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리트는 엘더와 사이가 좋지 않은 반면에 데이지에겐 어느 정도 호감이 있어 보였다.
어떻게 할 거냐며 자신에게 왁왁 소리를 지르는 엘더를 무시하고 데이지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나랑 꼭 닮아서 사람들은 물론 드라이어드들도 가끔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애가 있는데 걔 이름에도 데이지가 들어가. 걔가 정말 착한 애거든. 훈련을 받기 싫어서 도망가면 내가 들킬 때까지 자기가 나인 척해 줬어.”
꽃들도 대리 출석을 하니? 과에 여자가 얼마 없어서 나도 못 해 본 대출을 네가 해 봤다고?
대출을 해 줬다고 착한 애라니….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 보면 마거리트는 성목이 된 지 얼마 안 된 어린 꽃인데, 참 어려서부터 되바라진 꽃이었구나.
“그 데이지도 착하니까 너도 분명 착한 꽃일 거야. 내가 비록 모든 데이지들을 다 만나 본 건 아닌데 데이지들은 다 착해. 너도 착해! 네가 좋아! 내 진리의 꽃이니까 너도 착한 꽃!”
우리 레드 데이지들을 보면 데이지들이 모두 착하다는 말에 반박할 수 없지만, 연금탑에서 만났던 하얀 데이지를 떠올리면 살짝 의문이 생긴다. 드루이드에 대해 일말의 존중도 없던 그 하얀 데이지는 결국 뭐였을까? 검은 드라이어드들처럼 개량된 드라이어드였을까?
“엘더도 내 꽃인데.”
비록 처음 만난 드라이어드는 데이지지만 처음 영혼의 연결을 맺은 드라이어드는 엘더인 점을 굳이 말하진 않았다. 느낌상 마거리트와 엘더의 2차전이 시작될 것 같아서였다.
두 마리의 하얀 고양이 같은 꽃들이 아웅다웅하는 꼴을 보니 고양이들 합사 초기 단계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부모님의 반대로 고양이를 키울 순 없었지만 너무 키우고 싶었던 마음에 찾아봤던 정보에 의하면 합사 전에 둘을 격리시켜 놔야 한다고 했는데….
마거리트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굴었다.
데이지의 주위를 가볍게 돌며 재잘거리는 마거리트와 그런 마거리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스태프를 꾹 쥐고 있는 엘더가 보였다. 역시 둘을 떼어 두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어떻게 가지를 지정해서 태어날 수 있었던 거야? 세계수를 괴롭혔다니. 애초에 세계수를 괴롭힐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긴 해?”
내 말에 제퍼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리더니 미간을 팍 좁히며 마거리트를 바라보았다. 별 이상한 꽃을 다 본다는 표정이었다. 마거리트가 좀 유별난 드라이어드긴 하지만 본인이 데리고 다니는 도깨비바늘도 만만찮은데.
“내 진리를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 진리의 영혼에 속해 있는 두 개의 가지 중 하나로 보내 달라고 졸랐어. 보내 주지 않으면 보내 줄 때까지 세계의 평화를 계속 예언할 거라고 했거든.”
“세계의 평화를 예언한다고?”
“응! 하지만 난 방금 보았다시피 예언 정확도가 떨어져서 반작용을 일으킬 확률이 훨씬 높으니까….”
본인도 예언 능력이 좋지 않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그걸로 세계수를 협박했다니. 세계의 평화의 예언이 실패해서 반작용이 난다면… 세계에 분쟁이 가득해질 거란 소리 아니야?
“너 미쳤어? 겨우 세상 밖에 나오자고 세계가 망하라고 저주를 했다는 거야?”
“겨우 세상 밖이라니! 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 진리를 만나고 싶었다구!”
엘더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마거리트를 타박했다. 그녀의 대책 없는 행동에 엘더를 제외한 모두가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론! 내 진리가 있는 세상을 정말로 망하게 내가 바라겠어? 그냥 말만 그런 거야, 말만. 어차피 난 힘도 그렇게 세지 않아서 멸망을 부를 수준이 아닌걸. 아, 엘더, 네 정도면 내가 망하라고 빌 수 있겠다. 이참에 내가 너 평생 무럭무럭 잘 자랄 거란 예언을 해 줄까?”
