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604)

로웰라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엉겅퀴에게 장비를 갈아입은 제 모습을 뽐냈다. 엉겅퀴는 그에 열심히 손뼉을 치며 칭찬해 주었다. 마치 둘의 관계는 또래의 학교 친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 사이에서 엉겅퀴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는지 먼발치서 이곳을 기웃거리는 드라이어드들이 보였다. 아마 저들이 엉겅퀴 종이 섞여 있는 꽃들인 듯했다.

비록 로웰라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잔뜩 기대한 분위기였다.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은 자신들이 내려앉은 구역을 터전으로 삼고 자신들 땅으로 여겨 잘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땅을 버리고 올 정도면 오죽 마음이 급했나 보다. 그렇게나 민들레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부러웠던 걸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요.”

로웰라를 두고 드라이어드들에게로 걸어갔다.

찾아온 드라이어드들 중엔 엉겅퀴 꽃에 가까운 모습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엉겅퀴가 섞인 것이 맞나 의심될 정도로 거리가 멀어 보이는 드라이어드도 있었다.

인공 개량인 점을 숨기고 이 세계에서 용납되는 자연적인 개량종으로 태어난 꽃들처럼 보이려면 그나마 엉겅퀴와 유사하게 생긴 드라이어드가 나을 것 같았다.

무턱대고 가르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체계가 필요했다. 인공 개량인 점을 숨기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든지 등을 당부했다.

“물론 엉겅퀴 외에 섞여 있는 다른 꽃들도 많겠지만 자신을 소개할 때 엉겅퀴 개량종이라고 해 줘.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마찬가지야. 모체의 꽃이 가장 닮은 종에 개량종이라는 이름을 덧붙여서 소개하도록 해. 절대 자신이 어떠한 종들과 섞여 있는지 일일이 모두 설명해 주지도 말고. 여긴 16번째 테라리움에 있을 때보다 더욱 조심해서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해.”

신분 세탁을 해야 하지.

“네, 우리의 세계수님.”

드라이어드들은 다행히 내 말에 이견 없이 모두 알겠다고 답하였다. 그런데 대답이 조금 묘했다.

“응? 우리의 세계수라니?”

“인간들이 드루이드를 작은 세계수라고 칭하기에 저희 역시 당신을 부를 말을 의논해 보았습니다. 현재의 세계수는 우리를 피워 낸 세계수가 아니니 우리들이 당신을 작은 세계수라고 부르기엔 맞지 않아요. 우리에게 쉴 터전을 제공해 준 당신이야말로 ‘우리의 세계수’지요.”

음…. 저 정도는 남들이 듣기에도 괜찮겠지…? 조금 유난을 떠는 드라이어드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제이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드라이어드들은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렸다. 꼭 ‘우리의 세계수’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다.

호칭으로 토론하자고 온 자리가 아니니 그냥 좋게 넘어가기로 했다. 당장 교습소로 쓸 만한 건물이 없으니 적당히 탁 트인 공터를 교습소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전투 때문에 드라이어드의 장비가 상할 것을 대비해 다이아 분수가 있는 곳이 좋을 것 같았다. 엉겅퀴 드라이어드에게 가르침을 주되 꼭 엉겅퀴가 사용할 수 있는 전투 스킬로만 한정하라고 당부했다.

로웰라에게 엉겅퀴 개량종을 인도하고 소개해 주자 당장이라도 훈련할 수 있다며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녀에겐 당장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모두 해 준 것 같아서 내일 18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할 일정을 생각하러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로웰라는 당분간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머물 것처럼 보였다.

***

간밤에 과수원의 길드 룸에 폐기 매트리스나 세탁된 이불을 끌고 와 다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동안 함께 겪었던 일이 다사다난했지만 꽤 즐거웠기에 헤어진다는 아쉬움에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 의뢰가 있기 전, 본래 이리스 파티는 뒤 번대 테라리움에 용무가 있었다고 했는데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저희가 전에 있던 길드에서 잘 챙겨 주셨던 분이 계세요. 그분도 결국 길드와 맞지 않게 되어 나오셨더라고요. 그런데 알음알음 듣기론 그분이 새로 길드를 만드신다고 하길래 딱히 소속된 곳이 없어서 가입시켜 달라 조르러 갈 생각이었어요. 그 전에 이렇게 가이아 길드에 들어가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다행이네요. 늦었으면 좋은 길드원들을 놓칠 뻔했어요.”

