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604)

조명 아래 드러난 백발은 엘더의 것과 비교하면 좀 더 베이지색에 가까웠다. 가슴께까지 땋아 내린 양 갈래 머리는 튀어나온 잔머리 하나 없이 단정하고 풍성했다.

후드를 벗은 드라이어드는 두 손을 모으더니 그 안에 작고 하얀 꽃잎들을 가득 만들어 냈다. 수북하게 모인 꽃잎들은 빛을 내며 하나로 뭉치더니 작은 모자가 되었다. 챙이 짧고 둥근 모자에 산이나 공원에서 보이는, 계란을 닮은 익숙한 하얀 꽃이 한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드라이어드는 모자를 삐뚤게 쓰더니 날 향해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이 님은 꽃점에 대해 아시나요?”

순하게 축 처진 눈매에 담긴 물에 젖은 듯한 노란색 눈이 스르륵 플로라를 향하자 나도 따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마법 소녀가 변신하는 것처럼 뾰로롱 모자를 만들어 내어 쓰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플로라와 대화 중인 것도 잊고 있었다.

“꽃점이요? 음… 글쎄요.”

“꽃점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랍니다. 어쩌면 드루이드분들이라면 다들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거예요. 꽃잎을 하나하나 떼면서 점치고 싶은 것을 보는 거예요. ‘할까, 말까’, 혹은 ‘맞다, 아니다’로 둘 중 하나를 번갈아 고르며 꽃잎을 떼고 마지막 꽃잎을 뗄 때 해당하는 답이 곧 점지가 되는 것이지요.”

“어, 뭔지 알아요. 설마 그걸로 점을 본다는 건가요?”

만화에서 캐릭터가 사랑 여부를 점치며 꽃잎을 떼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 놀이터에서 따라 해 봤던 적이 있다.

집에 들어가면 성적표가 우편으로 발송되어 있다, 아니다로 꽃잎을 열심히 뗐었다. 분명 마지막 남은 꽃잎은 아니라고 했는데 막상 집에 돌아가 보니 이미 도착한 성적표는 바닥에 활짝 펼쳐져 망친 점수를 노골적으로 공개하고 있었고 그 옆에 효자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

“꽃점은 설명만 들으면 정말 단순해 보이지만 여기 이 마거리트의 꽃잎을 가진 드라이어드는 진실로 자신의 꽃잎을 통해 예언을 할 수 있답니다. 마거리트가 꽃점에 이용되는 아주 대표적인 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마거리트 꽃잎이 진실된 예언을 할 순 없어요. 인연이 맞는 드라이어드가 한자리에 모이고 강한 힘을 가진 마거리트 드라이어드일수록 꽃점의 정확도가 높아지지요.”

“이야기를 들으면 플로라 님의 마거리트 드라이어드가 보는 미래는 무조건 맞는 것 같은데….”

“이 마거리트 드라이어드는 선대 플로라부터 계승되어 온 특별한 힘을 가진 드라이어드이기 때문이랍니다. 후대의 플로라에게 이름과 함께 영혼의 연결을 끊은 드라이어드도 함께 계승시켜주고 있어요.”

“영혼의 연결을 끊어 계속 주인을 바꿔 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가능… 하기는 하겠구나. 하지만 드라이어드가 그걸 용납해요?”

드라이어드와 영혼의 연결을 끊는다는 건 정말 잔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어닝을 기다려 왔던 인동덩굴 드라이어드를 떠올리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그 드라이어드는 마지막에 다른 주인을 찾아 떠났지만, 어쨌거나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전 주인과의 유대감은 유지되었다.

인동덩굴은 어닝이 영혼의 재연결을 강요하면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며 떠날 수 있게 허락도 받았었다.

만약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 드라이어드들은 나와 영혼의 연결을 끊고 다른 주인을 섬기길 강요하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도. 영혼의 연결은 단순히 뽑기로 뽑은 카드를 덱에 넣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텐데.

“선대 플로라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도 있지만 마거리트 드라이어드들은 예언에 관한 힘을 일깨울수록 그만큼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이들의 미래를 밝히는 것을 갈망하게 된답니다. 그들의 탄생 신화 자체가 그것과 관련이 있기에 단 하나의 궁극적인 예언을 찾을 때까지 본능적으로 좇게 되는 것이지요.”

마거리트의 신화는 뭘까?

“그럼 제이 님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답을 드려 볼게요.”

그리고 놀랍게도 플로라는 마거리트 드라이어드와 그래프트를 펼쳤다.

마거리트 드라이어드는 계란을 닮은 작은 꽃들을 엮어 만든 화관으로 변하여 플로라의 머리에 씌워졌다. 화관 주위로 쉴 새 없이 하얀 꽃잎들이 빛을 내며 날아다녔다. 꼭 플로라의 주위만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그녀가 마치 꽃의 여신인 것처럼 느껴졌다.

플로라의 주위를 빙 둘러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모서리가 둥근 카드들이 꽃잎처럼 차르륵 펼쳐졌다. 카드들은 토성의 고리처럼 플로라의 주변을 빙글 돌면서도 각자가 천천히 회전하며 하얀빛을 뿜어 댔다. 이윽고 카드는 하나둘 사라졌고 마지막 한 장만이 남게 되었다.

플로라는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떴다. 본래 갈색이었던 그녀의 눈이 놀랍게도 형형한 금안이 되어 있었다. 마거리트 드라이어드와 같지만 다른 느낌의 눈빛이었다.

단지 그것뿐인데 내 앞의 플로라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사람이 아닌 지금 처음 만난 아주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훨씬 더 넘어서… 라고 나오지만 이례적으로 첨언이 떴어요. 나비의 날갯짓을 쫓다 보면 파도 소리가 말라 버린 그곳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나옵니다.”

