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604)

데이지2는 입구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직접 보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며 특기인 수다를 한참이나 떨었다.

환영의 수다를 끝낸 데이지2가 많이 바뀐 테라리움을 안내해 주겠다며 이끌 때였다.

“제이 님, 아이언비스트가 뭔가 이상한데요?”

이리스가 내 팔을 가볍게 잡으며 시들링을 가리켰다. 일행과 떨어진 곳에 선 시들링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들링이 왜?

“저 멀리서 꿈쩍도 안 하는데요?”

“빡친 거 아닐까요? 제가 보기엔 이리스가 수작 부린 장난들 다 들켰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한 병 다 비울 때까지 물을 대신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저 사람 이제 오늘 하루 내내 물 한 모금 안 마셔도 될 것 같은데요.”

제퍼가 한 손으론 입을 가리며 몰래 말하는 척은 하지만 다 들리라는 식으로 말하며 이리스를 향해 눈짓했다.

“난 단지 악랄한 사람들은 남모르게 식수에 독을 타서 암살시킬 수 있다는 말만 해 줬을 뿐인데? 너도 거들었잖아. 제이 님이 물 마실 때마다 색깔이 좀 이상한 거 같다느니 뭐가 떠다니는 거 같다느니 마차에서 내내 아이언비스트가 신경 쓰이게 했잖아.”

“야, 작게 말해!”

경계하느라 급급했던 제퍼마저도 이리스의 장난에 동참할 정도면 이제 시들링이 무리 없이 길드원들과 잘 융화되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제퍼의 생각과는 다르게 시들링이 28번째 테라리움에 들어올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무리 그를 길드원으로 맞이하긴 했어도, 전에 그를 테라리움에서 추방하며 접근 금지 제한을 걸어 놨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아마 시들링이 서 있는 저 구간까지가 그의 접근이 허용되는 선이었던 것 같았다.

쟤는 내게 말하지 왜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서 있던 거야. 다른 길드원들에겐 구태여 시들링을 추방했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고 있었는데 좋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들어 시들링의 이름 옆 등급을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 놓은 걸 위로 올리고 접근 금지 제한도 풀었다.

“이제 이리 와도 돼.”

내가 손짓하자 팔짱을 푼 시들링이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옆에 섰다. 딱히 기분 나쁘다거나 한 기색 없이 오로지 무표정이었다. 이런 무뚝뚝한 그가 웃는 얼굴도 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제이 님이 사람들 앞에서 한 일주일만 아이언비스트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 보여 주면 아이언비스트란 칭호도 금방 사라질 것 같아요.”

이리스가 우리 둘을 묘한 얼굴로 보며 툭 내뱉었다.

“그럼 이참에 그 우스꽝스러운 칭호로 얠 부르는 건 그만두고 이름을 부르는 건 어때요?”

“마스터는 그 칭호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역시 대단해. 저흰 수배서 처음 봤을 때 진짜 위험한 사람이라 생각했거든요. 저렇게 사람 이름 대신 칭호가 붙는 게 어디 쉬운 일인지.”

“그런 것 치곤 쟤 우리끼리 아이언비스트… 아니 시들링을 잡아서 현상금 챙기자고 말도 했어요. 막상 만났을 땐 활 든 손도 덜덜 떨었으면서.”

“내가 언제 떨었다고 그래?”

“아닌 척하긴. 지진 오는 줄 알았는디. 여관 무너지는 줄 알았는디.”

“넌 또 왜 이리스랑 작당해서 나한테 그래?”

헤르마까지 가세해서 떠들자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데이지2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동지를 만났다는 표정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리스와 제퍼라면 데이지2의 좋은 수다 대상이 되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틈만 나면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것이 데이지2와 많이 닮아 있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은 놀랍도록 변해 있었다. 무너지고 불에 탄 잔해만 가득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가득했던 곳인데 이젠 대부분 정리가 된 듯했다. 대신 휑한 공터가 곳곳에 자리했다.

데이지2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니 한쪽에 큰 천막과 임시 가판대가 여러 개 세워진 곳이 보였다. 그 앞에 커다랗고 탐스러운 호박 그림이 노랗게 반짝이는 간판이 있었다. 황금 호박 상회가 온갖 생필품들을 싣고 와 임시 상점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그레이트 빈 연합에서 잔뜩 보낸 일꾼들도 일사불란하게 남은 잔해를 옮기거나 임시 거주구를 설치하는 데 바빠 보였다.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이동된 인공개량 드라이어드들도 눈만 돌리면 보였다. 확실히 밖보다 안이 수가 더 많았다.

드라이어드들은 놀랍게도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일꾼들을 군말 없이 도와주고 있었다. 파필리온이 경고했고 실제로도 적으로 만나기도 했던 그들이 기꺼이 내게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텅 비었던 테라리움이 이제야 활기가 좀 도는 것 같았다.

멀리서 샛노란 형상 둘이 우다다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민들레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작은 세계수님! 전 이제 열독을 막아 주는 힘을 사용할 수 있어요! 열기에 약한 드라이어드들에게 좋은 힘이래요! 제가 더 강해지면 작은 세계수님과 같은 분들에게도 효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내게 제일 먼저 도착한 양 갈래 아이가 방방 뛰며 말했다. 당연히 남성형인 민들레노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다르게 목소리가 톤이 더 높았다. 어? 설마.