“만약 그분이 길드를 아직 만들지 않으셨다면… 한 번 가입 제의를 해 봐도 될까요? 정말 멋있는 분이에요. 능력도 좋고.”

“그러고 보니 잘 계실지 궁금하네.”

“여러분이 그렇게 좋게 판단하신다는데 전 환영이죠.”

길을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도 좋았지만, 어두운 밤, 등불이 은은하게 흐르는 방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누워 나누는 이야기는 더욱 정다웠다.

어둠을 장막 삼아 평소보다 더욱 속내를 털어놓고 포근함과 아늑함을 한 잔의 따뜻한 차로 삼아 서로에게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쉽사리 잠들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요에 빠져들며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아침, 오늘부터 한동안 길드원들은 다른 길을 가야 했기에 부지런히 준비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더 이상 의뢰를 미룰 수 없으니 이만 헤어져야겠죠. 루프 님이 도착하시면 가족들은 걱정 말라고 전해 주세요. 책임지고 안전히 모셔 올게요.”

16번째 테라리움에 남아 연금탑의 사람들을 수습하고 있는 그녀가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오려면 좀 더 시일이 걸릴 것 같지만.

“아쉽긴 하지만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요. 꿀벌도 있고. 저는 18번째 테라리움을 들렀다 가긴 하지만 어차피 뒤 번대 테라리움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으니 어쩌면 경로가 겹친다면 만날 수도 있겠네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한 소식은 저희 쪽에서도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마스터가 먼저 알게 되신다면 꼭 저희에게 연락 주십쇼. 의뢰를 끝내는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인페르노 조직원들을 만나게 될 것을 걱정했지만 시들링과 동행하는 것에 그나마 안심이 된다고 했다. 비록 사람은 줄었지만 나와 시들링의 개성 넘치는 드라이어드들이 떠들어 댈 것을 생각하면 섭섭지 않게 시끌벅적하겠지.

먼저 떠나는 이리스 파티를 배웅하고 떠나기 전 로웰라를 살폈다. 우리도 꽤 부지런을 떨었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녀 역시 일찍부터 드라이어드 훈련에 열심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넓은 공터를 가볍게 뛰어다니며 운동까지 하고 있었다. 마음가짐은 로웰라가 아닌 내가 뉴비였다.

“아침부터 운동이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야.”

당연하다는 듯이 마차에 오르면서 저런 광경을 보자 이러지 말고 걸어가는 것이 운동이라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양심에 찔렸다.

하지만 원래 결심하더라도 계획은 내일부터 진행인 거다. 지금은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애써 위안하며 마차에 몸을 맡겼다.

***

18번째 테라리움은 교습소 습격 사건이 있었던 곳이지만 수습을 잘 끝냈는지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새 내가 도착한 것을 알아차린 이쪽의 행정 관리원이 내게 사람들을 붙였다. 또다시 한바탕 다이아를 쓰고 갈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지금은 롬가토에게 들러 내 특수 탄환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연금탑에서 나 자신이 너무 무력해서 꽤나 큰 좌절감을 맛봤던 나날들은 고통스러웠다. 나도 좀 더 팀에 도움이 되고 강해져야 한다.

18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 도착하여 롬가토에게 방문을 요청하자 금방 날 안내하겠다며 대학원생… 아니 롬가토 연구실 소속 연구원이 내려왔다.

금방이라도 누워 잠을 자도 될 만큼 후줄근한 티셔츠와 바지, 오랜 밤샘으로 칠해진 눈 밑 다크서클, 활력을 잃은 눈동자. 지독히도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 보여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대학생들은 고생 끝에 방학이라도 있지, 이들이 쉬는 날은 있을까? 하지만 그들이 공장 부품처럼 갈려 들어간 만큼 성과가 있길 기도했다.

안내를 받아 롬가토의 연구실로 들어서니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맞이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부탁하신 대로 아왜나무 외에도 다른 드라이어드의 힘을 응축시킨 탄환을 완성했습니다.”

막대한 후원자인 나를 대하는 롬가토의 태도엔 첫 만남과 달리 공손함과 호감이 가득했다.

“오오…. 드디어! 보여 주세요!”

그는 책상 위에서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 안엔 레몬색과 주홍색을 띠는 총알이 각각 다섯 개씩 들어 있었다. 색만 다를 뿐일까? 아니면 용도도 다를까?