플로라와 마거리트 드라이어드의 그래프트는 꿈을 꾼 것처럼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플로라의 머리 위 화관의 꽃들이 떨어져 흩어지고 다시 모여 마거리트가 되었다.

잠깐 사이에 플로라는 무척이나 피곤한 얼굴이 되었다. 나와 다르게 남들은 생명력을 소비하여 진행하는 드라이어드와의 그래프트. 설마 점 볼 때마다 매번 그래프트를 펼쳐 온 건가? 내 점 하나를 보기 위해 그녀가 그래프트까지 쓸 줄은 몰랐기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첨언이 뜨는 건 정말 처음이에요. 보통은 ‘예, 아니오’로 간단히 답이 나오고 끝난답니다. 제이 님과 꽃점의 파장이 정말 잘 맞는 걸까요?”

“대단한 광경을 보여 주셔서 감사해요! 거기다 아득하게 생각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나마 구체적으로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일단 50번은 훌쩍 넘는 테라리움으로 가야 하는 것은 알겠다. 다만 나비의 날갯짓과 말라 버린 파도 소리가 무엇인지 조금 애매했다. 설마 나비는 엘더의 나비를 말하는 걸까?

“유랑하며 점을 봐 주고 대가로 의식주를 해결하신다고 하셨죠? 다이아를 얼마나 드리면 되려나….”

“아무나 점을 봐 주지 않는다고 하니까 엄청 비싸지 않을까요?”

“제이 님이 점을 보고 나면 저도 슬쩍 부탁해 보려고 했는데… 그래프트면 무리겠네요.”

뒤에 서 있던 제퍼와 이리스가 수군거렸다. 만약 이곳에 엘더가 있었다면 다이아 이야기에 성냈을 것이다.

“사실… 다이아보다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답니다. 처음에 28번째 테라리움에 오기까지 운명의 강한 이끌림에 끌려왔다고 말씀드렸죠. 그 이끌림에 대한 것이 점을 보며 명확해졌답니다. 이곳에 머지않아 저희의 소중한 꽃잎이 태어날 거예요. 맑고 깨끗하며 순수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져요. 점을 대가로 그 아이의 영혼이 담긴 열매를 주셨으면 합니다.”

“열매요? 설마 드라이어드 열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플로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28번째 세계수의 가지에서 드라이어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스케어크로우의 일지에 따르면 가지는 병충해의 피해를 입어 오랫동안 열매를 맺지 못했고 더구나 불에 의해 리타이어됐다가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아직 가지가 열매를 맺을 시기가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저희의 소중한 꽃잎의 탄생이 임박한 것은 진실입니다. 어쩌면 가지 구석에서 성장이 더딘 열매 하나가 겨우 결실을 맺었을 수도 있답니다. 부디….”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말씀드리기 좀 어려운데.”

우리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외부인에게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어물쩍거리고 있자 이리스가 슬쩍 끼어들었다.

“지금 특정 드라이어드가 태어나는 열매를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말도 안 돼요. 가지에 맺힌 열매는 개화를 진행하기 전까지 어떤 드라이어드가 태어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 아니었나요?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엄청 큰 혼란이 일어날 거예요.”

이리스의 말이 맞았다. 확률을 조작하지 않는 이상, 뽑기 전까지 무슨 등급의 카드가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사람들은 높은 등급을 뽑기 위해 열매를 가려내고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처럼 등급 무관하게 드라이어드를 아끼는 드루이드들도 많겠지만 과거 데이지의 경우를 생각하면 참담했다.

“어떤 열매에서 어떤 드라이어드가 나올지 정확히 모두 아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플로라의 부케에 포함되는 꽃잎들에 한해서 불특정한 운명적인 예지를 느낄 수 있을 뿐이에요. 저희 폴리움텔러들이 테라리움들을 떠돌며 유랑하는 것은 이런 이끌림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랍니다.”

“원하는 드라이어드 열매를 느낄 수 있다니… 완전 사기잖아? 그게 가능하다니….”

“폴리움텔러는 아니지만 저와 비슷한 능력이 있는 분들이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도 여럿 있는 걸로 알고 있답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특정 드라이어드 열매에 가까워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완전히 사기라든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랍니다.”

달리 해석하면 나도 그게 가능하기는 했다. COST만 되면 원하는 드라이어드가 나올 때까지 모든 열매를 털면 되니까.

이리스의 플로라를 향한 불신 어린 눈빛을 뒤로하고 데이지2를 불렀다. 혹시 세계수의 가지에 ‘남는’ 드라이어드 열매가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데이지2는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플로라의 주장도 확고했다. 그녀에게 차라리 다이아를 대가로 지불하는 것에 대해 여러 번 권유했지만 도통 포기하지 않았다.

특정 드라이어드 열매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심하면 수 년 만에 한 번이기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했다. 마치 제 눈으로 정말 열매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는 한 물러서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고집으로 보여도 어쩔 수 없답니다. 저희 폴리움텔러가 후대로 이어지기 위해선 플로라 부케의 꽃잎들이 정말 필요해요. 열매의 기운은 정말 느껴지니 다시 한번 살펴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거지. 할 수 없이 유랑단에선 플로라만 동행을 허락하고 과수원으로 향하기로 했다.

플로라와 그녀의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천막 밖으로 나왔을 때 기다리고 있던 내 드라이어드들 중 엘더가 너무 과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순간 플로라를 데려가는 판단이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메스키트는 그런 엘더를 보고 나지막한 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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