“작은 세계수님! 제가 더 먼저 힘이 강해요! 쟤는 허접이에요. 쟤가 힘을 사용하면 열독을 다 풀기도 전에 기절할 거예요.”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둘의 힘은 모습도 쌍둥이인 것처럼 세기도 비등하다.

“웃기지 마! 멍청해서 어젯밤에 겨우 힘을 깨우친 게!”

확실히 뒤늦게 도착한 아이가 톤이 더 낮았다. 하지만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렸다. 채 다 묶이지 않은 머리가 삐져나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머리 모양이 반대였다.

싸움에 이긴 아이가 머리끈을 하나 더 갖기로 했으니 이번 싸움에선 민들레나가 이겼나 보다. 아직도 머리끈 하나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너무 귀여웠다.

티격태격 말다툼을 시작하는 민들레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헤르마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 두 묘목 아이들을 보면 뭐 떠오르는 거 없으신가 싶은디….”

“네? 떠오르는 거요?”

민들레 아이들을 보고 뭐가 떠오른다는 거지? 헤르마가 슬쩍 눈짓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전에 왔을 땐 의뢰 때문에 다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확실히 다른 테라리움보다 큰 것 같지 않아?”

“난 잘 모르겠는데. 테라리움들이 어차피 세계수 가지의 영역권 내니까 크기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주변에 건물이 하나도 없어서 더 넓어 보이는 거 아냐?”

“네가 멍청해서 못 알아보는 거야. 그리고 건물 하나 없다는 소리를 그렇게 대놓고 하는 눈치 없는 놈이 어딨어?”

민들레 아이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옹다옹하는 이리스와 제퍼가 보였다. 내가 저 둘과 민들레 아이들을 번갈아 가리키니 헤르마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 확실히 닮긴 닮았다. 헤르마를 따라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둘 모두 대단한데? 나 없는 사이 또 새로운 힘을 깨닫다니. 그런데 혹시 누가 가르쳐 준 거야?”

민들레 아이들은 앞다퉈 28번째 테라리움의 하늘에서 내려온 드라이어드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꽃비가 내리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다양한 드라이어드들을 보는 건 처음이었어요.”

떠드는 아이들 사이로 데이지2가 불쑥 끼어들었다.

“드루이드님, 전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줄 알았습니다. 수많은 드라이어드가 저희 소중한 28번째 테라리움을 침범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나요? 다행히 그들에게서 드루이드님의 기운이 바로 느껴졌기 때문에 안심했지, 알아차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가막살나무가 검을 빼 들고 공격을 강행할 뻔했습니다.”

가상 아티팩트 공간으로 감싸인 드라이어드들이 갑자기 이동해 버려서 나조차도 미처 대비를 하지 못했다. 확실히 내 드라이어드들이 놀랐을 법도 하다. 하지만 민들레 아이들은 그날을 마냥 신기하고 즐겁게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 기운이 느껴졌다고? 어떤 기운인데?”

드라이어드들과 영혼의 연결을 맺은 것도 아닌데 내 기운이 느껴질 수 있나?

“드라이어드들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하고 풍부한 세계수 수액의 청량함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보통의 세계수의 가지에서 터져 나오는 기운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다이아가 이용된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고 그 정도의 다이아를 운용할 수 있는 건 드루이드님뿐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내 기운이 다이아의 기운이란 말이야? 알아차리는 것도 참 신박하다.

그 후 데이지2는 도착한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의 정보를 모두 수집해 기록해 놓았다고 했다.

인공 개량은 이 세계에서 금지된 일이기에 대다수의 드라이어드들이 불쾌함을 느끼는데 바로 앞의 데이지2나 민들레 아이들은 그런 것이 없어 보였다. 당장 내가 아는 드라이어드 몇도 대놓고 혐오감을 표현할 정도였는데.

“기록하는 도중 민들레 종이 섞여 들어간 드라이어드들이 몇 있길래 여기 묘목들에게 버팀목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버팀목의 개념을 모르기에 설명하는 데 조금 힘들었습니다. 한 번도 성목으로서 묘목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확실히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태어난 나무들은… 하지만 드루이드님께서 기꺼이 품기로 하셨으니 차차 배워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연금탑의 종자 보관소에 있던 수많은 인공 개량종들이 떠올랐다. 당장 바곳만 해도 각시투구꽃 외에 백부자, 갈풀, 2가지 종류가 더 결합되어 있었다.

확실히 이곳으로 이주한 드라이어드들 중 민들레 종이 섞인 드라이어드도 있을 법했다. 공격형인 데이지2가 특성이 다른 민들레들을 가르치기엔 한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운 좋게도 좋은 멘토들을 얻은 듯하다.

데이지2는 조건이 되는 드라이어드 몇이 민들레 묘목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무척이나 부러워했다며, 이러다 길 가던 묘목을 가르치겠다고 업어 오는 드라이어드들이 생기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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