“왜 이것밖에 안 만든 거예요? 무조건 많을수록 좋은데.”

“비록 또 다른 드라이어드의 힘을 담는 것은 성공했지만 아직 탄환의 정확한 효용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시제품으로 10개만 제작한 것입니다. 확인 후 요청하신다면 아왜나무의 탄환처럼 대량으로 제작하지요.”

그 말에 주변에 있던 후임 연구원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드라이어드의 힘이 담겨 있나요?”

“꼬리겨우살이 드라이어드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겨우살이는 들어 본 적 있는 식물이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도 사용하는 식물이었지. 탄환에 힘을 응축시키는 것을 성공했다면 유니크 등급일 수도 있겠네?

“주신 후원금을 이용하여 1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 유니크 등급의 드라이어드를 가진 연구원의 지원을 겨우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가 대형 포레스트를 이룰 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시간이 소요되니 어쩔 수 없었지요.”

탄환 색과 똑같은 레몬색의 유리구슬을 머리카락에 알알이 엮은 다소곳한 드라이어드와 함께 그나마 멀끔한 차림의 드루이드가 옆방에서 나타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롬가토 님의 연구를 돕게 된 ‘아크’라고 합니다. 제 꼬리겨우살이는 다른 나무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기생식물입니다. 그렇기에 이와 관련된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탄환에 담긴 힘도 같은 종류입니다.”

기생이라고 하니 루프의 발명품인 기생충이 떠올라 살짝 흠칫했다.

롬가토는 내게 세 장의 서류를 건네주었다. 아마 날 위해 내용을 간소화한 것으로 느껴졌다.

서류엔 아크라는 연구원이 설명한 것보다는 좀 더 자세하게 꼬리겨우살이의 능력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탄환을 두 드라이어드에게 사용해야 한다고 나와 있네요?”

“네. 여기 노란색 탄환은 꼬리겨우살이의 기생의 힘을 발휘할 대상에게, 주홍색 탄환은 그 기생의 힘이 숙주로 삼을 드라이어드에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숙주요?”

“노란색 탄환을 맞은 드라이어드는 주홍색 탄환을 맞은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잠시나마 흉내 낼 수 있게 됩니다.”

“헐…. 듣기만 해도 완전 사기인데요?”

“다만 제약이 좀 큽니다. 탄환 사용자 본인이 꼬리겨우살이 드라이어드가 없으면 효능이 낮아지는 것은 알고 계실 테고….”

그건 알고 있었다. 내겐 아왜나무가 없기 때문에 탄환을 그저 일반 불을 끄는 투척용 소화기 정도로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같은 영혼에 묶인 드라이어드들끼린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영혼의 연결이라는 유대에 묶인 드라이어드들이기 때문에 하위 유대이자 강제 유대일 수밖에 없는 기생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즉 다른 드루이드의 드라이어드에게 기술을 사용해야 하며 이는 그 드루이드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음…. 제약이 좀 색다르네요.”

내 드라이어드들끼리 서로 능력을 흉내 내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불가능하다니.

“그리고 노란색 탄환은 주홍색 탄환의 드라이어드보다 훨씬 약한 개체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상대 드루이드가 자신보다 영혼의 크기가 더 작은 경우에만 그 드루이드의 드라이어드를 노란색 탄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제약들이 많아서 효용 가치를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나보다 영혼의 크기가 더 큰 드루이드의 드라이어드에게 주홍색 탄환을 사용하고 내 드라이어드에게 노란색 탄환을 사용하면….”

“그 전에, 사용하실 총을 제게 넘겨주십시오. 아왜나무의 경우와 다르게 꼬리겨우살이는 꽃의 힘을 총에 인식시켜야 탄환을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후에는 주홍색 탄환이 처음으로 사용된 드라이어드의 드루이드에게 주홍색 탄환과 함께 총이 귀속되기 때문에 사용 시 주의해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제이 님이 계속 총을 사용하시게 된다면 앞으로 제이 님의 드라이어드들만 숙주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주홍색 탄환으로 한 번 힘의 숙주가 된 드라이어드의 주인이 총을 소유하게 된다고? 그럼 내가 시들링의 드라이어드에게 주홍색 탄환을 쏘면… 이 총은 시들링 소유가 되네?

그럴 순 없지. 이렇게 되면 나보다 쪼렙에게만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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