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604)

플로라를 배웅하고 나니 이리스는 길드의 스톤헨지, 즉 길드 룸을 보고 싶다고 했다.

길드 설립 당시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과수원의 행정 관리원 집무실을 길드 룸으로 설정해 뒀었다. 전에 28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했을 땐 나의 급한 의뢰로 입구에서 데이지2를 만나자마자 바로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달려온 터라 보지 못했었다고 했다.

마땅한 장소라고 해도 가장 손상이 덜 된 곳일 뿐, 집무실 역시 불 벌레에 의해 큰 화재 피해를 겪은 곳이었다. 새까맣게 탄 물건들이 가득한 방 안을 보면 다들 실망하지 않으려나 걱정된다. 길드원들을 데리고 전 행정 관리원 스케어크로우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여니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 정돈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스케어크로우의 초상화를 가져가며 가막살나무의 손길이 닿은 듯했다.

“와, 여기가 우리 길드의 스톤헨지!”

방 안 꼴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이리스를 비롯한 다른 길드원들은 꽤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우리 길드만의 장소니까 여기 저희가 원하는 대로 좀 꾸며도 돼요? 전 간이침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임무가 끝나고 여길 방문했을 때 잠깐 눈을 붙일 수 있게. 물론 여관도 좋지만 긴 여행을 끝내고 오면 움직일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이리스가 방 한쪽을 가리키며 원을 그리며 손짓했다.

“소파도 있으면 좋겠는디. 천은 안 되겠는디. 도깨비바늘이 다 망쳐 놓겠네. 널찍한 식탁도 있으면 좋겠고.”

헤르마가 휘휘 주위를 둘러보며 하는 말에 제퍼가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짝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슬그머니 내게 다가와 이야기를 꺼냈다.

“마스터, 혹시 저희 도깨비바늘이 좀 여기저기 작은 구멍을 좀 낸다면… 저 수당 깎이나요? 애가 착한 앤데 가끔 자제를 못 할 뿐이에요. 뚫어 놔도 다시 꿰매면 되니까….”

“제이 님이 여기에 가구를 마련한다면 정말 비싼 걸로만 채워 놓으시지 않을까? 그럼 너 도깨비바늘 한 번 소환할 때마다 100다이아씩 깎일 수도 있을걸? 그러니까 그 성격 좀 고치라고 해.”

“100다이아…. 오랫동안 우리 도깨비바늘을 불러 주지 않으면 애가 섭섭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해 보니 테라리움 아티팩트 안이 더 쾌적하겠네요. 저는 아티팩트로 제 드라이어드를 보면 되니까 괜찮습니다.”

“성격을 고칠 생각은 안 하지?”

길드 룸을 꾸민다라…. 그것도 멋있을 것 같다. 보통 길드 룸엔 어떤 가구들을 채우지? 각자 월렛을 가지고 있으니 금고는 필요 없을 것 같고.

다들 항시 이곳에 머무는 건 아니니까 혹시라도 먼지가 쌓일 것을 대비해 최대한 심플하게 꾸미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들에게 감화되어 나도 저절로 길드 룸 꾸미기에 몰입하게 됐다.

하지만 당장 장인이 우리 테라리움으로 이주해 오지 않는 한 각 잡고 꾸미기엔 많은 시일이 걸리겠지. 그건 또 그거대로 아쉽네.

만약 길드 룸을 꾸미게 된다면 모든 길드원이 함께 있을 때 꾸미고 싶다. 각자의 선호를 조합하면 정말 아늑한 장소가 되지 않을까?

“드루이드님, 저희 테라리움에 또 다른 방문자가 찾아왔어요!”

민들레 아이들이 조용한 것이 또 어디 가서 사고치고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마거리트 개화만 보고 과수원을 나갔던 데이지2가 밝은 얼굴로 찾아왔다.

“방문자?”

“네! 일꾼으로 온 것이 아닌 진짜 여행을 하다 이곳에 오게 된 드루이드라고 합니다. 벌써 곳곳에 28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진 걸까요? 당장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겠다고 하면 어떡하죠? 하루빨리 과수원에 사람을 고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과수원을 테라리움의 얼굴이 되는 곳이니까….”

