 줄 수 있는 물건일 뿐 아티팩트를 손상시키거나 하지 않으니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직접 빼내시면 됩니다.”
최대한 무해함을 보이기 위해선지 그는 나와 시들링을 번갈아 바라보며 열심히 설명했다. 이후엔 그와 월렛을 이용한 스톤헨지 모드를 띄워 파티까지 맺었다. 나와 롬가토의 스톤헨지 주도권이 비슷한 걸 보면 연금술사론 뛰어나도 드루이드로선 레벨이 낮구나 싶었다.
“이제 드라이어드 열매를 개화시킬 때처럼 이 탄환에 아티팩트를 찬 손을 갖다 대시면 됩니다. 드루이드의 영혼에 이끌려 엘더 플라워의 힘이 천천히 탄환에 쌓이게 될 것입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탄환에 손을 대었다. 그저 차가운 유리를 만지는 것 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키는 대로 드라이어드 열매처럼 여겨 보려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는 것 같아서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러자 심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이 아주 약하게 왼팔로 퍼져 나갔다.
“잘하고 계십니다.”
손끝에 닿는 유리의 느낌이 달라졌다.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기운이 가볍게 내 손가락을 휘감았다.
“역시 힘이 온전히 응축되진 않는군요. 이 정도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이제 손을 떼셔도 됩니다.”
롬가토의 말을 듣고 눈을 떴다. 투명했던 탄환은 희뿌연 안개가 담긴 반투명한 탄환이 되어 있었다. 다른 탄환들처럼 선명한 색을 띠고 있지 않는 것을 보니 연구원도 아닌 나와 내 드라이어드가 시도할 수 있는 한계가 여기까지인 듯했다.
“어떤 힘이 담겼을까요?”
“사용을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 이 탄환을 사용해 버리면 복제품을 더 만들 수 없는데… 어쩌시겠습니까?”
우리 엘더의 능력이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데 뭔들 어떠랴. 모처럼 내 드라이어드의 힘이 담긴 탄환이라고 하니 힘이 조금밖에 담기지 못한 불량품이라고 해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전투에서 효용성이 떨어지더라도 좀 더 만들어서 기념품으로 나눠 주는 건 어떨까? 이리스 파티에게도 자랑하고 싶고.
“그럼 좀 더 만들어 주세요. 일단 내일 테라리움을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 그때까지 제작 가능한 수량 정도만요.”
다들 나 때문에 야근이겠지만….
“오늘 만들 수 있는 수량을 최대한 뽑아 보겠습니다.”
탄환은 맡겨 두고 장비도 18번째 테라리움에서 새로 맞추는 것이 좋겠어.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새로운 탄환을 두 종류나 얻게 되었잖아요. 전 만족스러워요. 그리고 이번 제품까지 모두 만들면 한 며칠 정도는 다들 휴가를 가지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특별 휴가 수당도 챙겨 드릴게요. 다들 제 무리한 요구에 너무 지쳐 보이셔서 마음이 아프네요. 이러다 누구 하나 탈이라도 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땐 제가 손해니까 푹 쉬셔서 재정비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대학생들은 방학이라도 있지, 연구원들은? 그래서 그냥 내가 합법적으로 방학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쉴 때를 대비해서 오늘 하루 전념을 다해야겠군요.”
내 말에 감동 받은 눈을 하던 연구원들은 롬가토의 말에 다시 거무죽죽한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