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604)

로웰라의 꾀죄죄한 행색을 보니 18번째 테라리움에서 대량 구매하여 배송시킨 초보자용 장비들이 떠올랐다.

마침 로웰라는 뉴비고 장비 교체가 필요해 보이니 선물을 해 주는 것이 좋겠어. 나와 체형도 비슷하니 딱 맞을 거야. 본래 초보자용 장비들을 잔뜩 샀던 목적 중 하나가 나와 같은 뉴비들이 우리 테라리움에 방문하면 육성용으로 지급하는 것이었으니 첫 개시를 하기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퍼를 안내하러 간 데이지2에게 아티팩트로 연락하여 장비들을 보관해 놓았다는 간이 창고로 로웰라와 함께 이동했다.

“와, 이 테라리움엔 드라이어드가 정말 많네요. 엄청 세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다들 주인이 없는 건가요?”

눈길이 닿는 곳마다 다양한 종의 드라이어드들이 드루이드 없이 존재하고 있으니 신기해할 법했다.

“음… 모두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고용한 드라이어드에요. 주인은 음… 저나 다름없어요.”

“히익….”

내 말에 로웰라는 숨넘어갈 듯 굴었다.

“제이님은 그럼 영혼의 한계가 얼마나 커다란 거예요? 저도 여행을 오래 하며 불을 많이 무찌르면 그렇게 될 수 있나요?”

“저 드라이어드들은 제 영혼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 테라리움 자체에 묶여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동 반경도 제약을 받아요. 행정 관리원만의 특수 능력을 사용한 거니… 나중에 로웰라도 다이아를 아주 많이 벌어서 행정 관리원이 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와, 행정 관리원은 정말 대단하구나. 지금부터 다이아를 저축하면 저도 죽기 전에 행정 관리원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 난 무리일 것 같고 내 딸, 아니 내 손자까지 내려가면….’ 로웰라가 자신의 월렛을 보며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꽤 귀엽게 보였다.

보통 사람이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되려면 복권에 당첨되어야 하는 정도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는 복권이 있을까? 전에 했던 게임에선 복권을 긁어 당첨되면 게임 머니를 잔뜩 얻어서 일확천금의 꿈을 노려볼 수 있었는데.

간이 창고까지 이동하는 내내 인공개량 드라이어드들이 하나같이 나와 조금 떨어져서 걷는 로웰라와 그녀의 엉겅퀴 드라이어드를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았다.

처음엔 드라이어드들을 신기해하며 구경하던 로웰라도 비로소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자신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그녀는 위축된 모습으로 조용히 내게 물었다.

“저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것이 있을까요? 드라이어드들이 저를 너무 노려보는 것 같은데….”

“처음 본 드루이드라서 그러려나? 아니, 그렇기엔 유랑 점술단을 보고도 저렇게 행동하진 않았는데….”

로웰라는 그들이 자신을 노려본다고 말했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들에게 악의는 없어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바라듯 좀 열렬하게 바라본다고 해야 하나?

“엉겅퀴네….”

“아쉽네, 엉겅퀴야.”

“묘목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해 보이니까…. 엉겅퀴만 아니면….”

“난 엉겅퀴는 없어. 아쉽다. 토끼풀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들 근처를 가까이 지나갈 때면 다들 똑같이 엉겅퀴에 대해 말했다. 로웰라는 이제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의 엉겅퀴 드라이어드의 팔에 바짝 매달려 걸었다.

“제 엉겅퀴 드라이어드가 문제였을까요? 엉겅퀴 꽃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거 아닐까요? 제 소중한 드라이어드인데 괴롭히면… 괴롭히면….”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뒤춤에서 손바닥만 한 길이의 나무 막대를 꺼냈다. 막대 중앙에 위치한 버튼을 누르니 마치 3단 우산처럼 척척 소리를 내며 팔 길이만큼 길어졌다.