“진정해. 아직 그렇게까지 많이들 몰려올 정돈 아닐 거야. 본격적으로 홍보 의뢰를 넣은 적도 없으니까.”

뒤 번대 테라리움으로 내려가게 된다면 겸사겸사 테라리움 이주 홍보를 해 달라고 의뢰를 맡겼던 이리스 파티도 여기 있지. 딱히 우리 테라리움이 큰 소문이 날 만한 일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나저나 여행을 하다 이곳에 온 드루이드라. 어떤 사람일까?

핸드폰을 들어 테라리움의 정보를 볼 수 있는 창을 팝업했다. 길드원들과 일꾼들로 등록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방문객 리스트에 딱 한 명의 이름이 있었다.

[로웰라]. 등급은 8급. 풋풋한 방문객이라는 표시도 함께 있었다. 풋풋한 방문객은 또 뭘까? 소유하고 있는 드라이어드는 엉겅퀴.

엉겅퀴라고 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내가 퀘스트를 완료하고 26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길에 만났던 뉴비.

당시 나도 쪼렙이었지만 나보다 더 쪼렙인 드루이드를 보자 너무 반갑기도 하고 노멀 등급인 엉겅퀴를 살뜰히 아껴 주길래 이것저것 ‘소매 넣기’를 해 주었지.

그러고 보니 그때 만난 뉴비는 어딜 여행하고 있을까?

뉴비의 행방은 금방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테라리움의 모험 드루이드 첫 방문객이 정말로 그 뉴비였기 때문이다.

뉴비는 테라리움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지친 행색을 하고 여기저기 소심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헤어졌던 그사이, 저 뉴비도 참 고생이 많았구나. 하지만 행색에 비해 얼굴이 밝은 것은 보니 모험을 잘 즐겨 온 듯했다.

단지 뉴비를 맞이하러 갈 뿐인데 구경이 끝났다 여겼는지 날 따라 우르르 과수원을 나온 길드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온 김에 테라리움 구경도 좀 하는 게 어때요? 할 일이 많아서 푹 쉴 수 있는 건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이라도 해요. 아, 물론 보수 중이라 볼 곳은 많지 않겠지만.”

“그럼 전 길드 스톤헨지로 돌아가서 어떻게 꾸밀지 좀 더 고민해 볼래요. 버킷 리스트가 생기면 다른 테라리움을 방문할 때 신경 써서 챙겨 올 수 있으니까요.”

이리스가 헤르마와 함께 쪼르르 과수원으로 돌아갔다. 의외로 함께 할 줄 알았던 제퍼는 남아서 데이지2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듣기론 여기에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서나 볼 수 있는 수액 분수가 엄청 많다고 들었습니다. 거길 구경하고 싶어요, 마스터.”

“아, 드루이드님. 그러고 보니 분수가 다섯 개에서 일곱 개로 늘었습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어요. 그… 세계수 가지에 언질이라도 해 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자칫 잘못하다간 온 테라리움이 수액 분수로 가득 차게 생겼습니다. 다 소화도 못 시킬 거 왜 그렇게 욕심내서 다이아를 드시는지, 원. 물론 드루이드님의 다이아 사정을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 그래도 분수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늘릴 정도면… 다이아가….”

“일곱 개…. 한 자릿수 테라리움엔 겨우 한두 개 있는 수액 분수가 일곱 개….”

제퍼가 황홀하단 표정으로 데이지2를 바라보았다.

다이아 분수가 그새 두 개 더 뚫렸다고? 16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지 두 개가 사료 통 터는 고양이처럼 다이아 금고를 털어먹는다 싶었는데!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야. 엘더 어딨어? 엘더 이거 들었어, 안 들었어?

바로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었더니 엘더가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있었다. 들었구나.

두 가지가 그러했듯 할 수만 있다면 쟤도 내 다이아 금고에 한 10분만 던져 놓으면 좋다고 헤엄을 칠 텐데. 우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는 엘더를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엘더, 그거 아니…? 고개만 돌려도 보이는 저 수많은 인공개량 드라이어드들. 그 드라이어드들을 감싸고 있는 가상 아티팩트를 촉촉이 적시고 있는 가느다란 물줄기들. 그것도 다… 다이아 분수란다.