“이 레어 등급 따위… 아니 내 줄기 반토막도 안 오는 조막만 한 게!”
엘더는 내가 다이아를 막 쓸 때만큼 마거리트를 향해 짜증을 팍팍 부렸다.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틈틈이 엘더를 놀려 먹는 마거리트가 귀여웠다. 나는 외동으로 커서 잘 모르겠지만 현실 남매의 모습이 저러할까 싶었다.
“어쨌든 난 세계수 안에서 훈련을 열심히 하면 점점 강해질 텐데 강해질수록 예언의 힘도 세져서 나도 모르게 잠꼬대로 세상의 멸망을 정말 예언해 버리면 어떡하냐고, 날 통제할 드루이드를 하루빨리 만나지 않으면 진짜 큰일 난다고 계속 졸랐어. 그랬더니 결국 28번째 세계수의 가지로 보내준 거야. 어차피 하나의 드라이어드를 선별해 28번째 가지의 생명의 개시를 알려야 했다고.”
“드라이어드는 잠을 잘 필요가 없는데 무슨 잠꼬대야?”
“널 위해서라도 잘 거야. 내가 잠꼬대로 엘더 플라워는 앞으로도 그 미모가 시들지 않을 거라고 계속 말할 거야. 네가 입이 닳도록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나불거리고 다녔으니 믿는 구석이 사라지면 우리 진리가 계속 널 데리고 다닐 줄 알아?”
결국 세계수가 날 위해 마거리트를 보냈다기보단 28번째 가지가 완전히 회복된 것을 알리기 위해 열매를 맺게 하려던 와중 마거리트가 선별된 것이었구나.
그러다 아무도 발견 못 해서 썩어 버리면 다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갈 테니… 또다시 시끄러워질 것을 대비해서 플로라를…?
“엘더 얼굴은 안 돼.”
주저 없이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장난으로라도 우리 엘더 얼굴은 안 된다.
물론 우리 엘더가 엄청 유능한 힐러지만 얼굴도 엄청 유능하단 말이야. 저 얼굴이 내 삶의 낙인데 얼굴만큼은 건들면 안 된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 나를 보며 엘더가 살짝 충격 먹은 표정을 했다. 하지만 금세 회복하고는 마거리트를 향해 보란 듯이 콧대를 높였다.
마거리트가 약 올라 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더니 내게 바짝 다가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나만 들리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 진짜 안 예쁜 꽃이 되면 버릴 거야…? 너에게 난 그저 얼굴만 예쁜 꽃인 거야?”
“얼굴만 예쁜 꽃이라니? 넌 존재 자체가 예뻐. 너무 잘나서 마거리트가 예언으로 널 망하게 하려면 메스키트보다 강해져야 하지 않을까? 웬만한 예언 실패론 네 미모가 빛을 잃을 리가 없어. 그리고 난 내 드라이어드는 절대 안 버려.”
완전히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었는지 뜸을 들이던 엘더는 이내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그의 뒤로 후광이 보이는 듯했다. 엘더만 반사판을 대고 조명을 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제이는 나 말고 다른 꽃한테 이런 칭찬 한 적 없어. 제이의 미적 수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나뿐이야. 넌 뭘 잘하는데? 예언도 제대로 못 하는 게.”
엘더가 콧방귀를 뀌며 마거리트에게 으스댔다.
“저… 저게 진짜!
마거리트는 주먹을 쥐며 이를 갈다가 금세 진정했다. 그러곤 손등으로 제 얼굴을 받치며 나보란 듯 내 앞에서 콩콩 뛰었다.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꽃인데. 나의 진리, 그렇다고 해 줘. 나 정말 사랑스러운 꽃이야. 진리 말도 잘 듣고 훈련도 열심히 할 거야. 세상에서 제일 강한 마거리트 꽃이 될 거야. 쟤처럼 입만 산 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는 어여쁜 꽃이야.”
“훈련받기 싫어서 비슷하게 생긴 꽃을 데려다 놨다며?”
“나의 진리, 꽃도 한 땐 방황할 때가 있는 법이야. 그건 묘목일 적의 치기라고! 늑장 부리느라 시기 놓치고 피어나는 꽃들도 얼마나 많은데? 지난날은 잊고 앞으로 미래가 창창한 나를 더 예뻐해 줘.”