“다 패 버린다. 다 패 버릴 거야. 선빵 날릴 거야. 가까이 오기만 해. 너도 맞으면 두 배는 때려 주는 거야, 알았지?”

“네!”

무척 호기로운 그녀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처음 만났을 때도 불을 상대하는 모습이 꽤 화끈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성격 탓이었나 보다.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저렇게 구는 것에 짐작 가는 이유가 있어서 오해를 풀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데이지2가 농담 삼아 했던 말이지만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민들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꽤 부러워했다고 했었지.

아마 로웰라의 엉겅퀴가 여태 자신들이 봤던 드라이어들에 비해 많이 약해 보였는지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았다. 하지만 엉겅퀴가 섞인 종이 없어 입맛만 다실 뿐이고.

“드라이어드들이 엉겅퀴의 멘토가 되어주고 싶은 듯해요. 아, 드라이어드들끼린 버팀목이라고 표현해요.”

비로소 로웰라가 긴장을 풀었다.

“저 드라이어드들이 제 엉겅퀴 드라이어드를 교육하고 싶다는 거예요?”

“네. 하지만 엉겅퀴도 성목이니 묘목을 대하는 성목처럼 굴 수는 없을 테고, 엉겅퀴 종의 힘을 알고 있는 드라이어드가 그나마 나설 것 같은데.”

“와…. 그럼 저렇게 강한 드라이어드들에게 저희 엉겅퀴가 가르침을 받으면 더 강해질 수 있나요?”

“직접 교육받고 있는 묘목들이 꽤 성과를 보이고 있으니 도움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하지만 이미 다 큰 엉겅퀴에게 뭘 더 가르쳐 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전투 팁 같은 거려나?”

“오오! 저희 엉겅퀴가 전투엔 아직 익숙하지 않다고 했어요! 그럼… 가르침 받는 비용은 얼마인가요? 많이 비싼가요? 오늘부터 저축하기로 했는데…. 하지만 네가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내가 좀 덜 먹을게.”

자신의 드라이어드를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이 너무 기꺼웠다.

당연히 비용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아마 엉겅퀴 종이 섞인 드라이어드가 오히려 자신들이 뭘 더 지불하려고 하면서까지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나중에 엉겅퀴 개량종이 있다면 대련 같은 걸 부탁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비용은 필요 없어요.”

“우와….”

로웰라를 보고 있으니 카나비스 드라이어드가 교육받던 18번째 테라리움처럼 우리도 드라이어드 교습소를 하나 만드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 이수가 모두 끝나면 초보자 전용 보상도 만들어서 튜토리얼 전용 테라리움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내게는 이미 16번째 테라리움이 있으니 이곳만큼은 대도시 같은 테라리움이 아니라 다른 콘셉트를 잡아서 운영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저… 그런데요.”

로웰라가 슬쩍 내게 가까이 붙으며 작게 속삭였다.

“좀 전부터 궁금했는데…. 저 옆에 계신 남자분은 누구세요? 아까부터 한마디도 없으시고. 혹시 행정 관리원 경호원 같은 건가요?”

“아, 시들링이 있었지, 참.”

로웰라를 신경 쓰느라 시들링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입을 놀리지 않고 때가 될 때까지 조용히 있던 것이 꽤 놀라웠다. 설마 자신 대신 앞서 세 번 말을 터 줄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없기 때문인가?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은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오기 전 서로 수군거리더니 ‘따라 하기만 해! 넌 할 수 있어!’ 응원하듯 어깨를 두드리곤 일제히 그의 아티팩트로 돌아간 상태였다.

내게도 드라이어드 묘목을 대하듯 굴던 시들링이니 이 뉴비에게도 결코 곱게 말이 나갈 것 같진 않은데.

“경호원은 아니고 이 테라리움 전속 길드원이에요. 어, 소개해 볼래?”