물줄기가 너무 가늘어서인지, 커다란 다이아 분수의 기운에 눌려서인지 미처 눈치를 못 챘나 본데. 안과 밖의 드라이어드들의 분수들을 다 합치면 큰 물줄기 대여섯 개는 나오지 않을까?

평생 눈치 못 채길 빈단다.

“전 쉬는 건 충분하니 복구 일손을 돕겠습니다.”

노토스는 간결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곤 홀연히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레이트 빈 연합에서 데려온 일꾼들도 충분해 보이는데. 제퍼마저 데이지2를 꼬드겨 떠났지만 시들링만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서 있었다.

모두를 보내고 우리 테라리움으로 기꺼이 찾아와 준 뉴비에게 오지랖을 부리러 갈 예정이었다. 물론 나 혼자.

여태 만나왔던 드루이드들이 내겐 너무나 고렙들이어서 간만에 나보다 레벨이 낮은 드루이드를 보니 꼰대처럼 보일 진 몰라도 선배 마인드를 발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힘든 건 없는지, 내가 뭐 도와줄 건 없는지. 하지만 그걸 나보다 레벨이 높은 고렙 유저 앞에서 하기엔 좀 쪽팔린데.

하지만 시들링은 홀연히 볼일을 찾아 떠난 다른 길드원들과 다르게 결코 내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내 드라이어드들이 날 따라다니는 것과는 별개로 살짝 귀찮은 껌딱지 하나가 붙은 기분이다. 눈치를 줘도 알아먹을 녀석이 아니니 할 수 없이 함께 뉴비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28번째 테라리움에 오신 걸 환영해요.”

“어! 전에 만났던 드루이드님! 저 기억하세요? 그때 제게 비상식량이랑 포션도 잔뜩 챙겨 주셨는데. 저, 덕분에 여행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당연히 기억하죠. 전에 만났을 때보다 많이 강해진 것 같네요!”

“히히… 그렇게 강해진 건 아닌데용. 드루이드님에 비하면 전 갓 태어난 망아지지용. 그래도 그때보단 조금 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저희 엉겅퀴가 이제 머리통만 한 작은 불 정돈 한 방에 때려잡을 수 있게 되긴 했어요. 히히.”

뉴비는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약한 편인지, 귓바퀴를 잔뜩 붉히고 온몸을 배배 꼬았다.

시들링을 보고 깜짝 놀랐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뉴비는 의외로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 못해 시들링의 수배서를 못 봤구나 싶었다.

다행이네. 하긴, 시들링을 보자마자 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했던 이리스 파티나 사시나무처럼 떨었던 루프와 윈터를 떠올리면… 뉴비 정도면 눈뜨고 기절을 하지 않았으려나.

“여기가 28번째 테라리움이었군요. 뭔가 다른 테라리움에 비해 고즈넉한 느낌이에요. 제가 이렇게 방문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누가 봐도 황량한 테라리움을 고즈넉하다고 평가해 줘서 고마웠다.

“아직 열심히 준비하는 단계지만 쉬었다 가세요.”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아, 전 ‘로웰라’예요. 그런데 드루이드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드루이드님처럼 강한 분은 더 뒤 번대 테라리움에 계실 줄 알았는데.”

“전 제이예요. 제가 이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 잠깐 와 있어요. 저도 원래 여기저기 잘 돌아다녀요.”

뉴비 로웰라가 별안간 차렷 자세로 온몸을 바싹 굳히며 눈을 크게 떴다.

“‘제이’요? 어,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설마… 혹시? 26번째 테라리움의 영웅 아니세요? 맞죠? 세상에 26번째 테라리움 주변의 그 많은 불을 다 정리하고 다녔던 드루이드가 내 눈앞에 있었는데도 몰라봤다니! 더구나 행정 관리원이라니…. 대단하다…! 멋있는 드라이어드들도 데리고 다니고 테라리움 행정 관리원도 하다니….”

너무 비행기를 태워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에이, 로웰라도 여행 많이 하면 저보다 더 대단해질 수 있을 거예요.”

“와… 겸손하다! 멋있다! 제 롤 모델이에요!”

마치 삐약삐약 부리를 오물조물하는 병아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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