이대로 내버려 두면 하루 종일 엘더와 마거리트에게 시달릴 것 같아서 메스키트에게 헬프를 쳤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훈련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네요.”
성큼성큼 내 곁으로 다가온 메스키트가 별안간 마거리트와 데이지의 허리를 한 팔로 안아 불쑥 들어 올렸다.
미리 눈치채고 발을 굴러 쿵!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발목을 땅속 깊이 파묻은 데이지는 가볍게 힘을 준 메스키트에게 끌려가지 않았다.
반면에 마거리트는 메스키트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녹색 뼈대 드레스 안으로 헤엄치듯 발길질하는 마거리트의 다리가 보였다.
“진리, 구해 줘! 메스키트가 훈련시킨다고 하면 진짜 무섭단 말이야! 난 아직 처음 만난 내 진리의 곁에 더 있고 싶어!”
목욕하러 끌려가는 고양이처럼 마거리트가 미친 듯이 몸부림쳤지만 메스키트는 흔들림 없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낑낑대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어차피 28번째 테라리움은 내 아티팩트나 다름없는 곳, 이 안 어디든 내 드라이어드들이 움직일 수 있었다. 메스키트는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나와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듯 성큼성큼 과수원을 나갔다.
플로라의 마거리트를 보면 모든 마거리트의 성격이 다 저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우리 데이지였다.
“제이 님, 저도 열심히 노력해서 더 강해질 거예요.”
“응? 갑자기? 우리 데이지는 항상 열심히 하고 있는걸.”
그 답변이면 됐다는 듯 데이지의 손가락이 내 옷깃에서 떨어졌다.
우리 데이지야말로 정말 사랑스럽지. 데이지의 의도는 다르겠지만 마치 내 덱의 사랑스러운 드라이어드 포지션을 놓고 원조 러블리가 견제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난 정말 복 받은 드루이드야.
결국 예언의 대가로 요구했던 드라이어드 열매를 내가 차지해 버리게 되었으니 플로라에겐 다른 보상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테라리움들처럼 여관이 있거나 음식점이 있지 않아서 그들의 의식주를 완벽히 해결해 줄 순 없으니 다이아를 아주 넉넉히 쥐여 주었다.
플로라는 마거리트를 갖지 못한 것에 큰 아쉬움을 표했지만 상자 가득히 쏟아 내는 다이아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드라이어드 열매의 가격을 포함하고 유랑 점술단의 인원이 꽤 됐으니까 다들 아주 좋은 여관에서 최고급 서비스를 받는다고 치면…. 행여 모자랄까 계속해서 다이아를 부었더니 결국 플로라가 직접 내 손길을 제지했다.
그들은 우리 테라리움에서 오래 묵지 않고 곧장 다른 테라리움을 향해 떠난다고 했다.
플로라는 떠나기 전 내게 마거리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마거리트의 꽃잎이 신화의 힘을 깨우친다면 필시 단 하나의 궁극적인 예언을 갈망하게 될 거예요. 그 예언을 찾기 위해 아주 많은 곳을 돌아다녀야 하죠. 그 궁극적인 예언에 대해선 저 역시도 아는 것이 없고 제 마거리트조차 의미를 알지 못한답니다. 좇아야 한다는 조급함은 있지만 무엇을 좇는지를 모르지요. 그렇기에 절대 한곳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을 거랍니다. 더 많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것들을 만나고 싶어 할 거예요.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꽃잎은 시들어 버릴 수도 있어요.”
“시들어 버린다고요?”
“네…. 스트레스가 쌓여 병이 되고 결국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만인을 위한 예언자인 마거리트는 그런 꽃이랍니다. 언젠가 때가 된다면 직접 마거리트에게 신화에 대해서 물어보세요. 어쩌면 진정한 작은 세계수인 제이 님은 신화를 통해 궁극적인 예언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내 마거리트가 병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난 계속 모험을 해야 한다는 거구나. 이런 역마살이 낀 꽃이 다 있나?
마거리트에 대한 중요한 충고를 해 준 플로라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 마차를 정비해 테라리움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