이리스 파티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처음 보는 뉴비 앞에서 시들링을 막 대할 순 없으니 그에게 슬쩍 운을 뗐다. 좀 심하다 싶으면 내가 제재를 하면 되니까.

“28번째 테라리움에 온 걸 환영한다.”

“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정상적인 시작인데? 그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사람다운 대화를 하는 건가?

“아직 밖을 나돌기엔 아주 연약해 보이지만.”

“큼큼.”

그럼 그렇지. 눈치를 팍팍 담은 헛기침을 일부러 크게 냈다. 그러자 시들링이 말을 멈추고 슬쩍 날 내려다보았다.

“…강해지려고 노력은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그렇게 노력하면 된다.”

“상대를 평가하기보단 네 소개를 먼저 해야지. 처음 만나는 사이잖아.”

시들링의 뒤로 살짝 물러서서 그만 들리게 아주 작게 말했다. 다행히 로웰라는 내 쪽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시들링이다. 길드 마스터인 그녀를 따라 여행 중이다.”

음, 어째선지 결국 날 따라다니기로 했구나. 앞으로의 모험이 꽤 고될 것 같으니 그가 동행한다면 나쁠 건 없지만. 이리스 파티는 결국 임무를 위해 나와 떨어져서 따로 다녀야 하니까.

그나저나 시들링의 대화 흐름에서 어렴풋이 데자뷔를 느꼈다. 마치 내가 로웰라와 했던 대화 순서와 비슷해 보였다. 설마 내가 했던 대로 따라 하는 거야?

“엄청 강해 보이네요! 전 로웰라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와, 저렇게 튼튼해 보이는 갑옷을 입으려면 운동을 많이 해야겠죠? 전 고작 막대기 휘두르는 것도 힘든데 거대한 검도 가지고 다니시다니…. 나도 저렇게 강해지고 싶다!”

로웰라에게 시들링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갑옷이나 검이나 시들링의 모습은 내 워너비나 다름없어서 로웰라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드라이어드는 어디 있어요? 시들링님도 엄청 강한 드라이어드를 많이 데리고 있겠죠?”

아이언비스트라든가 길드 수배범이라든가 하는 시들링의 외부 인식을 전혀 모르는 그녀는 스스럼없이 그를 대했다.

제퍼나 헤르마조차도 경계를 푸는 데까지 꽤 오래 걸렸는데. 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제3자가 보더라도 로웰라가 저렇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에 대한 첫인상이 많이 유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간이 창고에는 장비가 담긴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사이즈별로 분류된 상자에서 로웰라가 입을 만한 것을 골라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헉! 이걸 제게 그냥 주신다고요? 제가 이걸 받아도 돼요?”

“기념품이라고 생각하세요. 겸사겸사 다른 드루이드들을 만나면 이렇게 초보 드루이드들을 위한 장비를 무상으로 나눠 주고 있다고 홍보도 해 주면 좋고요.”

“품질도 아주 좋아 보이는데. 이거 진짜 비싼 장비 같은데 정말 그냥 받아도 된다고요? 그렇지 않아도 장비가 너덜너덜해져서 새 장비가 정말 필요했어요…. 하지만 지금 장비도 정말 힘들게 마련한 거라 새 장비로 바꿀 엄두를 못 냈는데….”

로웰라는 숫제 울 것처럼 물기 어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제가 종이에 써서 등에 붙이고 다닐게요. 팻말도 만들어서 들고 다닐게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요.”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뿌듯했다. 아, 이게 바로 뉴비 키우는 맛인가?

그녀는 간이 창고 내에 상자로 적당히 가려지는 곳에서 바로 장비를 갈아입고 나왔다. 아직 장비를 교체하지 않아서 나 역시 로브 안엔 그녀와 같은 장비를 입고 있었다. 꼭 커플 룩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음, 난 이제 뉴비 티를 벗었으니 18번째로 롬가토를 만나러 간다면 장비를 좀 더 그럴싸한 걸로 바꿔 입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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